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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Mar 13. 2021

건축가의 역사 읽기 I 희미한 상고사 대고구려 둘

; 광개토태왕비, 고구려 비밀의문

지난글에서는 대륙쪽으로 뻗어나간 고구려의 위상에 대하여 알아 봤습니다.

학창시절, 아니 어쩌면 술자리에 삼국이야기가 화두가 된다면 우스갯소리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 했으면 좋았을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반도와 일본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교토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박물관에 채용된 아리미츠 교이치(ありみつきょういち 有光敎一)는 관장에 해당하는 주임으로 4년간 일하다 일제가 패망한 후 홀로 남아 박물관 업무의 인수인계를 담당했습니다. 

임무가 끝난 12월 3일 그에게 새로 부여된 임무는 박물관 한국 직원들에게 고고학 발굴기술을 전수하는 일이었습니다. 

독일에서 중국고고학을 전공한 김재원 박물관장이 미군정에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김 관장에게 과거 경주 근무 시절부터 발굴하고 싶었던 무덤인 경주 노서리 소재 140호분의 발굴을 추천했습니다. 

발굴을 개시한 것은 1946년 5월 3일로 그 소식은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전파됐고 매일 현장을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발굴이 어려울 정도로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발굴 시작 8일째에 그 실체를 파악하게 되는데 무덤에는 금동관 조각과 귀걸이가 주인공의 머리 쪽에 놓여 있었고, 머리맡엔 뚜껑 덮인 청동 호우(그릇)이 1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보통 그릇처럼 보여 별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그릇을 들어내다가 그릇 바닥에 글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의 16자. 

‘을묘년(415년), 3년 전 돌아가신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을 추모해 만든 열 번째 그릇’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무덤 이름이 호우총이 되었는데 이 부분은 조금 이해하기 힘든 작명입니다.)

글자체는 만주 벌판에 우뚝 솟아 그 위용을 자랑하는 광개토대왕릉비와 같았습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신라의 왕릉급고분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게다가 이 글씨는 광개토대왕비의 그것과 거의 같은 것…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써진 호우가 왜 신라에서 발견됐는지 그 수수께끼를 풀만한 실마리는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그 어떤 사료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오직 광개토대왕비문만이 그 단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불과 100여년 전입니다. 

이 비에는 4면 가득 비문이 적혀 있는데 그동안 이 비에 대한 연구는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넜다’*는 신묘년 조항의 해석과 비문조작여부에만 집중돼 왔습니다.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해석의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

일본측: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정인보: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파하였다.


그래서 마치 그것이 광개토대왕비의 전부인 것처럼 비춰졌으나 그것은 광개토대왕비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광개토대왕비는 현전하는 역사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국사기보다도 무려 700년이나 앞섭니다. 

700년전의 아득한 기록을 적은 삼국사기와 달리 광개토대왕의 신하였던 고구려인들이 직접 보고 겪은 일을 기록한 너무나도 소중한 당대의 기록입니다. 

광개토대왕비는 화려했던 광개토대왕 시대를 증언하는 유일한 목격자인 셈일것입니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은 400여년간 고구려의 옛도읍지였던 곳으로, 중고등 학교 과정 중 국사과목에서 나온 바로 그 고구려의 국내성이 있습니다. 

이미 다 허물어지고, 지금은 잡초속에 성벽의 일부만이 남아있을 뿐아니라 국내성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성벽은 눈에 띄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행인지 불행인지 보전에 힘을쓰고 있기는 합니다.

집안은 현재 발견된 것만 해도 12,000여기로 그 자체가 커다란 고구려의 무덤입니다. 

장수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군총을 비롯해서 수많은 무덤이 떼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태왕릉도 그중 하나로 무덤안은 이미 도굴 당해서 유물은 남아있지 않고 오직, 광개토대왕을 가리키는 '태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됐을 뿐입니다. 

