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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28. 2021

건축가의 역사 읽기 I 희미한 상고사 대고구려 하나

; 대고구려 속으로…

지난 2013년, 예능 프로그램 ‘느낌표-위대한 유산 74434’에서 고구려지도를 나누어준 일이 있습니다.

7,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분들이 국사교과서에서 보던 고구려의 땅과, 2000년대의 역사교과서의 그것, 그리고 지금 2020년대의 역사 교과서에서 보듯 고구려 영토의 면적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료들과 현장에서 출토되는 유물들로 일제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해 가려진 사실에의해 공인되고 있기때문입니다.

'고구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광개토대왕, 그리고 그가 이룩한 거대한 고구려의 영토일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은 19세에 왕위에 올라 39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20여년 동안 끊임없이 주변 민족을 정복해 나간 정복군주였습니다. 

그의 거침없는 정복활동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아주 거대했다' 고 하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정작 그 영토가 어디까지였는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영토를 알려 주는 기록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고구려의 영토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을 그 동안 우리가 마음 놓고 답사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커다란 이유일 것입니다. 


당시(4세기 후반~5세기 초반) 고구려 서쪽은 후연과 거란이, 북쪽은 부여가 접하고 있었습니다.

부여는 패망직전의 상황이라 복속하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후연과 거란은 고구려가 대륙 중심으로 뻗어가려면 넘어야할 나라들입니다.

특히 후연과의 악연은 광개토왕의 몇대 위로부터 이어진것이라 단순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고구려는 모용황이 세운 전연의 침공을 받아 미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수레에 실려 전연으로 갔으며 미천왕의 왕후였던 태후 주씨를 포함해 왕족, 백성 포로 등 5만명이 잡혀가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전연이 멸망후 후연이 들어서자 고구려의 고국양왕이 요동과 현도를 공격해 승리하나 싶더니 다시 뺏기고 광개토왕때에도 고구려가 백제, 가야, 왜에 신경쓰는동안 신성과 남소성을 털어버리는 등 악연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전연으로부터 이어진 후연은 실제로 하북과 산동, 요서, 요동일부 지방을 모두 움켜쥔 강대국이었습니다.

이러한 강력했던 주변국과의 전쟁을 하려면 그만큼 강력한 군대가 필요로 했을것입니다.


동아시아 최강군, 철갑기병


철갑기병에 관한 기록은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삼국사기는 동천왕때에 이미 철갑기병을 보유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짐작할수 없었던 그 모습을 안악3호 대행렬도를 통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1949년 평양에서 120km 떨어진 황해도 안악군 류설리에서 발굴된 안악 3호분의 높이 2m, 길이 6m의 대행렬도 벽화에는 250여명에 이르는 가장 많은 무사들이 등장합니다.

이 곳에 말을 탄 기병중엔 온 몸을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가 있는데 병사가 탄 말 역시 갑옷으로 무장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갑옷의 형태가 특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찰갑'이라고 수십개의 조각을 이어붙여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대행렬도를 보면 이 철갑기병의 수는 모두 8명으로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벽화만 보면 철갑기병이 전체 고구려군대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였는지 잘 알 수가 없어서 철갑기병이 등장하는 또다른 유적을 알아봐야 합니다.

1998년 고구려 군이 주둔했던 곳으로 무기와 무장상태를  알려주는 유물이 다량 발굴된 서울 아차산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중 투구는 단 하나인데 가장 우수하다는 가야의 판갑이었습니다.

고구려의 찰갑은 백여개의 철편을 3분의 1씩 겹쳐지게 가죽끈으로 이어 만든 찰갑은 판갑에 비해 가볍고 튼튼해 한마디로 찰갑이 한단계 앞서는 우수한 갑옷인 것입니다.

당시 고구려가 철 제련기술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벽화속에도 남아있습니다. 

압록강 부근 집안지역에서 발굴된 오회분4호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제철신이 그것으로 쇠를 부젓가락으로 집어 모루위에 올려놓고 마치로 두드리는 제철신의 모습이 벽화 천장에 그려져있습니다.

현재 고구려 유적은 출토된 것이 없기 때문에 가야유적을 통해 말 갑옷의 형태를 확인해보면, 현재까지 발굴된 말갑옷중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는 함안 가야유적 갑옷은 분명 찰갑입니다. 

