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사필담첩으로 다시보는 名명, 字자, 號호
추사는 김정희의 호(號)가 아니었다.
지난 11월29일 KBS 뉴스에서 과천 추사박물관에서 개최되었던 추사필담첩2-1809년 추사의 연행(燕行) 특별기획전과 함께 방송한 뉴스 내용입니다.
1809년 스물네 살의 김정희가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갔을 당시, 김정희, 박제가, 유득공 등이 청나라 문인들과 직접 필담을 나눈 240면이나 되는 방대한 양의 추사필담첩에 김정희는 "제 이름은 정희이며 자(字)는 추사(秋史), 호는 보담재입니다. 지난해 시월 진사가 되었습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추사'가 '자'라는 걸 본인이 직접 밝힌 겁니다.
그동안 김정희의 '호'로 알았던 '추사'가 실은 '자'였음을 보여주는 이 주목할 만한 기록은 과천 추사박물관이 2020년에 구매한 방대한 분량의 필담첩을 장장 2년여에 걸쳐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확인됐습니다.
字자와 號호는 짓는 시기와 용도가 다릅니다.
우선 이름(名)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이름입니다.
兒名(아명)은 관례(성인식)전까지 자유롭게 부르는 이름으로, 요즘 엄마 뱃속의 아이에게 이름이 주어지기 전에 태명이라고 붙여 부르는것과 같은 의미로 단지 태어난 후에 부르는 이름입니다.
보통 황희의 아명이 '도야지(돼지의 사투리)', 고종황제가 '개똥이' 처럼 천한 것을 빗대어서 지었는데, 이는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명과 유사한 初名(초명)초명의 경우 아명보다는 주로 한자로 이름을 지어 주로 아이때의 이름을 말한데, 황희의 경우 '수로', 고종황제의 재황(載晃), 희(熈)를 말합니다.
字자
이제 성인이 되면 字자라는것을 가지게 됩니다.
예기(禮記)에 '남자는 20세에 관례(冠禮; 남자가 성년에 이르면 어른이 된다는 의미로 상투를 틀고 갓을 쓰게 하던 의례)를 행하고 자(字)를 짓고, 여자는 혼인을 약속하면 계례(筓禮; 15세가 된 여자 또는 약혼한 여자가 올리던 성인 의식)를 행하고 자를 짓는다.'고 설명하며 자를 짓는 이유에 대해 '관례를 행하고 자를 짓는 것은 그 이름을 공경해서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관념 때문에 어른이 된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출생한 후부터 갖게 된 이름이외에 누구나 널리 부를 수 있는 별도의 칭호가 필요하게 되어 字자를 지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字)는 성년의식인 관례를 행할 때 짓게 되는 데, 예전부터 관례를 혼인례(婚姻禮)보다 중요시하였다고 합니다.
전통사회에서는 어른과 아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었고, 그 기준을 머리에 두었기때문이지요.
남자의 관례는 머리를 가다듬어 관을 쓰는 의식이고, 여자의 계례는 머리를 꾸며서 비녀를 꽂는 의식입니다.
머리에 변화를 가함으로써 아이에서 벗어나 어른이 됨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바꿔말하면 인격의 변화를 신체를 대표하는 동시에 정신이 담긴 머리에다 그린 것입니다.
의미있고 엄숙한 의식을 거행하면서 성년이 된 사람으로서 항시 마음에 새기고 행동으로 실천해야할 덕목이 함유된 字자는 성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담겨져 있습니다.
字자를 중시하였으므로 비교적 자유롭게 지을 수 있는 號호처럼 풍류적, 해학적인 성격을 띤 것은 전혀 없고, 대부분 근엄하게 실천할 德目이 함유된 글자로 지었던 것이죠.
이러한 字자를 지을 때는 일반적으로 이미 지어진 이름과의 연관을 지어 지었습니다.
