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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Nov 16. 2017

건축가의 주유천하 II 경기 남한산성

열여섯. 굴욕의 역사 南漢山城 남한산성

한반도는 외새의 침략을 수 없이 받아가며 이 자리에 터전을 굳혀왔다.

그래 수도였던 한성(서울)을 지켜내기 위해 동서남북의 요새역할을 하는 지역이 필요했고 광주, 강화, 개성, 수원이 이 역할을 해내며 상처뿐인 영광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그중 동쪽인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그 역할을 했다.


天險천험의 요새지 남한산성은 백제 온조왕 13년에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것이 처음이다(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이후 당이 쳐들어 온다는 첩보로 문무왕이 673년 최초로 쌓은것이 지금의 남한산성에 쌓은 晝長주장(밤보다 낮이 긴 산)성이다.

주장성터에 1624년 주장성터에 남한산성을 축조하게 된다.

지금의 수도방위 사령부 역할을 했던 사직동의 총융청의 수장인 총융사는 인근 100km내의 스님들을 집합시키는 포고령을 발표하여 8도도총섭에 임명된 벽암대사 휘하 3,000의 僧軍승군은 근처 망월사, 옥정사 외에 7개의 僧營寺刹승영사찰(승군이 주둔하던 절)을 더 짓게 된다.

이후 승군은 북쪽성곽을 남쪽성곽은 이회장군이 축조하게된다.


북쪽성곽이 먼저 축성되자 남쪽성곽 담당 이회장군에 대한 횡령과 방탕함에 대한 투서가 빗발쳐 처형하게 된다.

이회가 참수당할 때 그의 목에서 한 마리의 매가 날아 나와 부근의 바위에 앉아 사람들을 노려보다가 날아가고 삼전도에서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전해들은 송씨 부인은 남쫏성곽 축성을 위해 삼남지방에서 모금한 쌀을 모두 강물에 집어 던지고 투신하자 이를 기이하게 여겨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해 보니 그가 맡았던 부분이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무죄가 밝혀졌고, 잘못된 결과임이 알려지자 마을 사람들은 橫手횡수(흉한운수)로 죽음을 맞게되었다고 횡수대감이라 부르고 사당을지어 대감당이라 명명하고 도당신으로 모신다.

이곳이 지금의 西將臺서장대 옆 淸凉堂청량당(경기도유형문화재 제3호)이고 지금도 매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이회장군의 목에서 나온 매가 앚았던 곳이다.

매바위

우여곡절 끝에 1626년 2년 5개월 만에 남한산성이 완공된다.

광주산맥 주맥에 쌓은 15만 9,859평의 남한산성은 현재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속한다.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 따로 설치하고 5營영으로 나누고 前營將전영장은 남장대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 좌영장은 동장대에,우영장은 수어장대에 진陣을 쳤다. 

지금은 수어장대守禦將臺(경기도유형문화재 제1호)만 남아 있다.

수어장대

잘 정돈된 산길을 따라 20여 분 올라가면 해발 490m의 산세와 아름다운 굴곡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쳐진 야트막한 성곽을 만난다.

성벽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서울 시내와 성남시가 훤히 눈에 들어온다. 


불과 359년 전, 인조는 이곳에서 끝내 청군에게 무릎을 꿇어 수치스러운 역사의 주인으로 남았다.

최근 남한산성이라는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주목을 받게된 남한산성과 삼전도.

그들만의 리그

사실, 소설과 영화는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재미를 위해 Fiction이 가미된 소설이고, 영화일 뿐이다.

순수한 역사로 받아들인다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소설 동의보감이 그러했고 삼국지연의(일반적으로 알려진 삼국지)가 그 했다. 


영화상에서 대립되는 두인물에서 事大사대와 斥邪척사를 이야기하는데, 이는 잘못된 비교로 정확히 하자면 主和주화(화친하자는)와 主戰주전(결사항쟁을 주장하는)으로 비교 해야한다.

명이든 청이든 양쪽 모두 事大사대이며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주변 강국과 타협하는 사대주의가 아닌 사대론은 외교정책 중의 하나일 뿐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가상의 인물인 서날쇠역을 맡은 고수의 대사를 빌자면 그저 그들만의 리그인것이다.


전 다만 봄에 씨를뿌려 가을에 거두어 겨울애 배를 곯지 않는 세상을 바랄뿐이옵니다.


1636년 12월 청태종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 침입하자 인조는 피난길에 오른다.

경복궁~종각~수구문~살곶이 다리~송파나루~남한산성

산성을 오르는 인조는 신하의 등에 번갈아 업혔으나 지친 신하들은 얼마 못 가서 주저앉기를 거듭했다고 한다.