판갑이 대부분이었던 가야지역에서 발견된 말의 찰갑과 고구려 벽화속의 말 갑옷형태를 비교해보면 말 얼굴 가리개, 말갑옷의 형태가 거의 동일합니다. 

5세기 가야의 유적이 4세기 중엽 안악3호분의 벽화와 완벽하게 닮아 있는것은 광개토대왕의 5만 대군이 가야지역에 내려와 전투를 벌인 직후입니다. 

지난 1995년 북한은 강원도의 철령지역에서 말의 무장에 관한 중요한 발굴에 성공했는데 땅속에서 흙으로 만든 수십개의 말 인형은 몸통과 얼굴에 갑옷을 두른 무장한 말 인형들이었습니다. 

3,4세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이 발굴로 고구려는 가야보다 최소한 백여년 앞서 말에도 무장시켰음이 확인되었듯 완벽한 무장을 갖춘 말과 병사는 그 존재만으로도 적을 위협하기에 충분해 이것의 영향을 받아 가야에도 만들어졌던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면 병사와 말이 온통 철갑으로 두른 이런 상태에서 과연 적과 제대로 싸울 수 있었을까요. 

이 의문은 삼실총 공성도 벽화가 해결해줍니다. 

벽화에 의하면 철갑기병의 몸놀림이 매우 유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정도라면 실전에서도 큰 몫을 맡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철갑기병의 무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철갑기병은 우선 자기 키의 2배나 되는 긴 창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삼실총 벽화는 못신을 소개합니다. 

말을 탄 철갑기병과 말에서 내린 2명의 병사 모두 못신을 신고 있습니다. 

달려드는 적군을 말 위에서 내려칠 때 사용하는 무기였던것입니다. 

신라와 백제에서 이 못신을 왕의 부장품으로 남겼다는 사실은 당시 못신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케 합니다.

덕흥리 고분을 보면 고분의 행렬은 안학3호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빈약한 모습인데도 유독 철갑기병만큼은 크게 그렸고, 행렬을 사방에서 호위하고 있으며 그 수도 11명이나 됩니다. 

참가인원이 적은 것이 비하면 아주 많은 수로 벽화가 그려지던 때, 철갑기병이 무척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 시기는 408년으로 광개토대왕이 최대의 국토를 차지 했을 무렵입니다.

환도라는 내려찍기 좋은 칼을 지닌 환도수, 기병들의 주무기였던 창을 든 창수, 도끼를 든 부월수가 기병과 함께 싸웠고 가장 중요한 궁수의 그림에서 활이 풀려져 있습니다.

가장 탄력이 좋은 물소뿔로 활을 만들고 화살촉은 오늘날 사용하는 특수강와 맞먹는 강도였습니다.

(복원해서 그 강도를 1990년대 KBS에서 실험을 했었습니다)

최신무기를 보유한 뒤에 남는 문제는 전술.


삼실총 공성전 벽화에서 전투중에 보병과 기병의 역할이 나눠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평원전의 경우, 공격부대의 맨 앞줄은 완전무장한 철갑기병이 맡고 그 뒤를 검수와 부월수보다 긴 창을 들고 있기 때문에 기동력이 있으면서 가볍에 무장한 경마기병이 서고, 다음은 창수들이 포진합니다. 

그뒤를 칼을 든 검수와 부월수가 따르고  공격부대의 맨 뒤에는 가장멀리 나가는 무기인 활을 쓰는 궁수들이 배치됩니다.

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전투는 이와 양상이 달라집니다. 

고구려는 성의 나라죠.

당시 중국의 성이 대부분 한 줄로 늘어선 일자형인데 반해 고구려의 성들은 촘촘히 여러 겹으로 세워져있습니다. 

특히 교전이 끊이지 않았던 요동지방의 경우 육지방어선과 비사성을 중심으로 한 해안 방어선을 같이 구축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성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합니다.


광개토대왕의 주력부대로 자리잡은 철갑기병을 발판으로 고구려 대제국 건설은 완성되어갔습니다.

행렬도속엔 '어떻게 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라는 고구려 사람들의 그 처절한 고민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말에 갑옷을 입히고 세계 최초로 기병들에게 못신까지 신겨야겠다고 고안해낸 사람들. 