자는 이름에 의거하여 짓는 것이니, 이름은 자의 본(本)이고 이름은 자(字)의 말(末)이다. - 연감유함(淵鑑類函; 청대의 백과사전)
이름에 의거하여 자를 지으니, 지은 이름을 들으면 그 자를 알 수 있고, 자를 들으면 곧 그 이름을 알 수 있게 된다.-백호통(白虎通; 후한 때에 반고가 편찬한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
號호
이렇게 字자가 친구들이나 선배들조차 상대를 존중하여 상호 부르는 이름이라고 한다면, 號호는 본인이나 친구간, 마을 사람들, 혹 그외 다른이들이 가볍게 이름 대신, 또한 자 대신 부를 수 있는 호칭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 號호는 이름과 달리, 제약 없이 누구나 불러도 되고 존칭접미사를 붙이지 않아도 결례가 아닙니다.
중국의 경우, 호는 당나라부터 시작하여 송나라에 이르러 보편화되었습니다.
신라의 승려 소성거사(小性居士) 원효와 백결선생(百結先生)을 사용한것으로 그 시작은 삼국시대였지만 일반화된 것은 중국 송나라의 영향으로 고려시대에 보편화되었습니다.
사람들 중에 호로써 명을 대신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거처하는 바를 따라서 호로 사용한 사람도 있고, 그가 간직한 것을 근거로 하거나 혹은 얻은 바의 실상을 호로 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당나라 문인 왕적의 동고자東皐子, 두자미杜子美(두보)의 초당선생草堂先生, 당나라 시인 하지장의 사명광객四明狂客, 백락천(백거이)의 향산거사香山居士 같은 것은 그들 이 거처하는 곳을 따라서 이를 호로 삼을 것이고, 도잠(도연명)의 오류선생五柳先生, 정훈의 칠송거사七松居士, 구양자(구양수)의 육일거사六一居士는 모두 그들이 가진 것을 근거로 한 것이며, 장지화의 현진자玄眞子, 원결(한유)의 만랑漫浪는 얻은 바의 실상(도달한 경지)들입니다.
그렇게 호에는 사는곳을 호로 삼은 경우, 소유한 물건을 호로 삼은 경우, 도달한 경지를 호로 삼은 경우 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이 세가지에 처한 처지를 호로 삼는 경우까지 4가지가 주를 이룹니다.
所處以號 소처이호
가장 기본적으로 ‘재(齋), 헌(軒), 암(巖), 계(溪), 곡(谷), 담(潭), 당(堂)’ 등 생활하고 있거나 자신이 학문을 배우고 가르친 곳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 흔히 당호(堂號)라고도 불리는 당(堂), 암(庵), 정(亭)으로 끝나는 호가 많습니다.
정조전의 三峰삼봉은 단양의 도담삼보을, 이황의 退溪퇴계(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서 구도 생활에 들어 간다는 의미)나 陶山老人도산노인은 안동의 도산과 토계라는 지명을 호로 한 것입니다.
이이의 호인 栗谷율곡과 石潭석담은 파주의 율곡과 해주의 삭담을, 유원형의 호 潘溪반계는 부안의 우반동을 따서 지은 것입니다.
박지원의 호 燕巖연암은 그가 거주하던 김천 연암을, 정약용의 호 茶山다산은 그가 19년간 적거하던 강진의 다산을 스스로 불렀더것이다.
이렇게 지명을 그대로 호로 사용한 것들은 동시대 사람들이 기억하고 부르기가 편리하였으리라고 보여지며, 호로 사용하는 사람이 거주하는 처소를 표시하는 것 외에는 주관적인 뜻이 호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소처를 호로 한 경우에도 주관적인 의도가 나타난 예가 보이기도하는데,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은거할 곳을 찾아 가려 정하면서 그 지명을 자호로 한 경우에는 은둔의 뜻이 호 속에 녹아 있기도 합니다.
송산조 松山趙(조견)은 평양사람으로 고려가 망하자 명과 자를 바꿔 개가 주인을 그리워하는 의리를 취한 것입니다.
청계산에 은둔했을 때 태조가 친히 왕림하자 다시 양주 송산으로 피하였고 송산으로 호를 한 것은 소나무에서 시들어 떨어지지 않음을 취하고 산에서 옮겨가지 앉음을 취한 것이죠.
그래서, 조견이 소처로 호를 하였으면서도 지명의 자의로 절개와 의리까지 나타내어 그의 호에는 소지까지 스며들어 있습니다.
