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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Mar 28. 2021

건축가의 역사 읽기 I 희미한 상고사 대고구려 셋

; 장군총, 동아시아의 pyramid

초, 중, 고등학교 학사 과정에서 우리의 역사 중 상고사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뇌리에 남아 있는 부분이 광개토태왕 비와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일 것입니다.

앞서 게시했던 광개토태왕 비와 함께 중국의 학자들이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부르는 장군총은 1,500년 전, 아시아의 제국이었던 고구려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흔히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광개토 왕릉은 태왕릉, 장수왕릉은 장군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학계에서는 아직 정설이 없습니다.

중국 학계는 광개토 왕릉은 태왕릉이라고 보는 편이지만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태왕릉 설광 장군 총설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왼쪽 장군총 오른쪽 태왕릉

태왕릉이라는 이름은 1913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전(塼) 돌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태 왕릉 안 여신고 여악)'이 새겨져 있던 데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래서 '태왕'이라는 글자로 광개토 태왕릉이라 짐작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태왕릉의 규모는 한 변이 62.5m~68m에 달하며 높이는 14m에 달해 장군총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어 장군총은 장수왕, 태왕릉은 광개토 태왕릉이라는 '태왕릉설'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장군총을 광개토 태왕릉이라고 주장하는 편에서는 장군총이 조성된 연대는 5세기 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장수왕 사망 시점이 491년이고 장군총에서 나온 와당(瓦當·지붕 기와 끝을 막는 막새기와)과 명문(銘文) 기와 등의 유물을 종합해 보면 광개토 대왕이 태왕릉에 묻혔다고 보기 어렵고 장군총에 광개토태왕이 묻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군총이 장수왕의 무덤이 되려면 고구려에 왕이 살아 있을 때 무덤을 만드는 수릉(壽陵) 제도와 망자가 고향이나 가문의 근거지로 돌아가 묻히는 귀장(歸葬) 제도가 존재했어야 장군총이 장수왕릉이 될 수 있지만 고구려에서 수릉제나 귀장제가 전면적으로 시행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고 있고 천도를 단행한 장본인이 60년 넘게 지내온 새 왕도를 떠나서 새삼스럽게 옛 왕도로 돌아가 묻혔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와당 비교 해 볼까요

왼쪽은 태왕릉, 오른쪽은 장군총에서 출토된 이파리 8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의 그림으로 지안시에 있는 또 다른 고구려 고분인 천추총을 광개토대왕이 개·보수했고 이곳에서 광개토대왕의 생전 연호 ‘永樂(영락)’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습니다.

그래, 태왕릉에 묻힌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의 선대왕인 고국양왕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것입니다.


아직 정설로 정해진 것은 아니라 이 부분에서는 무엇이 옳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고구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두가지, 바로 광개토태왕비와 장군총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거대함과 정교함의 고구려 미학.

; 건축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장군총

장군총은 높이가 약 12m, 건물로 치면 5층 높이나 됩니다.

그동안 장군총에 대한 학계의 관심도 컸지만, 지금은 고구려의 옛 영토가 남의 나라 땅이다 보니, 잊혀 온 데다가, 최근에는 한국인들이 고구려 유적에 관심을 갖는 것을 꺼려 한 중국정부가 현지촬영을 금지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조치가 있기 전에 장군총을 답사한 한 학자가 촬영해놓은 영상에서, 남의 땅이 되어버린 고구려의 옛 도읍지에서 1,500년이란 세월을 꿋꿋하게 이겨온, 장군총의 전설적인 위용을, 비로소 볼 수가 있었습니다.


중국과 한반도의 서부 국경선을 이루고 있는 791km의 압록강은 1,500년 전에는 국경선이 아니었습니다.

압록강을 타고 내륙으로 들어가면, 북쪽으로는 중국이, 남쪽으로는 북한 땅이 바로 몇 미터 앞에 보입니다.

지금은 그 어느 쪽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땅이 되었으나, 서기 3년 고구려인들은 이곳 압록강변에 도읍을 정했습니다.

압록강 유역
집안시 무덤군

국내성, 오늘날의 중국 길림성 집안 시 일대로 이곳에는 아직도 그 시대 강성했던 제국, 고구려의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세계적인 이목을 모으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 있는데 집안 시 외곽에서 1,500년 전 국내성의 어디에서든 맞닥뜨리게 되는 거대한 무덤떼로 그 수가 무려 13,000 여기에 달합니다.

