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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Jan 05. 2020

일반인문 CXXIII Il principe군주론다시읽기

; Machiavelli, Niccoló 마키아 벨리를 보는 시각.

연말에 만난 청년과의 대화에서 지금 읽고 있는 책이 군주론이라고 해 몇마디 나눴다.

그래 다시 한번 빠르게 읽어내려가며 잠시 사유한다.


마키아벨리는 역사적인 업적을 남긴 위인이라 해야할지, 악인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천재나 광인 어느쪽으로 생각해야 할 지 분류하기가 애매한 인물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이름과 저서가 21세기인 지금까지 회자되며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는 화제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저녁이 되어 나는 집으로 돌아와 서재에 들어가네. 문지방에서 진흙과 먼지로 덮인 평상복을 벗고, 궁정이나 대저택에나 어울리는 예복을 입는다네. 복장을 적절히 갖추고 고대인들로 가득한 고대의 궁정에 입장하네. 

…… 거기서 기탄없이 그들과 얘기를 나누고 그들의 행동을 설명해달라고 부탁하지. 그들은 친절하게도 대답해주더군. 

…… 나는 이 대화에서 배운 바를 ‘군주론’에 썼네.

-마키아벨리

Machiavelli, Niccoló

마키아벨리는, 시간을 내어 들어주기만 하면 망자들이 미래 세대에 해줄 말이 많다고 확신해서 그가 군주론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는 유령들을 만난다고 말했다.

이제 마키아벨리는 그가 이야기 한 유령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그가 유령들과 어울렸듯이 우리도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하고, 그가 망자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듯이, 우리도 그가 속삭이는 지혜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권좌를 지키고 싶어 하는 군주는 어쩔 수 없이 종종 악인이 되어야 한다.”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군주는 선하지 않게 처신하는 요령을 배워야 한다.”


나폴레옹부터 히틀러까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독재자들의 필독서이자 애독서로 꼽혔다는 군주론은 폭력적인 전제정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수단을 제공했다며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

반대로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이들은 다소 냉정하긴 해도 충분히 현실적이며 도덕만 찾다가 국정을 그르치는 군주들보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군주가 성군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힘을 갖는것은 군주론을 읽어보면 마키아벨리가 군주의 덕목으로 권모술수만을 내세우는 것은 절대 아니고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받는 군주가 되라고 말하면서도 민심이 등을 돌리는 순간 군주의 권력과 목숨도 끝장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되 백성들의 재산을 노리지 말고 적절한 명분 없이 벌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사리사욕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이득을 탐내는 관료가 눈에 띈다면 당신은 아마 그런 자를 결코 훌륭한 관료가 아니라고 확신할 것이고, 절대로 그 자를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리 「Il principe 군주론」, 한비 「韓非子 한비자」, 오정 「貞觀政要 정관정요」, 조유 「반경」등 패도覇道를 표방한 제왕학관련서적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읽어야할 책임에는 틀림없다.

韓非子 한비자, 貞觀政要 정관정요, 반경

유의할것은 그 책을 쓰게된 배경을 함께 보아야 내용이 좀 더 작가의 의도대로 읽혀진다.


마키아벨리는 야망과 능력에 비해 너무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대단한 가문이나 배경을 타고나지 못했던 그가 신분에 비해 중요한 자리에 임명되고 유럽을 움직이는 인물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정치와 외교 수완을 배울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혼란한 시대적 배경이었다. 

그가 살던 15~16세기 이탈리아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크고 작은 독립국가들이 패권을 다투는 난세를 지나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의 혼란이라는 조건은 마키아벨리에게 엄청난 기회와 위기를 번갈아 가져다주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정권 교체와 숙청의 피바람 속에서 관료직에 대거 공석이 생긴 인생 초반부에는 이 난세가 위기보다 기회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1498년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정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며 쌓은 경험은 그의 정치철학적 토대가 되고 이는 훗날 서양사상사에서도 전환점이 되도 한다.

평범하게 살아온 이때까지의 인생을 감안할 때, 그가 관료로서의 책임이 따르는 직책에 임명된 것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대평의회 Consiglio Maggiore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하한선에 해당하는 29세의 나이에, 지배권력 집단 내부에서의 입지가 미미한 집안 출신의 그 이름 없고 경험이 일천한 청년이 피렌체 정부에서 제일 중요한 비선출직 중 하나를 맡게 되었다. 

아직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의 부하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1498년 초반 마키아벨리는 시뇨리아 signoria 제1비서관 자리에 지원했으나  종교적 광신자들의 눈밖에 나 있었기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사보나롤라가 체포된 뒤 정부가 프라테스키frateschi(형제파)를 핵심부에서 제거하는 숙청과정에서  전임 제2서기장 알레산드로 브라체시Bracceschi가 파직되자 마키아벨리는 두번째만에 브라체시의 남은 임기 2년을 채우는 기회를 얻게된것이었다.


