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ppycracy 행복산업의 지배
幸福 행복’이라는 단어를 단 하루도 듣지 않고 보내기 힘들 만큼 어디에서도 어느때에도 들을 수 있는 단어 입니다.
우리 삶의 가치, 성공과 실패, 정신적·정서적 발달 정도를 가늠하는 기준도 행복이라는 것인데 정의 하기는 모호 합니다.
일반적으로 Serotonine 세로토닌=행복 호르몬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세로토닌은 기분 조절에 관여하기에 비정상적으로 낮은 수치를 지닌 사람일지라도 세로토닌 수치를 높이면 적어도 단기적으로나마 기분이 좋아질 수 있고 신경계 연결을 활발하게 해주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만날때도 작용하는 세르토닌은 상대의 결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해서 사람의 눌을 멀게 하므로 주변에서 아무리 얘기를 해도 소용 없게 되며 홍수처럼 분비되는 세르토닌이 콩깍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영국왕립정신과대 교수, Linda Gask 린다 게스크는 '행복 호르몬'으로 알려진 세로토닌 수치 저하가 흔히 고민, 무능, 비관, 염세, 허무 관념 따위에 사로잡힌다는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연구를 발표하였습니다.
더욱이 연구진은 앞선 연구 17건을 조사한 결과 우울증 환자들 뇌의 세로토닌 수치가 일반인과 크게 차이가 없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물론 우울증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도 위험할 수 있지만, 항우울제 복용으로 심각한 부작용을 겪는 환자들도 있기에 바로 이 부분을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게 이번 논문의 주장입니다.
행복은 도처에 있다.
행복은 텔레비전, 라디오, 책, 잡지, 헬스클럽, 요리 접시와 다이어트 팁, 병원, 직장, 전쟁터, 학교, 대학, 기술, 웹, 경기장, 가정, 정치, 그리고 당연히 상점 진열대 위에 있다.
‘행복’은 단 하루도 이 단어를 듣지 않고 보내기 힘들 만큼 무소부재의 단어다.
-본문 p.12
우리는 왜 행복이라는 명제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방향을 욱여넣는 것일까요.
심지어 행복감이라는 대전제이 이루지 못하면 작은것에라도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소확행이라는 말까지 그 방향에 들어 가고 있을까요.
미국에서는 1950~60년대에 자조문학과 행복 코치가 등장했고, 문화적으로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미국 외부에서는 행복에 대한 집착을 과학적으로 포장하는 이른바 긍정심리학이 2000년대 이후 확산되는데 이 시장은 그 어떤 사회경제적 위기에도 영향받지 않았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는 행복 추구에 대한 동기가 되었고고 그 무렵부터 소셜 네트워크와 미디어, 건강 잡지는 끊임없는 행복 담론을 폭격처럼 퍼부었습니다.
2012년 유엔은 3월 20일을 ‘세계 행복의 날’로 정하고 “모든 국가가 행복을 공공 정책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권고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각국 통계 연구소에 행복을 수치화한 ‘웰빙 지수 채택’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기업들 역시 ‘행복한 노동자가 생산성을 높인다’는 신념으로 조직 개편에 나서며 구글, 레고, 이케아 등직원들의 감정을 관리하는 ‘행복서비스팀장(CHO)’ 자리를 신설한 했고, 코카콜라처럼 각 나라에 ‘행복연구소’ 지부를 둔 회사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발맞춰 자기계발 전문가와 인생 코치 등이 주도하는 행복 산업은 갈수록 커지는 추세로 ‘생의 소소한 기쁨을 음미하라’ 따위의 가르침을 전하는 ‘마음챙김’ 시장은 연간 10억 달러(약 1조1145억 원) 규모로 성장했고, 명상·행복 애플리케이션은 수백 만 사용자를 보유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집착은 강박이 됩니다.
심리학자 Edgar Cabanas 에드가 카바나스는 사회학자 Eva Illouz 에바 일루제와 함께 '해피크라시: 행복학과 행복 산업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가 Happycracy / Manufacturing Happy Citizens: How the Science and Industry of Happiness Control Our Lives'라는 책을 공동 집필했습니다.