무기별로 편제된 보병을 통해 다양한 전술을 구사해낸 것이 고구려입니다. 

이 군사력이 5세기 초 광개토대왕의 대원정을 가능케 했습니다. 

고대국가에서 그 나라가 강대국이냐 약소국이냐를 가르는 기준은 바로 이 군사력입니다. 

따라서 온 나라의 기술과 자원을 총동원해 무기를 만들고, 병사들을 무장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군사력을 키우기 위한 이런 노력은 결국 나라 전체로 보면 기술과 자원개발을 서두르게 하는 힘이 되고 막강한 군사력이 경제력을 키우는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고구려 역시 그런 과정을 밟았습니다. 

고구려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국을 통합하고 고구려적 전통와 세계관으로 융화시켜 나갑니다. 

그 결과 동아시아 일대에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대제국 고구려는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고구려 고분 벽화가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구려(광개토태왕)가 만든 평화시대-Pax Koreana


고구려 서쪽영역을 알려 주는 열쇠는 비려 또는 패려라고도 하는 거란족 정벌입니다.

거란 정벌에 나선 것은 395년. 

광개토왕비문은 부산부산을 지나 염수가에 있는 세 부락과 6-700명을 부수고 셀 수없이 많은 말과 양을 얻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비려가 어디인지 알 수 있는 단서는 우마군양 6-700개의 영, 염수, 그리고 부산부산. 

이중에서 가장 확실한 단서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는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염수 즉 소금강일 것입니다. 

당시 유목민족인 거란족이 살고 있는 지역은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내몽골에 이르는 초원지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만주벌판을 달리다 보면 큰강이 가로 막는데 요하입니다. (중류는 생각보다 강폭이 그리 넓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중국학계는 고구려의 영토를 이 요하 동쪽지역으로 한정시켜 왔습니다. 

중국의 사서인 ‘자치통감’에는 요하 서쪽에 고구려성 무려라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 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덧붙였는데, 고구려가 요수 서쪽에 무려라성을 두어 요수를 건너는 자들을 감독했다는 것입니다. 

야율아보기가 중원을 통일하고 요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그 비결 속에 바로 염수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요나라 사서에는 '요나라 태조는 강에서 소금을 취해 군에게 지급하도록 명령했다. 강 상중류에는 소금이 많아 모든이가 쓰기에 충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거란족이 소금을 얻은 강, 그곳이 바로 광개토대왕의 정복지인 염수일 것입니다.

시라무렌강 북쪽의 초원지역 천연호수에서 소금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집하장있었습니다. 

20m 깊이의 이 호수를 모두 소금으로 만들면 무려 3천 톤에 이른다고 합니다. 

거란이 장악한 소금산지는 바로 이런 곳이었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소금이 나는 강과 호수를 광개토대왕은 염수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결국 광개토대왕이 6,000km 길을 달려가 거란 족을 정벌한 곳은 염수 즉 시라무렌강 중상류지역 인근에 있는 초원지대였습니다. 

광개토대왕이 이곳을 정벌한 것이 단순히 거란족이 고구려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이나 또는 말을 얻기 위해서는 아니라 후연때문이었습니다.


후연은 멸망할 때 모용 선비 끝장의 정점을 찍어서 이미지가 나쁘지만 실제로 하북과 산동, 요서, 요동일부 지방을 모두 움켜쥔 강대국이었습니다. 

그저 북위에게 하북을 잃어 그 사이에 모용덕이 남연을 건국해 산동이 떨어져 나가고, 황제도 암살당하고 요동을 뺏기며 급격하게 무너졌을 뿐 화북 통일 유력 후보 중 하나였습니다.

더군다나 고구려와는 악연이 깊게 박혀 있습니다.

모용선비로 보면 무려 모용외 ~ 모용희까지 4대 9명, 고구려로 보면 미천왕 ~ 광개토대왕까지 4대 5왕에 걸친 악연.