고구려 멸망과 함께 그동안 광개토대왕비도 시간속에 묻혀 버렸기 때문에 고구려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광개토대왕비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불과 130여 년 전입니다. 

더구나 청나라때는 집안일대가 봉금지역으로 출입이 금지되면서 광개토대왕비는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되기도 했고 중국에서 호태왕비라고 부르는 광개토대왕비는 관광객들에게 관람만 허용될뿐, 중국정부는 광개토대왕비 촬영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이 비는 비문의 서체가 독특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전부터 중국의 금석학자들 사이에서 탁본으로 잘 알려졌다고 합니다.

동북아 고대사 연구에 가장 중요한 금석문으로 한,중,일 삼국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광개토대왕비. 

이 비는 광개토대왕 사후 오늘날까지 1600년을 이렇게 서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모두 1775글자가 새겨져 그 한자 한자는 1500여년전 광개토대왕과 고구려의 역사를 증언하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그러나 비가 세상에 알려진 후, 비문에 새겨진 '왜'의 문제가 한일간에 논쟁거리로 되면서 광개토대왕비의 일부분만이 부각되었을 뿐,  광개토대왕비는 수많은 고구려의 비밀을 그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비석, 광개토대왕비. 

6m 39cm라는 높이는 규모에서 고구려 사람들의 대륙적인 기질이 느껴집니다. 

단지 크기만 큰것이 아니라 글씨도 시원시원하게 한글자가 손바닥만한게 4면에 모두 1700여자를 새겨 놓았습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첫부분은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나와있습니다. 

가운데 부분은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기록, 마지막 부분은 묘를 누가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에는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씌여있는데 바로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입니다.

여기서 '국강상國岡上'은 광개토대왕이 묻힌 언덕 이름을 말하고, '광개토경廣開土境'은 땅을 넓혔다는 광개토대왕의 업적, '평안'은 백성들이 편안하도록 다스렸다는 뜻, '호태왕'은 왕중의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대로 광개토대왕은 땅을 넓힌 왕으로 이 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이 차지한 영토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수 있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바로 비려와의 전투. 


전편에서 슬쩍 언급한 부분으로 조금 깊이 들어가 봅니다


즉위 5년,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일으켜 달려간 곳은 비려로 패려라고도 하는 그들의 정체는 정확하지 않지만 거란족의 일파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비려와의 전투를 광개토대왕비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몸소 대군을 이끌고 비려 토벌에 나섰다. 부산을 넘어 염수가에서 비려를 격파시키고 세개 부락, 육칠백영과 수를 헤아릴수 없는 소,말,양의 무리를 획득했다

其詞曰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OO[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 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유목민이던 비려를 무너뜨린 격전지는 소금강이라는 뜻의 ‘염수'였습니다. 

소금물이 흐르는 강, 중국학자들은 염수를 지금의 '염난수-국내성' 일대로 보기도 하지만 염난수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국내성이 있는 집안에서 서북쪽으로 수백km의 사막을 건너 초원을 지나면 전형적인 유목민 마을이 나오는데 요하의 상류지역인 시라무렌강유역으로 이곳은 현재 내몽고자치주에 속하는 지역입니다. 

다시 내륙쪽으로 내달리면 염장이라는 '소금'과 관련된 이정표를 발견 할수 있는데 초원 한가운데 있는 염전, 거대한 소금호수였다는것입니다. 

물밑 바닥에 하얗게 소금이 가라앉은 호수. 

내몽고 지역에는 이곳 외에도 소금호수가 몇군데 더 있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소금산지로 알려진 지역으로 염수가 바로 이런 곳일 것입니다. 

소금강 '염수'의 위치가 확실해진 것이죠. 

내몽고자치주에 있는 시라무렌강가의 소금산지, 그곳이 바로 광개토대왕이 비려를 정복한 염수인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 고구려의 흔적들이 곳곳에 나타나는데 1900년대 초, 일본군이 만든 지도에도 고구려 성터라는 기록의 고려성이 있고 멀지 않은 곳에 '고려영자'라는 고구려 마을이 있습니다. 