Happycracy는 저자들이 만든 새로운 용어로 ‘Hhappy’와 정치체제를 뜻하는 ‘-cracy’를 합성한 용어를 통해 행복의 가치를 설파하는 ‘긍정 심리학’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해 ‘행복 강박증’ 환자를 만들고 사회 모순을 은폐하는 현상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긍정의 심리학이 가진 과학적 기반에 의문을 제기하며 우리가 행복에 집착하는 것을 멈추고, 대신 행복의 공유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행복은 시장에서 개인의 발전과 ‘역량 증진(empowerment)’을 평가하는 잣대라는 점에서 명실상부한 ‘상품’이 되었다.
- 본문 p.163
Happycondriacs 행복 염려증
긍정적인 인생관을 갖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낙관주의는 때때로 일정 수준의 기대를 유지하고 어떤 일을 하는 동기가 되기는 하지만 어떤 때는 우리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해, 우리가 하기로 한 것을 성취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능성을 잘못 판단하고 그릇된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1990년대 말 등장한 긍정심리학은 행복산업의 이론적 기초가 되어 긍정심리학은 인간의 부정적 감정보다 ‘긍정적인 감정, 스스로 삶에 더하는 의미, 낙천주의, 행복’ 등을 연구하고 자아실현의 심리학적 열쇠를 전해줄 수 있는 새로운 행복의 과학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심리상담사, 자기계발서 저자, 다양한 유형의 코치 등이 활동하는 심리치료 시장과 시너지 효과를 냈고, 행복이 경제적 가치의 더 나은 기준이라고 여기는 ‘행복경제학’, ‘진정한 내면의 풍경’에 집중하고 현재의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법을 강조하는 ‘마음챙김’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긍정심리학과 행복산업이 확산되면서 행복하지 않다는 말은 인생을 잘못 살고 있다는 뜻이 되어버렸고, 행복은 건강하고 정상적이며 제대로 돌아가는 삶의 심리학적 최종 기준이 되었지만 문제는 행복이데올로기가 생활조건, 사회구조, 시대상황 등이 어떻든 행복의 열쇠는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행복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로보며 감정은 집단, 공동체, 사회에도 달려 있다는 사실은 외면합니다.
또한 늘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바로잡고 자기를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는 ‘행복염려증’ 환자들을 양산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슬픔이 무언가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는 아닙니다.
상실을 경험했을 때 슬퍼하지 않을 수 없으며 슬픔으로 끝나지 않고 기분이 나빠지며 우리는 두 번 벌을 받습니다.
상황이 좋은데도 더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진 이들이 계속해서 행복을 추구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것이 이른바 ‘Happycondriacs(행복 염려증)'의 핵심으로 우리는 자신이 아프지 않더라도 항상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믿는 사람, 즉 건강 염려증 환자에서 이 개념을 착안합니다.
해피콘드리아는 자신이 잘 지내더라도, 기분이 나빠지는 하나하나에 집착하며 기분이 안 좋을 때만 당신이 잘 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잘 지내더라도 더 나아지도록 돕는다는 것으로 더 나아진다는 것은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 행복해질까요?
그 답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 누구도 당신은 이미 행복하니 뭔가를 더 하려고 하지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완전히 행복할 수 없고 행복하더라도 방심해서는 안 되며, 끊임없이 경계해야 하고, 긴장을 풀면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성취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오늘날의 지배 담론은 행복을 물신화하고 기능성 개념을 심리학 영역에 국한하며 건강, 성공, 자기 개선을 긍정성(높은 긍정 수준)과 결부시킨다. 긍정적 감정(기능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기능 이상적 감정)의 대립은 전통적 심리치료의 부정성을 극복하기는커녕, ‘없던 병 만들기’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다시 말해, 감정은 계층화되었고 여기에 비추어 부정적이라고 평가된 사람은 제 역할을 다하며 건강하게 살기 어려운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 본문 p.224
행복의 위대한 옹호자 중 한 명인 John Stuart Mill 존 스튜어트 밀은 생의 마지막에 행복을 인생의 주요 목표로 삼을 가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디서 행복을 찾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찾으려 하면 할수록 더 크게 좌절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행복에 대한 집착을 멈춰야 합니다.
'내가 더 행복해질 거야' 대신 '내가 누군가를 더 행복하게 해줄 거야'라고 초점을 우리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맞출때 그것은 행복의 역설에서 벗어나는 것일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