고국원왕 대에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세운 전연의 침공을 받았고 모용황은 군대를 직접 이끌고 쳐들어와 국내성을 함락시키고  미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을 수레에 실어갔으며 미천왕의 왕후였던 태후 주씨를 포함해 왕족, 백성 포로 등 5만명이 잡혀가는 굴욕의 세월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옛 전연이 있던 땅에 모용선비족의 후연이 들어서자 2차전이 시작, 처음에는 고구려의 고국양왕이 요동과 현도를 공격해 승리하나 싶더니 그 해 모용농에게 다시 뺏깁니다.

후대인 광개토대왕 때에도 광개토대왕이 백제, 가야, 왜에 신경쓰는동안 신성과 남소성을 털어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던 후연을 침몰시키기위해 광개토왕은 우선 내편을 만든 거란이 후연의 측면을 공격하게 만드는 거란을 이용하는 전술을 사용합니다.

거란과의 전쟁, 그리고 후연의 괘멸을 위해 필요한 강력한 군대는 철갑기병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연의 붕괴로 얻어지는것은 단순한 자존심이 아니었습니다.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0城 力城 北豊 王備유 遊觀土境 田獵而還

광개토대왕은 양평도를 지나 0성. 역성, 북풍, 오비해로 와서 고구려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고구려로 돌아왔다.

-광개토태왕비


거란정벌을 마친 광개토왕은 멀리 돌아온것은 이후 후연을 공격하기위한 사전 무력시위였던것입니다.

고구려가 본격적인 후연공략에 나선 것은 402년 숙군성 전투. 

고구려군은 요하를 건너 대릉하 북쪽의 당시 후연의 수도였던 조양을 공격했고 지방관은 성을 버리고 달아 났습니다.

격후 고구려는 전혀 의외의 작전을 펼치는데 404년 연군을 공격하여 백명을 죽이는데 연군은 현재의 북경지역으로 고구려는 5대 모본왕 대에 이미 북경인근 지역인 어양을 공격한 경험이 있습니다.

숙군성을 공격한 고구려군은 후연의 주력부대가 도성주위로 몰려들자, 이번엔 거란족을 이용해 연군을 공격합니다.

이듬해인 407년에 고구려는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는데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적을 모두 죽이니, 그 승리로 얻은 갑옷이 1만여벌이나 되고 군수품과 장비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라고 비문은 적고 있습니다.

후연의 전 지역에 걸쳐 고구려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을 때 후연의 수도 용성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추대됩니다.


馮跋殺慕容熙高雲僭卽帝位

풍발이 모용희를 죽이고 고운이 왕이 됐다

-晉書 卷10 安帝篇 진서 10권 안제편


고운의 할아버지는 후연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끌려간 인질 중의 한사람인 고운은 바로 고구려사람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거란 정벌을 위해 염수에 갔던 그 비밀은 바로 여기에 숨겨져 있습니다.

덕흥리 고분은 유주(북경인근)자사 진의 묘로 진이 영락 18년 즉 광개토대왕시기인 408년에 세상을 떠났고 소대형이라는 고구려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에 고구려의 유주자사를 지냈다고 적고 있습니다.

무덤의 한쪽 벽면에는 주인공의 생전에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 벽화에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13명의 태수가 진을 찾아와 인사를 올리는 모습이 보이는데 고구려가 이곳에 진을 파견한 것은 후연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시점으로 추정됩니다. 

고운의 정권은 용성일대만을 다스리는 외소한 정권에 불과하여 지방은 무정부상태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완전히 힘의 공백상태인 이때를 이용해서 고구려는 유주 자사진을 보내서 행동하게 했습니다.

유주자사 진은 후연의 혼란기에 아주 짧은 기간동안 설치된 일종의 임시군정책임자라고  볼 수 있는데 13태수가 유주자사를 만나러 온 목적이 각기 다른 것도 그가 아주 짧은 기간 이 지역을 통치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10여년에 걸린 고구려의 후연 공격은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쿠데타가 일어난 이듬해인 408년 봄 3월, 광개토대왕은 북연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의 정의를 나누는데 후연을 무너뜨리고 그 땅에 고구려의 속국을 세운 것입니다.


그 당시에 고구려는 중국에 대등하다고 하는 중국에 대응하는 동방에 패자다고 하는 그런 의식이 있었습니다. 

주변세를 정복할때도 중국의 천자나 마찬가지고 주변국가를 신하국으로 만들고 바로 조공지배를 하는 원칙, 그 나라는 멸망시킨 것이 아니고 동부여, 신라, 가라 이런 나라들을 신하의 국가로 만든것입니다. 