운 좋게 공직에 오른 마키아벨리는 이후 일시적인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외교 사절단으로 임명되어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이웃 강대국 왕실에 파견되기도 하고 피렌체 공화국의 곤팔로니에레gonfaloniere 가문의  최고 지도자인 피에로 소데리니 Piero Soderini 의 신임을 받는 군사전략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만약, 물 만난 고기처럼 엄청난 활약을 보이던 이 시절이 지속되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군주론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련의 시작은 서서히 그 색을 드러낸다.


덕망은 높았지만 영민하거나 약삭빠르지 못했던 소데리니는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정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표류하다가 마침내 실각하고 만다.

처음에는 그를 존경하던 마키아벨리도 마지막에는 그의 정치적 무능력을 깨닫고 등을 돌리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스페인의 군사력을 등에 업은 메디치 가문이 권력을 잡으면서 소데리니는 망명길에 오르고 마키아벨리는 기댈 곳 하나 없는 신세로 피렌체에 남겨진다.

당시에 그가 남긴 기록이나 지인들에게 썼던 편지를 보면 군주론의 저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순진하고 희망적인 태도가 엿보인다.

하지만 이후 몇 달에 걸쳐 엄청난 위기와 시련을 겪는 동안 그는 순진한 착각에서 벗어나 점점 냉소적인 세계관에 빠져들게 된다.


“이처럼 가혹한 운명을 마주한 나를 보고 기뻐하기 바라네.

내가 이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견뎌냈기 때문이야.

나 스스로를 이처럼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한 적이 없었다네.”

‐ 마키아벨리가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보낸 1513년 3월 18일자 편지


마키아벨리에게 처벌이 추가되었는데 signoria 시뇨리아는 그의 이동 범위를 피렌체가 관장하는 영토 내로 제한한다는 명령을 내렸고, 명령 이행을 서약하는 의미로 1천 리라의 보증금을 내도록 요구했다. 

그러고도 아직 처벌이 미흡하다고 판단했는지 1년간 시뇨리아 정청 출입을 금지했다.


마키아벨리는 분노와 실망감을 품은 채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16km쯤 떨어진, 올리브 과수원과 포도밭에 둘러싸인 시골집으로 향했다

그 시골의 은거지에 들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간혹 그곳을 찾아온 손님들 조차 좀처럼 반가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그는 과거의 정권에서 가장 이득을 본 부류에 속해서 새로운 정권은 그를 체포하여 여러 해 동안 사랑하는 공화국을 위해 일했던 건물과 불과 몇 골목 떨어진 음습한 Le stinche prison레 스틴케 감옥에 끌려가 어둡고 벌레가 득실거리는 독방에 가두었다.

Le stinche prison레 스틴케 감옥

22일간 총 여섯 차례의 고문을 거치며 버텨낸 그는 구사일생으로 풀려나는데, 사형의 문턱에 있었던 정치범이 운 좋게 자유를 얻은 것은  그가 지은 시도 아니고 그를 위해 탄원한 친구들도 아니고 앞서 일어난 모든 행운 혹은 불행과 마찬가지로 급변하는 이탈리아와 유럽의 정세 덕분이었다.


마키아벨리가 Le stinche prison 레 스틴케 감옥의 독방에 갇혀 있던 시각, 일흔 살의 전사 교황, Julius 율리오가 갑자기 말라리아에 걸리더니, 며칠 뒤인 1513년 2월 20일에 선종하는 유럽의 정치·군사적 지형을 바꾸는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5일 뒤, 치밀한 흥정 끝에 서른여덟 살의 Giovanni de' Medici 조반니 데 메디치가 교황 레오 10세가 되었고 그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피렌체에서는 상점은 문을 닫았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광란의 축제가 벌어졌다.  

자신감이 차 마음이 너그러워진 신임 교황의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죄수들의 대규모 사면을 실시했고 그중에는 마키아벨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Giovanni de' Medici 조반니 데 메디치, Giuliano de Medici 줄리아노

이토록 무시무시한 고초를 겪은 후에도 그의 마음 속에는 정치적 야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을 그처럼 푸대접한 도시를 외면하고 정치를 포기했다면 마키아벨리는 장기간의 휴식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고, 말년이 한층 평안했을 것이지만 그에게 안일한 삶은 맞지 않는 옷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처지에서, 점점 악화되는 재정 상태를 호전시키고 자존심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공직으로 복귀할 방도를 찾는 것이었다.

첫 번째 단계는 Medici 메디치 가문과의 화해, 특히 형의 대리인으로서 피렌체를 사실상 지배하는 Giuliano de Medici 줄리아노와의 화해였다. 