세계최대규모의 고분군으로 산으로 착각할 만큼 큰 무덤이 천여기, 작다고 해도 집한 채 크기입니다. 

이 무덤떼는 대부분 4세기부터 7세기까지 고구려시대에 만든 것들로 초기고구려의 강돌을 덮어 만든 무덤에서부터 흙을 쌓아만든 무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13,000여기에 이르는 고구려무덤떼 중에 사람들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이 장군총입니다. 

1,500년의 세월을 비껴온 것 처럼 완벽한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거대한 돌무덤이 바로 장군총입니다. 

피라미드와 같은 모양의 그 당당한 위용은, 보는 사람들을 압도합니다. 

밑변의 길이는 약 32m, 높이는 12m가 조금 넘습니다. 

돌의 나이와 축조방식으로 보아 무덤은 약 5세기의 것으로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층과 층 사이를 규칙적으로 들여 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군총은 이렇듯, 그 완벽한 형태와 빼어난 조형미, 그리고 탁월한 건축기법으로, 광개토태왕비와 함께 고구려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장군총의 기단부와 일층 사이에 이 돌은 모두 화강암으로, 전체 무게가 적어도 6천톤이상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철근을 박아 넣었다거나, 따로 기둥을 세운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돌로 쌓아 올린 무덤으로 이 엄청난 무게의 돌무덤이 천 오백년이란 세월을 버텨 왔던 것입니다.

장군총의 밑부분은 물론, 주변까지 강돌을 사면에 둘러놓은 것으로 큰 것은 직경 1m도 넘습니다. 

이런 큰 돌을 규칙적으로 놓고 작은 강돌로 다시 촘촘하게 사이를 메웠는데, 이것이 무거운 윗돌의 압력으로 무덤의 밑부분이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당시로서는 최고의 기술인 것입니다. 

1,500년전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것 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을까 싶은데 이런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돌의 마술사 고구려인들. 


그들의 빼어난 솜씨는 먼저, 돌과 돌사이의 좀은 틈에서 발견됩니다. 

그것은 돌과 돌이 맞물린 부분에 만들어진 일종의 홈같은 것인데 그 홈은 모든 돌의 가장자리에서 예외없이 발견됩니다. 

폭이 약 9cm, 파인 홈의 깊이는 약 5cm로 안쪽은 높게 바깥쪽은 낮게 만든 매우 정교한 홈입니다. 

돌 가장자리에 홈을 파서 밑돌을 놓은 다음, 그 홈에 맞추어 위 돌을 정확하게 맞물린 것으로 건축기법상 들여쌓기에 해당합니다. 

이 들여쌓기는 원래 무덤을 쌓던 방식이 아닙니다. 


중국대륙 동부와 서부의 경계인 요동 북부에 중국은 주변국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곳에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몇백년도 못 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듭해야 했는데 바로 그 땅에서 1,000년 넘는 세월을 견뎌온 백암성. 

5세기 고구려가 중국쪽 세력을 막기 위해 1차 방어선으로 쌓은 이 백암성은 구려가 망한 후, 지금까지 버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성벽과 주요 방어시설이 그대로 남아있을 정도로 중국을 능가했던 고구려의 탁월했던 축성술입니다. 

그 기술은 성벽의 기단부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성을 쌓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들여쌓기입니다. 

장군총은 고구려의 독특한 축성술인 들여쌓기 방식으로 쌓아올린 것입니다. 

실제로 들여쌓기는 수치로 계산하면 안에서 밖으로 누르는 측압을 없앴기 때문에 수직쌓기에 비해 약4배나 견고합니다. 

장군총이 1,50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견고한 축성방식인 들여쌓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들여쌓기 이외에도 눈길을 끄는 것이 또 있는데 그랭이(돌을 놓고, 그 위에 돌을 깍아서 맞추는 것)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국사 그렝이

한국 사찰건축의 백미로 손꼽히는 고찰 불국사는 통일신라 최고의 건축술이 결집된 건축물인데 바로 이곳에서 그랭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장군총보다 약 4세기 후에 세워진 불국사 기단부에 똑 같은 모양의 그랭이가 있습니다. 

