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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Feb 16. 2016

육지것의 제주인문이야기 Prequel

서글픈 유배길 제주, 변화되어가는 섬 나라

과거 죄인을 유배 보낼 때는 죄의 경중에 따라 2000리, 2500리, 3000리 밖으로 적소를 정했다고 한다. 

제주는 3000리 밖, 한바다 가운데 떠있는 섬이라 과거엔 가장 중죄인들이 유배를 오는 곳이었다.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면암 최익현 등 수많은 선비들이 제주 땅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제주는 고려시대 때부터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비단 국내 유배인들의 안치지역만은 아니었다.

1275년(충렬왕 원년) 원은 도적 백 여명을 제주로 유배시키고 

1277년(충렬왕 3년) 원은 죄인 33명을 이곳에 유배시키고 이어 40명을 더 보냈다. 

당시 탐라는 큰 기근으로 굶주려 죽는 이가 많았는데 유배인들 때문에 더욱 곤란해졌다 한다.

1317년(충숙왕 4년)에는 원 황실의 위왕이 탐라로 유배되었다가 서해의 대청도로 옮겨졌다.  

명이 원을 몰아내고 중원을 평정한 후 끝까지 반항하던 운남 양왕의 가족 백백태자와 그 아들 육십노 및 가족들을 제주에 안치하였다.  

고려를 복원시킨 원은 삼별초 정벌 직후 제주를 그들의 직할지로 삼아 몇 차례에 걸쳐 도적과 죄인 물론이고 왕족과 관리 승려까지 유배시켰다. 

그 후 제주가 본격적인 유배지로 이용된 것은 조선시대 들어서였다. 

조선시대 5백년 동안 2백여 명이 유배를 왔는데, 왕족과 외척, 문무양반, 학자 등은 물론 도적과 국경을 넘다 잡힌 범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유배인들이 있었다. 

당시 유배인들이 서울을 출발해 제주도에 오는 기간은 보통 20여일에서 두 달 정도 걸렸다.

이들 유배인들은 전라남도 해남, 강진 등에서 출발해 제주시 화북포구 또는 조천포구를 통해 제주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유배인으로는 제주 오현으로 추앙받고 있는 충암 김정, 우암  송시열, 동계 정온 등이 있다. 

이는 유배인이 제주 지식인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에 유배된 인물 중에는 신임과 같이 84세의 고령자가 유배되었는가하면 소현세자의 3남인 석견은 4세로 최연소로 유배되었는데 추자에 유배된 황경한이 만 1세로 최연소 유배인이다.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끌며 큰 역할을 했으며 임금에 오른 뒤 실리외교를 폈던 조선조 제 15대 임금 광해군은 제주에 유배왔던 유일한 임금이다. 

비운의 임금 광해군은 제주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조선 후기에 제주도로 유배왔던 사람들 중에는 과거에서 부정이 적발된 경우도 있었으나, 국왕의 노여움을 사거나 당쟁에 의해 희생된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정치인이 많았다. 


피말리는 정쟁을 하지 않고 아예 격리시킬 곳으로 머나먼 섬, 제주로 유배를 보낸 것으로 오죽했으면 현재까지도 제주 사투리로 투덜대거나 불평이 많은 사람을 말릴 때 쓰는 말로 '붕당붕당 하지 말라' 했겠는가.  

또한 유배인들은 제주의 성씨를 다채롭게 했다. 


경주이씨 국당공파 제주입도조 이익, 김해김씨 사군파 입도조 김응주, 김해김씨 좌정승공파 입도조 김만희, 청주한씨 입도조 한천, 고부이씨 입도조 이세번 등 유배인들은 제주에서 현지 여인과 가정을 이뤄 자손을 낳거나 유배 올 때 같이 온 가족이 제주에 정착했다. 현 제주 거주자 중 5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이와 함께 인목왕후의 어머니 노씨부인, 천주교도였던 정남주, 승려 보우 등이 제주를 찾았다. 

제주 목사를 역임하기도 했던 정헌 조정철은 제주 여인 홍윤애와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견되는 비운의 사랑을 남겼고, 한말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던 운양 김윤식은 제주에 유배와 유배일기 '속음청사'를 남겨 19세기 말 격동기의 제주사회를 생생히 기록했다.  


개화 사상가로 신성여학교 개교를 도왔던 박영효, 한말 항일운동을 폈던 최익현, 민족교육에 앞장섰던 이승훈도 유형의 땅 - 제주를 거쳤다. 


유배인이 제주도에 도착하면 일단 제주목에 인계되며 여기서 다시 제주목이나 대정현, 정의현 등 지정된 고을로 분산시킨다.

왕족이나 고관현직에 있었던 사람은 주로 제주성 내에 안치되었다. 

이렇듯 조선조 약 500년을 통하여 숱한 인사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사화와 당쟁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기회가 오면 사태가 반전되어 다시 등용될 수 있다는 의식이 작용하여 본인이나 수용자인 제주도민의 입장에서도 죄인으로 소홀히 여길 수 없는, 무게가 실린 과객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하였다. 

이 가운데서도 많은 시문을 남겼거나 교육을 통해 제자를 양성하는 등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많다. 따라서 이들이 제주도에 미친 영향도 대단하였던 것이다. 

학문과 지덕을 겸비한 정치가 학자들이 이곳에 많이 유배됨으로써 지방인 자제들이 그들에게 사사하여 그들의 학문과 사상을 전수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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