고구려 강이라는 뜻의 ‘고려하'는 거란족의 본거지였던 이곳 시라무렌강으로 고구려의 흔적은 희미하게 남아있습니다.

염수가에서 비려와의 전쟁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일어났던 일을 비문에 적고 있는데, 광개토대왕은 사냥준비를 시키고 주변의 영토를 돌아보면서 사냥을 하며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五備?  遊觀土境  田獵而還

돌아오는 길에 양평도를 지나시고 동으로 ?성 역성 북풍에 와서 왕이 ?를 준비시키시어 경치를 즐기고 사냥을 하며 돌아오시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냥을 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새로 정복된 영토를  확인한다든가, 민심을 수렴한다든가 이런  측면에서 선무 또는 위무성격을 가진 순수성격을 가진 것으로 해석해 볼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당시 중국의 연나라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이 부분은 전편에 자세히 기술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연나라의 숙군성을 공격하자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중국대륙에서 고구려의 세력판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 북한에 있는 바로 덕흥리 고분입니다.


평안남도 대안시에 있는 덕흥리 고분은 1976년 발견이후 지금까지 무덤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두고 논란이 많은 곳입니다. 

덕흥리 고분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덤에 씌여진 글자때문입니다. 

무덤의 주인이 사망한 해를 보면 광개토대왕때라는 사실을 알수 있는데, '영락 18년'이라는 광개토대왕의 연호를 쓰고 있고 역임한 관직 가운데 '소대형'은 고구려의 관직입니다. 

그런데 유주자사를 지냈다는 무덤의 주인이 문제가 되는것입니다. 

무덤에는 주인공의생전모습을 자세히 그려 놓고 있는데 무덤의 주인을 향해 늘어서서 인사하는 이들이 보입니다. 

옆에는 각 인물마다 다스리던 지역을 표시해 놓았는데 이들은 모두 지방을 다스리던 통치자들로 태수였습니다. 

앞자리에 서있던 신하는 북경의 동서쪽에 있는 연군지역을 다스리는 연군태수 입니다. 

그리고 이중에는 현재의 북경부근으로 비정되는 범양태수도 있고 이밖에도 북경 일대의 상곡 어양 광령 대군 태수들도 자리를 같이 했었다. 이들은 모두 유주자사가 다스리는 지역의 지방 통치자들인 것이다. 유주자사 진. 이렇게 무덤의 그림이나 글씨를 보면,  무덤의 주인이 북경지역을 다스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때문에 고구려가 한때는 북경지역까지 실제로 지배했다는 의견이 학계 일부에서 제기됐던 것입니다. 

수수께끼의 덕흥리 고분은 어떤 형태로든 고구려의 영향력이 북경까지 이르렀을 가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때 고구려의 영토는 요동지방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고구려의 세력권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북부여도 고구려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고구려의 영향권안에 있었고 동쪽에 있는 동부여도 고구려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려전의 기록을 보면 당시 북쪽으로는 지금의 내몽고까지 고구려의 영향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한때는 서쪽으로 북경까지도 고구려의 영향이 미쳤을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사기에는 재미난 기록이 있습니다. 

談德能用兵 不得出拒 담덕능용병 부득출거

광개토대왕 담덕이 용병술이 능해서 감히 나와 싸울수 없다. 


이 기록을 비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以六年丙申  王躬率O軍  討伐殘國

육년 병신에 왕께서 친히 O군을 이끌고 백제를 치셨다.


결국 18세 소년 광개토대왕의 지략에 백제는 10여성을 함락당합니다.  

전쟁에서 광개토대왕의 진면목을 알수 있는 비문의 기록은 광개토대왕 즉위 6년에 벌어진 백제와의 전투로 전쟁에서 이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불과 30여년전, 평양까지 쳐들어와서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를 치기위해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396년, 광개토대왕 즉위6년의 일입니다. 

