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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문 CCⅥ 순전한 기독교

; Clive Staples Lewis C. S. 루이스

by Architect Y

그리스도인은 전부 절대 금주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절대 금주를 요구하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회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도저히 멈추지 못하는 성향을 가졌다거나, 자기가 그런 성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 잘 취하는 사람이 있어서 자극하지 말아야 하는 상황처럼 특별한 경우에는 독한 술을 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예서 중요한 점은 자기한테 마땅한 이유가 있어서 술을 삼가는 것이지 남이 술 마시는 것을 죄로 생각해서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남이 적당히 술을 즐기는 것은 얼마든지 좋게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정 부류의 악인들에게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자기들이 포기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다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기독교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특별한 이유로 어떤 것 – 결혼이든 고기든 술이든 영화든 -을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는 순간, 혹은 그런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순간, 그는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3-2 그리스도인의 행동, 기본덕목 중 (p 132-138)


기독교(개신교)에서는 술이야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고 있지요.

이에 대해 순전한 기독교는 명쾌한 결론을 제시 하고 이있습니다.

1956년에 복음주의의 지성을 대변하기 위해 빌리 그레함과 칼 헨리등 복음주의 지도자들에 의해 창간된 미국의 복음주의 언론을 대표하는 Christianity Today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서 21세기를 열면서 20세기 기독교가 남긴 명저 100권을 선정해서 발표했는데 1위로 선정된 책이 신학자나 목회자 혹은 선교사의 책이 아니고 한 평(?)신도* 영문학자가 쓴 책 「Mere Christianity 순전한 기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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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e Christianity 순전한 기독교


1943년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습이 한창이던 불안한 정세의 영국에서 그는 BBC 라디오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진정성을 차근 차근 설명하는 방송내용을 책으로 묶어 1952년에 출판한 Mere Christianity는 1977년에 ‘내가 믿는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초판이 나온 이래로 1990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같은 제목으로 그 후, 은성에서 1991년, 1994년, 그리고 홍성사 2001, 5, 8, 18, 21년에 ‘순전한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꾸준히 새롭게 번역되어 왔습니다.

70년도 더 훌쩍 넘은 고전히 여전히 주목받고 있는것입니다.


왜 교회를 다녀야 할까?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데 사는게 왜 힘들고 일이 잘 안풀릴까?

하나님이 어디에서 보이고, 어디ㅅ에서 느껴질까?

성경은 잘짜여진 환타지소설 같이 원래는 별것 아닌 이야기였는데, 사람들이 너무 '열심히' 믿어서 지금의 거대한 종교가 된 것이 아닐까?

기독교가 주장하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타종교인은 무조건 배척하며 심지어 '사탄'의 자식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안 믿어지는데 무조건 믿는 척이라도 해야 할까, 아니면 당당히 '안 믿어진다'고 해도 되는 것일까?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 왜 더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소심하고 때로는 치졸하기까지 하는것은 왜일까?

술, 담배는 구원과 상관없다고는 하면서도 왜 술,담배하는 사람은 혐오스런 눈빛으로 바라볼까?

이런류의 질문들은 어떤 것은 정직한 수준을 넘어서 공격적인 질문도 있긴 하지만, 교회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세상을 처음 접할 때 느껴졌던 의문들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의 궁금증, 그저 숨겨 왔거나 스스로 고민 하고 있거나 하며 궁금증을 스스로 억눌린채로 지낸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이 책은 쉽고, 또한 어렵습니다.

루이스는 정규신학을 공부한 적도 없고, 목회자는 더더욱 아니었으며, 심지어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의 동료학자들에게는 학문적 소임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의심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더욱이 신문을 거의 읽지 않았으며, 당대에 유행하는 문학작품들에도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그의 저서가 국내에서는 1977년 이후 한참이나 흐른 2001년 홍성사의 초판 이후 스테디셀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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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제한 시간 내에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중요치 않은 부차적인 설명은 다 삭제해야하는 라디오 강연 원고가 책의 시작이라 루이스의 다른 책보다 간결하고 명료하게 중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순전한'이라는 말이 혹시라도 '깨끗한', '순결무구한'이라는 의미로 쓰이며 기독교는 흠이 없고 깨끗한 종교라고 주장하기 위한 책이 결코 아닙니다.

'교파마다 이견이 있어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즉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책입니다.


루이스는 근본적으로 현대의 ‘Christianity-and-water 물탄 기독교’가 지속적으로 회피하던 진정한 기독교의 버팀목이 되는 두개의 관점을 다시 고쳐 세운 건축물에 비할 수 있는데 후 기독교 시대의 정신영역을 대변하는 자연주의적(naturalistic) 기독교와 윤리 중심적(ethico-centric) 종교의 반대편에 우뚝 서서 초자연주의적(supernaturalistic)이고 “구속 중심적”(redempto-centric)인 기독교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책에서는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진정한 판단 기준은 오로지 그 종교가 진정 초자연적이며 초월적 구원을 말하고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언젠가 과학이 완벽해져서 전 우주에 있는 것들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설사 그렇게 되었다 해도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우주가 지금처럼 지속되고 있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은 지금과 똑같이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해 보이지 않습니까?