谷雲곡운 김수증은 성격이 매우 맑고 고결하였으며 춘천의 곡운에 은거하였는데 이익을 도모하려는 생각이 없었고,
고청초로 孤靑樵老 윤기가 만년에 공주 고청산 아래에 정하자 사방의 선비들이 다투어 우러러보며 그의 문하로 모여드는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김수증의 호 운곡은 소처로 지은 것이나 은둔의 뜻도 나타내고 있으며, 서기의 호 고청도 소처로 지은 것이나 세상의 욕심에 휩쓸리지 않고 살려는 의지가 나타나 있고, 이에 초로를 덧붙여서 미천한 신분이어서 벼슬길에 진출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까지 나타내어, 소처이호 하였으면서도 소지와 소축까지 나타내고 있습니다.
所志以號 소지이호
소지이호는 호속에 자신이 목표로 삼아 도달한 경지 또는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와 의지가 담겨진 호로 이루어진 뜻이나 이루고자 하는 뜻을 호로 한 것입니다.
이런 호에는 수신의 뜻을 나타낸 것이 가장 많고 은둔이나 풍류를 나타낸 호들도 흔히 발견되며 해학적인 성격을 띤 것들도 간혹 발견됩니다.
이규보는 자신의 호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 한 이유를자유롭게 얽매이지 않고 변화가 다양하며 세상에 초연히 집착하는 바가 없음을 좋아하고, 빛나는 색이없는 백색이 구름의 정색이므로 호를 백운이라 하고, 자신은 거가(집에서 한가로이 지냄)하면서도 도를 즐기는 사람이므로 이에 거사를 덧붙여 백운거사라 하였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온 안유(안향)가 호를 회헌晦軒이라 한 것은, 젊어서부터 성리학을 좋아하여 늘 회안晦庵(주희)의 초상을 걸어놓고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뜻을 표하며 호를 회헌이라 하였습니다.
이제현은 가죽나무가 쓸모 없는 나무이기 때문에 목수의 도끼에 찍힘을 당하지 않고 장수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자신도 잘난 체 하지 않고 훌륭한 인재가 못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어지러운 세상에서 목숨을 보존하겠다는 뜻으로 櫟翁역옹이라 호를 지었다고 합니다.
율곡의 어머니의 호 사임당師任堂은 태교로 훌륭한 아들을 낳아 성인으로 키운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스승으로 삼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며, 그런 마음으로 율곡을 양육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대표적인 유현(유학에 정통하고 언행이 바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송순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담양에 정자를 짓고, 면앙정이라 편액을 써서 단 후에, "굽어보면 땅이 있고 우러러보면 하늘이 있으며 그 가운데 정자가 있어 호연한 기상이 일어난다"하여, 천지를 면앙(아래를 굽어보고 위를 우러러봄)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고자 호를 면앙정俛仰亭이라 정했다고 하였습니다.
정약용의 호 여유당與猶堂도 노자의 ‘與(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언약동섭천 유혜약외사린’에서 여와 유를 따다 지은 것으로, 많은 수난을 겪은 다산의 인생을 살얼음판을 건너듯 사방의 적국을 대하듯 조심하며 살겠다는 뜻을 이 호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외에도 고서의 귀한 말씀으로 호를 짓는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논어에서 빌어온 호가 많은데 '세한 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也;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지조)은 날이 찬 겨울-지조를 간직해야 할 때-이 되어서야 안다)’에서 따서 호로 삼은 세한재 歲寒齋(안종도), 후조당 後凋堂(김부필), 한송당 寒松堂(윤철)등이 있고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五身: 나는 날마다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에 대해 반성한다)'에서 가져온 정숭조는 삼성재 三省齋라 했으며,
'강의목눌근인(剛毅木訥近仁 ; 강직한 것과 의연한 것과 질박한 것과 어눌한 것은 인에 가깝다)’에서 가져와 눌재訥齋(장항, 이예, 박상, 양성지), 눌암訥庵(김찬), 눌헌訥軒(이사균), 의재 毅齋(김재갑)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역 쾌卦명에서 가져온 고재蠱齋(최숙생), 돈재遯齋(성세창), 이재頤齋(차식, 최래길), 간재艮齋(박응님, 전우), 손재巽齋(김수용, 김향악)등이 있고
대학의 '일신 일일신 우일신 (日新 日日新 又日新; 날로 새로와지려거든 하루하루를 새롭게 하고 또 매일매일을 새롭게 함)에서,
담간온재澹簡溫齋(김종후)는 중용의 ‘군자지도 담이불염 간이문 온이리(君子之道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군자는 담담하면서 싫어지지않고 간결하면서 세련되고 온화하면서 조리있다)’에서 따다가 지은 호로서 그 문구가 상징하는 뜻을 수양의 지표로 정한 것입니다.