이 전투에서 광개토대왕의 전략은 당시로서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기발한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진격로는 평양, 개성을 지나 임진강을 건너는 것으로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로부터 임진강은 고구려와 백제를 오가는 중요한 길목이기에 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성과 백제의 성이 맞서있던 접경지였습니다. 

특히 '호로곡'이라고 불리는 이 부분은 강폭이 좁고 강이 얕아서 말을 타고 단숨에 강을 건널수 있는 천혜의 요지로 바로 여기에 고구려의 요충지, 호로고루 성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성터만 남아있는 호로고루성을 연천군에서 일부를 보존하고 있는데 수직으로 성벽을 바르게 쌓아올린 축조방식 외에도, 이곳이 고구려의 성이었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임진강에 인접한 호로고루성은 고구려가 백제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전략적으로 상당수의 고구려 병사가 주둔했을 것입니다. 

최근 이 지역의 중요성을 알수 있는 고구려 유물이 인근에서 발견되었는데 군량미 창고 자리에서 발견된 다량의 탄화미가 그것입니다. 

백제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임진강의 요새, 호로고루성에 고구려 군대는 군량미를 비축하고 주둔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백제를 공격하기위해 나선 고구려 병사들의 구성은 황해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안악3호 벽화고분에서 고구려의 병사들을 만날 수 있다. 

병사들은 무기의 특성에 따라 각기 모습을 달리하고 있으나 표정은 한결같이 진지한 모습입니다. 

허리춤에 화살통을 매달고 활을 든 궁수, 도끼를 든 부월수, 창과 방패를 든 창수, 갑옷으로 중무장한 중갑기마병 등으로 이들이 광개토대왕의 군대였습니다.(전 게시글의 철갑기병 참조) 

이런 대군이 당시 호로고루성앞으로 임진강을 건넜을 것이다(?)


반전입니다. 

광개토대왕 자신은 임진강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비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진격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광개토대왕이 수군을 직접 이끌었다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압록강에 큰배가 있다는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배를 이용했다는 증거로 고구려가 백제를 함락시킨 것도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수군이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점령한 성을 보면 인천, 당항지역 일대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전방에 있는 고구려 군대가 백제의 주력군을 공격해서 싸우는 동안 광개토대왕은 서해안에 수군을 상륙시켜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는 작전을 폈습니다. 

당시 상황을 비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국경이남에 도착해 구모로성 각모로성 등을 공격하니, 고구려 군대가 백제의 수도에 다다라가고 있었다. 


城, 曾拔城, 宗古盧城, 仇天城, ####逼其國城, 殘不服義, 敢出迎戰.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殘兵 

그 국성에 다가갔다. 백잔은 의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 영전했다. 왕은 위엄으로 대로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 를 보내 성으로 진격했다. 


광개토대왕이 건넌 아리수는 지금의 한강입니다. 

광개토대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한강으로 들어와 백제와의 전쟁을 마무리 했습니다. 

흔히 고구려 군대는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달리던 기마병으로 알고 있는데 고구려에도 수군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전 광개토대왕은 이렇게 배를 타고 한강으로 들어와 단숨에 백제를 굴복시켰습니다. 

기마병과 수군을 적절히 활용하는 최고의 용병술을 광개토대왕은 실전에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396년의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는 백제의 참패였는데 당시를 비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OO[歸穴]O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O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OOOO성을 둘러 싸자 백제왕이 괴로워하여 남녀 일천명과 세포 천필을 바치며 무릎을 꿇고 맹세하길  '이제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습니다'고 하였다.


할아버지를 죽인 나라 백제를 정복한 광개토대왕은 백제왕을 죽이지 않고, 용서한다. 백제왕을 용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 게시글에서 언급한 광개토대왕은 정복왕이었지만 백제와의 전투에서 완전히 격파해 영토를 넓히기 보다는 백제를 고구려의 지배아래 두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전투로 백제는 얼마동안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는 신하의 나라가 된는데 신라는 고구려와 어떤 관계였을까요?