국내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인 진도 5.8의 지진이 났던 2016년 경주에서는 일대 지역의 건물들은 벽이 갈라지고, 유리가 깨지는 등의 피해사례가 나타났지만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신라시대의 문화재들은 극히 일부만 훼손된 것으로 드러나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는데 이를 안정적으로 버텨준 것이 그랭이 공법입니다.

장구한 세월, 불당과 전각을 떠받쳐갈 대들보와 건물의 초석과 기단부를 그랭이로 쌓아올린 것입니다. 


돌과 돌을 맞붙이고 남은 틈새는 작은 돌을 꼭 맞도록 짜집기하며 이 작은 틈새 하나도 그냥 두지 않을 만큼, 고구려인들은 철저했던것입니다. 

쌓아올린 돌 하나의 크기는 무려 5m가 넘는데 이런 엄청난 크기의 돌을 무려 천 백개나 쌓아 올렸습니다. 

그 시대에 이 많은 돌은 어디서 구했을까요 그리고 기중기나 파워크레인도 없었던 그 시대에 어떻게 이렇게 높이 쌓았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장군총에서 서북쪽으로 약 16km지점에 산능선이 암벽에서 암벽으로 이어지는 우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흥미로운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바로 길림성의 고고학자인 방기동이 발견해낸 '고구려채석장'이 있입니다. 

1,500년 전 운반에 앞서 그 단단한 화강암을 어떻게 떼어 내는 것이 첫번째 문제일것입니다. 

현대의 채석장에서 사용되는것은 벌림장치가 달려있는 발달된 형태의 쇄기로 이것을 전기드라이버를 이용해 돌 표면에 나란히 박아넣은 다음, 망치질을 해서 잘라냅니다. 

그런데, 석공들의 말에 따르면 돌을 쪼개는 방식은 그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다른점이 있었다면 손으로 돌에 쐐기를 박아넣었을 그당시에는 쐐기의 크기가 조금 더 컷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게가 평균 15t이나 되는 무거운 돌을 어떻게 날랐을까요. 

우산에서 장군총까지는 약 16km입니다. 

기중기가 발명되기전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큰 돌을 옮기는 방법이란 큰 돌을 통나무를 깔고 나르는 방법으로 추측되는데 이런 방식을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들은 고인돌을 쌓아야 했던 청동기인들입니. 

5세기 고구려사람들도 이런 방식으로 돌을 옮겼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쌓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돌 하나의 높이는 약 50cm정도로 4단만 쌓아도 사람의 키를 넘습니다. 

장군총도 고인돌의 판석을 운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먼저 기단부를 쌓은 다음, 흙으로 주변에 길을 만들고 그 위로 돌을 날라오는 방식으로 스물두단을 쌓아올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다 쌓은 후에 주변의 흙을 제거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살펴볼 때 장군총의 축조에는 기술뿐만이 아니라, 19,000t의 화강암(5t트럭 3800대분), 흙 12,500t(5t트럭 2500대분), 약 7만명가량의 인력등 엄청난 예산이 동원됐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단순히 기술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 충분한 경제력과 함께 강력한 왕권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것을 5세기에 고구려가 지었다고 하는것은, 고구려가 그 당시 얼마나 강력한 국가였는가를 짐작케 하는 부분입니다.


돌무덤 하나 쌓는 과정만 봐도 그 시대 고구려의 힘을 느낄 수 있는데 장군총의 정상은 넓직한 평면을 이루고 있고 이곳에 직경이 약 9cm 구멍이 있습니다. 

구멍과 구멍사이의 간격은 약 50cm 이런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이런 구멍이 있고 이상한 것은 또 잘 다듬어 만든 무덤에 울퉁불퉁한 커다란 자연석을 기대놨습니다.

장군총에서도 보았듯이 고구려인들의 석재기술은 중국 문헌에서도 여러번 언급될 만큼 당대 최고였는데 천 백개나 되는 돌을 정교하게 깍아서 무덤을 만든 고구려인들이 왜 이 바위는 그냥 갖다 세워놓았을까요. 

그리고 꼭대기의 구멍과 이 거대한 바위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장군총이 처음으로 중국학계에 보고된것은 1905년. 