그러기 위해 큰 인상이 남을 선물이 필요 했기에 관료로서 터득한 모든 지식과 교훈의 정수를 담아 바칠 소책자의 집필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그의 머릿속에서 형태를 잡아가기 시작한 작품이 바로 ‘군주론’이었다.


그렇게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군주론은 탄생했다

이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의 공직생활은 이미 끝장나버린 상태였고, 봉급이 끊겨 자칫 치욕스러운 가난에 허덕일 지경이었기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 혼자 서재에서 역사의 유령에 둘러싸인 채, 영원한 진리를 숙고하는 동안 그는 당장의 불행을 잊을 수 있었다.


“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내용을 쓰고자 하기 때문에 꿈속에 머무는 것보다 사물의 실체적 진실에 곧장 다가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윤리적인 시각과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의 혼란 상태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군주론은 창의성이 꽃피고 이리저리 요동치는 르네상스 시대의 가치 기준과 병리현상의 산물이었다

16세기 초반의 이탈리아에서는 숱한 권력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졌다. 

승리를 거둔 군대는 금세 패배를 맛봤고, 외부 세력의 공격과 내부적 반목에 시달리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정부가 무너지고, 적군이 마을을 불태우고, 농토를 황무지로 만들어버리고, 강간과 살인을 자행하는 상황에서 이상적 국가에 대해 차분하게 숙고한다는 것은 사치로 보였다.

Thomas d’Aquino 아퀴나스, Desiderius Erasmus 에라스무스

비교적 예측 가능한 길에 익숙한 Thomas d’Aquino 아퀴나스와 Desiderius Erasmus 에라스무스가 볼 때 통치자에게 중요한 것은 미덕이다. 

그들은 통치자가 고결한 자의 길을 따를지, 아니면 참주의 길을 따를지에 관심을 쏟았다.

전통적 군주들의 거울은 통치자가 지배층 내부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확고하다고 가정하는 반면 군주론은 기본적으로 통치자의 지위와 심지어 그의 삶도 늘 위태롭다고 가정하고 실제적인 충고를 던진다.


“(새로운 영토를) 차지한, 또 앞으로 그것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자는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첫째는 전임 통치자의 유서 깊은 혈통을 끊는 것이고, 둘째는 법과 조세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통치자의 첫 번째 임무는 통치하는 것이고, 설령 윤리규범에 위배 될지라도 그 임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는 공정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누구나 성자도 되고 왕도 될 수는 있지만 성자인 동시에 왕이 될 수는 없다고 암시한다. 

성자와 왕 사이의 절충점을 찾는 태도도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마키아벨리가 볼 때 그것은 피렌체 정부가 너무나 자주 기도한 줏대 없는 전술이었다.


“악행뿐 아니라 선행도 증오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말했다시피, 권좌를 지키고 싶어 하는 군주는 어쩔 수 없이 종종 악인이 되어야 할 때도 있다.”


“다들 알다시피 군주가 약속을 지키고 속임수를 부리지 않고 청렴하게 행동하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다시피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군주들은 신의를 별로 중시하지 않는 자들, 그리고 영리하게도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 자들이다. 요컨대 그런 군주들은 충성에만 기대는 군주들을 물리쳤다.”


“인간의 현실적 생활방식과 당위적 생활방식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당위를 위해 현실을 포기하는 사람은 곧 안정적인 삶에서 벗어나 신세를 그르칠 것이다. 늘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아 틀림없이 파멸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군주는 선하지 않게 처신하는 요령을 배우고, 필요에 따라 이 기술을 구사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직접 목숨을 걸고 얻어낸 교훈을 가득 담아 ‘군주론’을 집필했고 계획대로 Lorenzo di Piero de' Medici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상했지만 안타깝게도 로렌초는 지도자로서 줄리아노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는 인물이었고 ‘군주론’에 큰 관심을 보이지도 않다가 얼마 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키아벨리 또한 공직을 되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몇 년 뒤 사망합니다. 


이렇다 할 재산이나 업적도 없는 사람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장례식은 매우 조촐하게 진행되었지만 그가 남긴 책은 그의 사후 3년 뒤 정식 출간되고 그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교황청의 금서로 지정되는 등 온갖 사건에 휘말리다가 비교적 근대에 이르러서야 고전 명작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군주론을 정치학으로 최고라고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후학들은 많지 않지만, 그가 근대 정치사상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하기는 어렵다. 

근대 정치학은 주로 마키아벨리에 대한 반응으로 발전해왔다고 볼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담론의 역사를 통해 전해내려 오는 특정한 줄기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Real politik 현실정치나 국가이성 같은 용어, 그리고 인간의 욕구를 억압하는 강력한 처방을 옹호하고 인간성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론들은 마키아벨리의 저작에서 시작된 것으로, 특히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성에 대한 그의 비관적 시각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난 ‘군주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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