비문에는 고구려가 신라와 싸운 기록은 없습니다. 

신라와 관련한 기록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광개토대왕 즉위 10년, 신라가 위기에 처했을때 고구려는 신라를 구하기위해 구원군 5만을 보내고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내물왕과 왕후가 잠들어있는 황남대총은 신라 왕릉가운데 가장 규모가 큽니다. 

역시 국사시간에 달달 외웠던 신라문화를 꽃피운 당당한 왕으로 내물왕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라인이 기록한 역사 속에서 보여지는 모습으로 실제 광개토대왕과 내물왕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광개토대왕비에는 내물왕이 399년, 고구려에 급하게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O遣使還告以O計

이때 신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국경에 가득하여 성지를 크게 파괴하고 노객을 천민으로 삼으니 왕께서 돌아와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태왕께서 은혜롭고 자애로우시어 그 충성스런 정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사신을 파견하여 O로써 돌아올 것을 알렸다.


내물왕은 광개토대왕의 지시를 간절히 원했고 이에 광개토대왕은 신라의 충성을 칭찬하면서 신라사신에게 밀계를 주어 돌려보냅니다.

밀계를 주어 신라사신을 보낸다음 광개토대왕은 그이듬해, 신라를 구하기위해 5만의 군사를 신라에 보냅니다. 

고구려군대는 왜와 연합해서 신라를 침공한 가야지역까지 단숨에 진군해 내려간 결과는 한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고구려군은 전투마다 승전고를 올렸고 광개토대왕의 군대는 마침내 한반도 남쪽에서 강력한 철제무기로 무장한 철의 나라, 가야를 역사속에서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고구려군이 정복한 수많은 성은 신라병사들이 지키도록 내주었고 이 전쟁을 계기로 신라왕은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합니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10년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가서 신라를 구원하였다.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남거성에서 나아가 신라성에 이르렀는데 왜인이 그 안에 가득하였다.

관군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갔다.


OO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O新[羅]城?城  倭[寇大]潰

급히 뒤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발성까지 쫓으니 성이 복속하여 돌아왔다.

안라인으로써 ?와 신라성, ?성을 병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자 왜적이 크게 무너졌다.


삼국사기 등 역사책엔 기록돼지 않은 이 전쟁의 결과를 얘기하는 또 하나의 금석문이 있습니다. 

신라와 고구려 양국이 전쟁없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70년대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는 그 이후 상황을 자세히 들려주고 있는데 중원고구려비는 겉모양만 광개토대왕비를 닮은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그 내용까지 광개토대왕비와 거의 일치합니다. 

중원고구려비에 신라왕이 직접 옷을 받았다는 것은 신라가 고구려에 깊숙히 예속됐음을 의미합니다. 

흔히 조공관계는 신하를 보내 조공하는 방법이 일반적으로 왕이 직접 친조를 하고, 직접 의복을 하사받는 것은 드문일입니다. 

그런데 이때 신라는 왕이 직접 나설 수 밖에 없는 단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신라는 군사력에 있어서도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는데,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 신라의 영토에 주둔하는 고구려의 군대를 이르는 말)’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신라의 왕릉급 고분인 호우총에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유물이 묻히게 된 것은 구원군을 보내준 고구려의 400년 전투때문으로 여기서 발견된 호우는 제사때 쓰는 그릇입니다. 

특히 이 호우는 광개토대왕에게 제사지낼때 쓰던 것으로 이 그릇은 신라에서 광개토대왕의 제사를 모셨다는 가능성과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라에서 발견된 이 호우는 1600년전 신라와 고구려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시대의 산물인 것입니다. 

신라는 고구려를 섬기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에게 제사지낼 때 쓰던 호우가 신라의 왕릉급 고분에서  발견된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은 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를 무릎 꿇게 했고 신라에는 군사를 주둔시킬만큼 고구려의 영향력은 컸습니다. 