그밖에 지족당知足堂(조지서, 남곤, 권능창), 존양재 存養齋(이계전), 호학재 好學齋(민기), 퇴수암 退修菴(조성복), 죽송당 竹松堂(남경창)등의 호도 수신이나 절의를 뜻하는 것들입니다.
세상을 피해 숨거나 풍류적인 뜻으로 지은 호로 서여딩 逍遙堂(권륜, 박세무), 무송헌 撫松軒(김담), 유연당 悠然堂(김대현), 망우당 忘憂堂(곽재우), 망기당 忘機堂(조한보), 무민당 無閔堂(임위, 박인), 임휴당 逸休堂(이상공), 모재 茅齋(이홍우), 취임 醉菴(이흡), 망세정 忘世亭(심선), 풍월정 風月亭(월산대군), 풍영정 風詠亭(김언거), 무수정 無愁亭(유최기), 하구정 下鷗亭(조은경)등을 열거할 수 있으며, 대서헌 大笑軒(조종도), 취몽헌 醉夢軒(오태주)등은 해학적 풍자적인 뜻을 지닌 호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호에는 세속의 어지러운 일속에서 초탈해서 초야에 무쳐 사는 선비나 선가적인 생활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소지로 호를 삼은 예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예가 많습니다.
소우이호 所遇以號
호를 짓는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호로 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우로 지은 호 가운데는 귀해졌거나 부자가 되었거나 건강해진 것을 나타내는 호는 드물고, 늙음, 괴로움, 가난함, 병들음, 외로움, 허무함 등을 나타내는 호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호들은 대체로 은隱(벽산청운 碧山淸隱-김시습, 예산농은 猊山農隱-최해, 초은 樵隱-이인복, 어은 漁隱-민재, 취은 醉隱-송세림등), 옹翁(고옹 痼翁-박세경, 병옹 病翁-신필정, 기재 棄齋-유언민등), 수叟(부전경수 薄田耕叟-안계송, 초수 樵叟-곽경, 강수江叟-박훈등), 노 老(야로 野老-성여신등), 부夫(어부 漁夫-성효원등), 거사 居士(운수거사 雲水居士-김광찬, 청평산인 淸平居士 이자현등), 산인散人(강호산인 江湖散人-김숙자등), 포의布衣(직봉포의 直峯布衣-김우옹등), 야인野人(규곽야인 葵藿野人-안응세등)등의 글자가 붙은 호들입니다.
신종호의 호 삼괴당三魁堂은 19세에 사마시에 장원하고 성종대에 과거에 세 차례 괴과(갑과)로 급제하였다 하여 이를 호로 정한 것이며, 김대유는 나이가 70이 넘으니 장수하고 사마시와 대과에 합격하여 대성(사헌부+사간원)과 주현의 벼슬살이를 하였으니 영광스러운 명예가 최고이고 아침저녁으로 술과 고기르 제공받으니 이 또한 부족하지 않다 하여 호를 삼족당三足堂이라 하였는데 이 두 사람의 호는 예외로 자신이 처한 자랑스러운 처지를 호로 한 것입니다.
문익점은 항상 근심하는 것이, 나라의 국운이 떨치지 못하고 학문의 이룸이 적고, 자신의 도가 서지 못함 등 세 가지였으므로 호를 삼우거사三憂居士라 하였고, 김약은 정아무개는 나를 악하다라 하였고 찬남은 나를 괴상한 사람라 하였고 옛 친구는 나를 미친사람이라 하였고 백강은 이애하기 어려운 사람라 하였고 잠곡은 편협한 사람라 하였으니 오자옹五者翁으로 호를 삼겠다라하여,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평을 모아 호로 삼기로 하였습니다.
