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 乇羅탁라 그 일곱번째 장소, 冲菴金淨 충암김정 적거터
충암 김정 적거 터와 판서정 터
농협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다리 있는 곳까지 쭉 내려오면 다리 한켠에 오현의 한사람으로 추앙받는 조선 중종시대의 학자 김정 선생의 적거터가 있다.
沖菴 충암 김정(1486~1520)
본관 경주. 호 沖菴충암(겸허한 암자)
10세에 사서四書 통달. 19살 사마시 합격.
1507년 식년문과 장원 급제하여 成均館典籍성균관전적에 보임되고, 修撰수찬, 兵曹佐郞병조좌랑을 거쳐 正言정언으로 옮겨졌다.
이어 兵曹正郞병조정랑, 副校理부교리, 獻納헌납, 校理교리, 吏曹正郞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1515년 당시 순창군수 충암은 11대 왕 중종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愼氏신씨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追罪추죄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1516년 사면되어 홍문관에 들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다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조광조를 위시한 거센 사림의 진행에 훈구의 반격이 시작된다.
뒷동산의 나뭇잎에 새겨진 「走肖爲王 주초위왕」 (‘走, 肖’ 2자를 합치면 조趙)趙조씨가 왕이 된다.
기묘사화.
사림의 영수 조광조는 능주로, 2인자 김정은 금산으로 유배된다.
1520년 진도 이배.
1520년 8월 다시 제주로 이배. 귀양은 시간이 갈수록 더 세 지는 법이다.
1521년 10월 사약 도착하고 이제 36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임시로 안치하였다가 1522년 충주 탑산사로 유해를 모셨다.
1545년 사면되고 1748년 영의정 추증된다.
1578년 판관 조인준이 가락천 동쪽에 충암묘 조성하고
1665년 판관 최진남이 이 묘를 지금의 제주시 이동1동으로 이장한다.
1682년 橘林귤림(귤나무숲의 선비들)서원이라는 현판 하사받는다.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 선생 등 네 분의 위패를 모셨다.
1695년 송시열 선생도 함께 모시면서 5현을 배향하게 되었으나, 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고 그 터에 오현단 설치된다.
저서로는 ≪충암집≫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제주풍토록>은 그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이다.
판서정은 충암 김정이 파놓은 우물 터이다.
1520년(중종 15년) 8월에 제주에 유배된 충암은 사람들이 빗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이 내팟골에 우물을 파고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형조판서를 지냈으므로 이 우물을 판서정이라 부르고 그의 공덕을 기렸다.
이 판서정은 1940년대 후반에 이르러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