청군은 소나무를 베어 만든 목책과 목책 사이에 새끼줄을 연결하고 방울을 매달아 조선군 전령이 목책을 넘으려 하면 어김없이 딸랑딸랑.

완전히 고립.

한 겨울 병사들의 방한복은 가마니.


최명길 등의 주화파主和派는 청나라와 화친 주장하고 김상헌 등의 주전파主戰派는 결사항전 주장한다.

최명길이 항서를 쓰면 김상헌이 찢어 버리고...

12월 27일 이기남은 소 두 마리와 돼지 세 마리, 술 10병을 갖고 청군 진영으로 갔지만 돌려보낸다.

청의 진영에 왕래 했던 이는 문신이 아닌 예조판서라 가칭한 무신 李箕男이기남이었다.

성안의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청군.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상황에 主和주화를 주장하던 최명길은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킨다는 손무병법의 不戰而屈부전이굴을 들고 나온다.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하자고 못하다가 하루아침에 성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어육魚肉이 되면 종사를 어디에 보존하겠느냐

인조는 항복을 결정한다.


爲人臣者 위인신자

君憂臣勞 군우신노

君辱臣死 군욕신사


신하인 사람은 

임금이 근심하면 해결하기 위해 힘쓰고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목숨을 버리고 치욕을 씻어야 한다.


김상헌이 목을 맸으나 죽지는 않았다.

영화상에서 김상헌은 아무도 없는 쓸쓸한 방에서 칼로 복부를 찔렀다.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이다.

효종실록에 기록된 김상헌 졸기에는 의견이 수용되지 않자, 68세 된 김상헌은 6일간 단식에 들어갔고 그 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맨다.

처음부터 자결은 성공할 수 없었다.


이조참의 이경여와 공의 자제들이 붙들고 지켜서 자결하지 못하게 하였다.

- 산성일기


신념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모습으로 기억하게되는 영화의 그림은 허구다.

소현세자가 본국에 발송한 보고서 모음인 瀋陽狀啓심양장계에 따르면...


청나라 수도 심양(션양)에 끌려간 72세의 김상헌은 형부(법무부)에서 재판을 받았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항복의식을 거행할 때 동참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는 물음에 김상헌은 화친을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삼전도에 가고 싶었지만, 몸이 아파서 갈 수 없었다고 답변했다. 

이어 병자호란 뒤에 정부 일을 하지 않은 게 척화파이기 때문이 아니냐는 질문에 척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고 나이와 건강 때문에 정부 일을 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청나라의 파병 요청에 대해 반대 상소를 올린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반청(反淸)의 신념으로 파병을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파병을 반대한 것은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였고, 임금은 아버지 같으므로 속생각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상소문을 올렸노라고 답했다.


공판이 끝난 뒤 형부는 김상헌에게 사형을 구형했지만 인조실록에 따르면, 순치제는 김상헌을 조선 의주에 감금하라고 선고했다.

김상헌이 청나라 형부에서도 척화파의 소신을 보여주었다면, 형량과 처벌 방법은 분명히 세졌을 것이다.

결사항전을 주장한 三學士삼학사, 홍익한, 김집, 오달제는 인질로 청나라로 끌려가 바로 참형을 당했다.

조정은 이 세 선비에게 영의정 추증했다.


성문을 열고 삼전도를 향하고 당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三跪九叩頭 삼궤구고두
삼전도비

跪궤는 무릎을 꿇는 것이고, 叩고는 머리를 땅에 닿게 하는 것이다.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3번, 이걸 3번 반복한다.

1639년 청의 강요로 지금의 서울 송파구 석촌동 289-3에 당태종은 위대하다는 삼전도비 건립한다.

사적 제101호.

효종은 남한산성에 상궐 73칸, 하궐 154칸의 행궁을 세우고 1711년 종묘의 신위를 모실 좌전左殿, 사직단을 옮길 우실右室 건립한다.

1894년 산성 승번제도 폐지.

1907년 일본이 남한산성 완전 소각.

1986년 개원사 중건.

2018년 까지 3천억 투입 남한산성 완전 복원예정.

左翼門좌익문
右翼門우익문
至和門지화문
戰勝門전승문

동문은 국왕은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므로 동쪽이 왼쪽이 되기 때문에 현판은 左翼門좌익문.

서문은 右翼門우익문으로 인조가 이 문으로 나가 당태종에게 항복했던 치욕의 문.

남문은 화합을 통해 지극함에 도달한다는 至和門지화문. 

북문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 戰勝門전승문.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

사적 제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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