무덤은 1,000년간 아무도 돌보지 않아 잡목이 무성했는데 당시 정상부분에서 상당수의 기와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중에는 마치 주름을 잡은 듯, 가장자리를 일정한 간격으로 누른 흔적이 있는 전형적인 고구려의 막기와가 상당수였습니다. 

이와 함께 정교한 무늬의 연화무늬의 수막새도 발견되었는데 이런 유물을 통해 한가지 사실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장군총의 정상에는 어떤 형태로든 건물이 있었을 것이며 무덤정상의 구멍은 바로 그 건물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구멍의 크기로 미루어 볼 때 구멍은 건물 주변에 둘렀던 울타리의 흔적일 것입니다. 


우선 건물의 크기를 추측해보면 높이 약 4.5m, 가로세로의 길이는 약 7m의 전각형태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지붕은 요동성총 벽화에서 비슷한 건물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3층전각입니다.

비례로 볼 때, 장군총의 정상에는 바로 전각이 있었을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은 조형미를 완성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장식물 이었을 것입니다.


크기는  3m에서 큰 것은 5m, 무게가 30톤 가까이 되는 기단부에 기대놓은 엄청난 바위들이 기단부 사면에 둘러져 있는데, 현재 발견되는 것은 전부 열한개로 정면에 두개, 삼면에 세 개씩입니다.

원래 정면에도 돌이 하나 더 있어 모두 열두개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물리적인 버팀돌이 아니라면 열둘이라는 숫자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신라 경주의 김유신 묘엔 12지신조각이 등장하지만 12지신이 전파된것은 8세기에서 12세기 이므로

관련이 없습니다.

글머리에서 잠시 언급한 장군총과 불과 수km 거리에 있는 태왕릉에도 장군총과 똑같은 형태 의 자연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축조시기가 거의 같고 기본적인 무덤양식이 같은 광개토태왕릉의 바위는 장군총과 같은 목적으로 배치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동서쪽 면에 다섯 개, 남북쪽면에는 여섯 개씩, 모두 합하면 22개나 됩니다.


살아서는 위대한 군주였고, 죽어서는 신으로 떠받들어졌던 위대한 고구려의 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인광개토태왕비는 화강암보다 훨씬 연한 응회암임에도 불구하고, 글짜를 새겨넣은 표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혀 다듬은 흔적이 없는 자연석으로 이를 이용해 신성한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면에서 장군총의 호석도 신성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쓴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직접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아서 아직 반론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장수왕릉이라고 보는 주장이 유력합니다.


장수왕, 제국의 완성


그에 관한 우리의 상식은 간단합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고구려 최대의 영토와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사람이라는것이죠.

고구려의 전성기는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 때문에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에 비해 강하게 기억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5세기 장수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강력한 존재였고 그 사실을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많은 기록들 중에 당시 중국의 가장 강대국이었던 위나라의 사서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의 왕(448년이면 장수왕이다). 이 고구려의 왕이 죽으니 황제가 베옷을 입고, 대궐밖에 나가 곡을 했다.

고구려 장수왕이 돌아가셨다. 내가 생전에 만나지는 못했으나 어찌 애석치 아니하리오. 왕은 특별 한 애도식을 준비시켰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위나라 황제는 장수왕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고, 특별한 절차로, 그의 죽음을 애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수왕시대의 고구려의 위세라는 것은 서방세계를 다 통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그것은 말하자면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표시가 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중국에 대해서 주체성은 올라갈수록 강했고, 그런면에서 장수왕은 당당했던 고구려의 모습을 과시했던 것입니다.


국내성에서 평양천도. 

평양천도에서 중원고구려비까지 장수왕의 행로를 말해주는 427년 중원고구려비는 설명합니다.

평양으로 도읍지를 옯긴 장수왕은 한반도 남부의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그 정치적인 영향력을 강화해 나갑닏다. 

중원고구려비에 나오는 충주지역의 고구려장수가  신라왕을 불러서 옷을 선물했다는 기록은, 당시 한반도내 고구려의 영향력을 짐작케 합니다. 

이와 함께 장수왕은 고구려의 국적인 영향력을 높여갔습니다. 