이것이 광개토대왕비에 많이 나오는데 후연도 똑같은 경우로 후연도 신라나 마찬가지로 신하국으로 간접지배하는 것입니다.

광대한 고구려 건설을 위해 요서진출은 광개토대왕의 최대 과제였고 그 과제를 풀기 위해 광개토대왕은 395년 염수지역의 거란족을 정벌하고 그곳을 배후기지로 마침내 후연을 무너뜨리며 요서진출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입니다. 


高句麗竊與  謨 欲取地豆于以分之

479년 고구려는 유목민족인 유연과 함께 지두우 분할을 모의했다.

-魏書 契丹國傳 위서 계단국전(거란국전)


당시 지두우가 있던 곳은 현재의 이 몽골 지역으로 지두우로 가는 길목에는 해발 1700m의 한반도와 거의 비슷할 정도의 대흥 안령 산맥이 가로놓여 있습니다.(한라산이 해발 1950m, 북한산이 m)

거대한 천연장벽.

기록상으로는 분명히  고구려가 지두우를 정벌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대흥안령 산맥 때문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흥안령산맥은 바위, 산, 깍까지는 듯한 절벽이라는 일반적인 산맥이 아니고 1700m에 이르는 정상부분은 마치 거대한 평원처럼 30여km에 걸쳐 계속되고 있습니다.

만일 이런 정도라면 말로 달린다면 빨리 달리 수 있을만큼 아주 평지입니다.

1300년 전 고구려의 기마군단이 이 산맥을 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구려군은 바로 이길을 달려 유목국가인 지두우로 향해 대흥안령을 넘어 중국과 몽골의 국경도시인 이 곳(동우짐치)이 1500년 전 고구려가 진출했던 바로 그 지두우인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광개토대왕을 정복군주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광개토대왕에 대한 아주 단순한 평가에 불과합니다. 

그의 진면목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순서를 보면, 비려공격, 한강유역 공격, 말갈족 공격, 후연공격, 지두우 공격. 

광개토대왕 평생에 걸친 정복전쟁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정복지들입니다. 

이 정복루트를 자세히 살펴보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광개토대왕은 거란족, 유목민족을 정벌한다. 그 곳에서 고구려는 말과 소금 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고구려는 유목민과 다른 지역과의 중계무역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 다음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한강유역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황해를 장악해서 백제나 신라, 일본이 중국과 자유롭게 오가는 것을 막습니다. 

그 결과 고구려는 두 지역간의 막대한 중계무역의 이익을 얻게됩니다. 

그 후 광개토대왕은 동북지역의 말갈족을 정벌합니다. 

이 지역에서 고구려는 짐승가죽이나 뿔 같은 특산물을 얻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주요 수출품이었습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은 후연을 공격하는데 이로써 고구려는 이 지역에 있는 동북아시아 최대의 국제무역시장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장수왕은 지두우를 정벌하고 초원의 길을 확보했던 것입니다. 

이제 단순히 땅을 정복하기 위한 정복루트로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사통팔달의 무역망, 고구려 네트워크인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은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하나씩 점령해서 결국 이런 고구려 네트워크를 구축한것입니다. 

그는 국력을 어떻게 키워 나갈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지배자였고 치밀한 전략가였던 것입니다. 

어떤 세력도 고구려에 도전할 수 없을 만큼 고구려의 힘은 막강했던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했던 고구려는 그 자신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恩澤洽于皇天 威武桭被四海 

왕의 은택은 황천에 이르렀고 무위는 사해에 떨쳤다

; 사해, 이것은 동아시아라는 세계에서 고구려가 중심이라는 고구려인들의 의식을 담고 있다. 고구려인들은 또 당시의 풍요로움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國富民殷 五穀豊熟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거대한 영토와 막강한 군사력 그리고 고구려네트워크로 쌓은 경제력, 이렇듯 광개토대왕이 이룩한 고구려는 편안하고 넉넉했고 그것은 동아시아를 움직이는 고구려의 힘으로 나타나는데 모든 길은 고구려로 통했고 그야말로 평화시대-Pax Koreana가 열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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