허필은 살아가는 동안의 가장 좋아하는것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고 담배를 한 대 피워보면 곧 그 산지를 분별할 수 있었으므로 호를 연객煙客이라 하여 자신의 기호를 호로 삼았고, 이성임은 필체, 문장, 언어, 노래, 용모 등 다섯 가지가 모두 옥과 같다 해서 호를 오옥五玉이라 하였는데 이런 호들도 소우이호로 볼 수 있습니다.
所蓄以號 소축이호
소축이호는 간직하고 있는 물건가운데 특히 가장 소중하고 좋아하는 것으로 호를 삼은 것입니다.
백운거사록에서는 중국 도연명의 오류선생(五柳先生; 집앞 다섯 그루 버드나무), 정훈의 칠송처사(七松處士; 집앞 소나무 일곱 그루), 구양수의 육일거사(六一居士: 비석문에 관한 책, 장서, 거문고, 바둑판, 술단지+나) 등을 이런 호의 예로 들어 놓았습니다.
오류선생과 칠송는 각기 집 주변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와 일곱 그루의 소나무가 있어서 이를 자호로 한 것이고, 육일거사는 구양수가 가진 것으로는 일만권의 장서, 일천권의 집고록(구양수가 경전을 주석한 금석 문헌), 거문고 한장, 바둑 일국, 술 한단지와 한명의 늙은이(구양수 자신)을 들 수 있다하여 호를 육일거사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호 가운데도 자신의 가장 소중하고 좋아하는 물건을 호로 삼은 예가 호보(號譜; 호에 따라 분류하고 그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붙인 책)에서 볼수 있습니다 고려 의종때에 참소를 당하여 동래에 유배된 정서는 정자를 짓고 오이를 심고 거문고 타고 시를 읊는 것으로 연군지정을 달래면서 ‘축정종과(築亭種瓜;정자를 짓고 오이를 심는다)’를 따서 호를 과정瓜亭이라 하였고,
현약호는 맑은 지조와 독행이 있는 사람으로 몸소 상록수인 소나무, 측백나무, 대나무을 심고 자호를 삼벽당三碧堂이라 하자 삼연三淵 김창흡이 삼벽당기로 지어 이를 찬양하였다 하며 문익주는 집 앞 연못의 붉은 연꽃이 고유한 빛깔로 변하였으므로 호를 백련당白蓮堂이라 하였다 한다.
최운은 집안에 연못이 셋이 있어서 사람들이 삼지선생三池先生이라 불렀고, 권지는 유성 시골집에 은거하며 한가히 지내는데 짙푸른 솔숲이 집을 에워싸서 속세의 티끌 하나도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호를 만송거사萬松處士라고 정했습니다.
이러한 소축이호들이 소나무, 측백나무, 대나무, 연꽃, 오이, 연모등을 호로 하였고, 이들이 숨겨져 있는 의미 있는 상징이 호를 지은사람의 뜻과 서로 맞아 이를 호로 삼은 것이므로 소축이호들에도 호를 지은사람의 이루고자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 4가지의 작호법 가운데 호를 짓는 사람의 독창성과 개성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 소지이호이고 뚜렷한 개성이 없고 독창적이지않은 작호방법이 소처이호이며, 위에 열거한 네가지의 법칙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호가 있다면 그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호로는 보기는 힘듧니다.
어떤 인물의 거주지가 바뀌었거나 뜻하는 바(소지)나 처한 상황(소우)이나 좋아하는 물건(소축)이 바뀐 경우 그에 맞는 호를 새로 지어서 쓰는 일이 흔히 있게 되어 한사람이 몇가지 호를 갖거나 심한 경우에는 한사람이 수십개의 호를 지어 쓰기도 하였습니다.
김정희는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농장인(農丈人), 보담재(寶覃齋), 담연재(覃硏齋),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500여종의 호를 사용하였다 하며, 이것이 한사람이 여러 가지 호를 사용한 대표적인 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