앞에서 흘린것처럼 우리는 흔히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고구려에서 삼국통일이 가능해보이던 시기는 광개토대왕때로 당시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의 군대는 싸웠다하면 이기는 백전백승의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은 삼국통일을 이루지 않았습니다. 

고구려는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었습니다. 

비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옛날 우리 시조인 추모왕이 고구려를 세울때, 아버지는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고구려의 건국신화에서도 알수 있듯이 고구려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의식을 가진 민족으로 왕과 왕실은 하늘의 혈통이고, 고구려사람은 천손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늘의 선택을 받았다는 고구려인의 선민의식에는 고구려만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광개토대왕과 같은 시기에 고구려에서 벼슬을 했던 모두루의 조상 무덤(집안시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에도 고구려왕이 해와 달의 아들이라는 뜻의 '일월지자'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늘의 자손이었던 고구려인들에게 시조에 대한 제사는 곧 하늘에 대한 제사로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압록강변에는 지금도 고구려의 성지로 알려진 곳이 국동대혈입니다(국내성(집안현 현성)에서 동쪽으로 17km 떨어진 높은 산 중턱). 

바로 이곳에서 매년 10월이면 고구려인들은 하늘에 제사지내고 하늘의 아들인 조상신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동맹(고구려 때에, 해마다 10월에 지내던 제천 의식)이라는 범국민적인 축제를 거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전역에 추모왕의 사당을 짓고 시조신과 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렇게 시조신과 선왕을 모시는 조상숭배는 고구려의 신앙으로 특히 하늘의 자손인 왕은 죽어서도 고구려를 지켜준다는 믿음을 고구려 사람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죽어서도 고구려를 지키는 왕의 무덤을 관리하는 것은 고구려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정복지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까지 묘관리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당시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은 모두 330가구, 무덤주변에 살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인 110가구와 정복지에서 데려온 주민 220가구가 함께 묘를 지키도록 그 수와 비율을 정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선왕의 제사까지 담당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는 지배지역민들까지도 고구려의 신앙과 질서속에서 함께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고구려인들의 이런 사고방식은 인근 나라에도 영향을 주며 고구려의 질서속에 편입시키려는 시도였습니다. 


왕중의 왕, 태왕이었던 광개토대왕에게는 영토를 넓히는 것보다 고구려를 받드는 제후국이 필요했고 고구려는 북부여와 신라, 동부여, 백제를 태왕의 질서속에 사는 신하의 나라로 남겨두고자 했던 것입니다. 

고구려의 질서 속에서 한민족이 함께 사는것, 그것이 바로 정복왕 광개토대왕이 추구했던 통일이었습니다. 

중원고구려비에는 '수천'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하늘을 지킨다는 뜻으로, '여형여제 수천' 고구려는 신라왕에게 영원히 형과 아우가 돼서 이 세상의 질서를 지켜 나가자고 한 것입니다. 


世世爲願 如兄如弟 上下相和 守天 세세위원 여형여제 상하상화 수천

대대로 형제와 같이 상하가 서로 화목하기를 원하고 하늘을 지키리라.


광개토대왕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삼국통일을 꿈꾸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복해서 한 나라가 되는 것보다는 고구려의 지배질서 속에서 함께 사는 세상을 지향한 것이 바로 고구려의 세계관이었습니다. 


중국과 맞서서 당당한 고구려의 천하를 건설한 하늘의 자손들. 

그들은 고구려가 세상의 중심임을 이 비 가득 새겨 놓았고 이제 우리는 광개토대왕의 본래이름을 되찾아 주어야 합니다. 

비문은 그가 보통의 왕이 아님을 명백히 밝히며 여러왕을 다스리는 왕중의 왕, 태왕이었습니다. 

고구려는 바로 태왕의 제국이었고 광개토태왕비는 이 사실을 전하기위해 이런 거대한 모습으로 오늘날까지 서있는 것입니다. 

이후의 글에서는 ‘광개토태왕’으로 통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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