그 발판이 된 것이 바로 평양천도로 그것은 대동강연안으로 발달한 드넓은 평야지대를 발판으로 농경국가로 변신하기 위한 경제적인 천도였습니다. 

농경국가로의 변신, 그 중요성은 당시 주변국의 상황을 보면 짐작 할 수 있는데 당시 유모국가였던 유연과 송은 북위와의 불편한 관계에 있어 고구려와 교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장수왕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이들과 농산물을 교역하면서 유대관계 맺고 북위를 고립시켰을 뿐만 아니라, 실리적인 외교에 밝았던 장수왕은 유연과 지두우를 분할지배했습니다. 

지두우는 동북아의 주요 말산지로 고구려는 지두우를 차지함으로써 기병을 조직하고 주변국과의 유대관계를 맺는데 활용했습니다.

장수왕은 뱃길을 이용해서 중국 남부의 송과도 활발하게 교류하는 경제외교로 전쟁을 하지 않고도 주변국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성장했고 이런 고구려의 영향력을 북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고구려가 5세기 동아시아의 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바로 장수왕의 탁월한 외교력에 있었던 것으로 백성들이 입장에서 보면 전쟁터에서 살아야 했던 광개토태왕시대보다는 풍요와 안정을 누릴 수 있었던 장수왕시대가 더 행복했을 지도 모릅니다.

고구려의 문화를 말해주는 벽화고분도 장수왕시대의 풍요와 평화속에서 탄생하기 시작했는데 이 벽화에는 그 시대 고구려의 힘을 말해주는 흥미로운단서가 숨어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미처 눈여겨 보지 못했던 것 그 단서는 바로 수레로 당시에는 수레를 주로 소가 끌었던 모양입니다. 

벽과 덮개는 가죽과 비단으로 만들었고, 모양 자체도 조형미가 있는 아름다운 마차인데 이 바퀴가 상당히 큽니다. 

지름이 1m가 넘고 둘레에는 철로 테를 둘렀으며 방사형이라고 부르는 바퀴살도 촘촘히 박힌 상당히 발달된 형태의 수레인데 이런 바퀴를 단 수레라면 상당히 먼거리까지 물건을 나르기도 쉬워 보입니다. 

1,500년전에 그려진 고구려고분벽화에는 이런 수레가 약 40여개나  등장합니다.

가장 화려한 고분벽화중의 하나인 오회분 오호묘의 벽화에는 바퀴의 신이 등장합니다.

오회분 사호묘에도 바퀴의 신이 보이는데 고구려인에게 수레가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커다란 바퀴의 매우 탄탄해보이는 짐차에서부터 귀족들이 타던 화려한 수레까지 약 40여 대가 등장하는데 수레가 있었다는 것은 도로가 그만큼 잘 정비돼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1935년 발굴조사된 안학궁성, 그로부터 약 50년 뒤에는 평양시 외곽 안학궁성에서 멀지 않은 대동강변에서 또 하나의 흔적, 고구려나무다리터가 발견됩니다. 

1981년, 대동강의 양쪽 해안에서 발견된 오래된 나무조각들은 바로 337m에 이르는 고구려 나무다리 유적이었습니다. 

세계에서 18세기에도 강에 다리가 없었는데 고구려는 이미 1,500전에 다리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도로망을 바탕으로, 고구려는 국내외교역을 확장해 나갔고 경제적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풍요로운 선진국가로 성장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주변국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인구가 세배나 늘어날 정도였다고 중국의 사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광개토태왕의 영토확장으로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전성기, 그것은 농업을 바탕으로 한 장수왕의 탁월한 경제외교로 완성된것입니다.

이들이 120년간에 걸쳐 이록한 국가적 기틀은 이후 200년간의 평화와 안정기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나라, 

독자적인 세계관과 문화를 갖고 있던 나라,  

그리고, 우리 민족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경영했던 제국,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시대의 고구려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지금 고구려를 다시 보는 것은 단순히 화려했던 과거 한 때의 기억을 돌아보는 감상에서만은 아니라 1,500년의 세월을 넘어, 그시대 역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던 고구려인들의 힘과 그 진취적인 기상이 지금의 우리에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숨가쁜 오늘을 헤쳐나갈 힘을 얻고 싶은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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