- p54. 1-4. 옳고 그름, 우주의 신비를 푸는 실마리, 이 법칙의 배후에 있는 것 중


지금까지 서술해 온 이런 사실들을 먼저 이해하기 전에는 기독교가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용서를 약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회개할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자신에게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독교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먼저 도덕률이라는 사실이 정말로 존재하며, 그 법칙의 배후에 어떤 힘이 있고, 여러분이 그 법을 어김으로써 그 힘과 잘못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닫기 전에는, 정말이지 이 모든 것을 깨닫는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병들었다는 것을 알 때에야 비로소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처럼 여러분은 인간이 거의 아무 가망도 없는 처지에 있다는 점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왜 인간이 지금처럼 선을 미워하는 동시에 사랑하는가에 관해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도덕률 배후에 있는 비인격적 정신인 동시에 인격일 수 있는지에 관해서도 설명해 줍니다. 그들은 여러분과 제가 충족시킬 수 없는 이 법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 충족되었는가, 어떻게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어 그를 인정하지 않는 인간들을 구원하셨는가에 관해 말해 줍니다.

- p64. 1-5. 옳고 그름, 우주의 신비를 푸는 실마리, 우리의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중


선하고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의 필연적 존재를 성경이나 교회의 도움 없이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로 추론해낼 수 있다는 점은 정말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제1부 옳고 그름의 내용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인간의 이성적 사고 활동과 논리로서 증명하려는 이론중 도덕적 논증을 이야기 합니다.

일상 경험으로부터 도덕적 법칙의 생생함을 끌어내고, 불행하게도 우리 모두가 이 법칙을 범한 존재라고 연이어 설명하는데 이러한 도덕 법칙과 범법 후의 불안감은, 그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도덕적 존재를 상정하게 만든다(유신론)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하고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의 필연적 존재를 성경이나 교회의 도움 없이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로 추론해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이 책을 기독교인 비기독교인을 막론하고 지속적인 사랑을 받도록 만드는 핵심적인 내용으로 보입니다.


제2부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에서는 범신론과 기독교를 비교하며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하여, 이원론과 기독교를 비교하며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와 이를 잘못 사용한 반역에 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력에 대하여 하나씩 짚어가면서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를 하나님의 침공이라 표현―를 선택하도록 종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여겨 입을 틀어막을 수도 있고, 악마로 여겨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요 주님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어쩌니 하는 선심성 헛소리에는 편승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여지를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 p93. 2-3. 그리스도인은 물엇을 믿는가, 충격적인 갈림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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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3부 그리스도인의 행동에서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이야기하면서 기독교의 윤리적 가르침들을 하나씩 설명합니다.

도덕에는 4가지 기본 덕목-분별력, 절제, 정의, 꿋꿋함-과 3가지 신학적 덕목-사랑, 소망, 믿음-이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우리의 삶의 영역에 어떻게 생명력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해 말하며 추상적이고 관심 없이 지나치기만 하는 사랑과 믿음, 소망에 대한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기본 덕목 말고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가장 큰 죄', 즉 가장 핵심적이자 궁극적인 악이 바로 '교만'이라고 강조하는 부분으로 교만은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 없는 악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의 의미를 교만에서 찾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 ‘절제’라는 말을 음주 문제에만 국한해서 사용하는 바람에 생긴 큰 해악이 하나 있습니다. 음주 외에 다른 많은 부분에서도 똑같이 무절제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골프나 오토바이를 자기 생활의 중심으로 삼은 남자나 옷이나 카드놀이나 애완견에 온통 정신이 팔린 여자는 저녁마다 술에 취하는 사람만큼이나 ‘무절제한’ 사람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요. 카드놀이광이나 골프광이 길 한복판에 쓰러져 자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겉모습에 속지 않으십니다.

- p132. 3-2. 그리스도인의 행동, 기본덕목 중


분명히 교만하기 짝이 없는 사람인데,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아주 신앙적으로 행세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감히 말하지만 그들은 상상 속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이 허깨비 하나님이 자신들을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훨씬 낫게 여기며 인정해 준다고 늘상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께 상상속의 겸손을 1페니 어치 지불하고는 동료 인간을 향한 교만은 1파운드 어치나 얻어 내는 것이지요. 저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바, 그를 전파하고 그의 이름으로 귀신까지 쫓아냈으면서도 마지막 날에 결국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말을 듣게 될자들(마 7:22-23)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이런 죽음의 덫에 걸려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볼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는 – 특히나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게 느껴질 때는 – 확실히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 p196. 3-8. 그리스도인의 행동, 가장 큰 죄 중


마지막 제4부 인격을 넘어서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설명과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일까요?

책에 대 놓고 사람들이 일반인들은 신학을 원하지 않으니 이 부분의 내용을 빼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루이스는 하나님의 실존은 인간처럼 한 존재가 한 인격을 구성하는 식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 세 인격(혹은 위격)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인격을 넘어선다고 말합니다.

의도는 아직 그 누구도 명확하고 정확하게 설명한 적이 없는 삼위일체를 비그리스도인에게 처음으로 자기가 설명해보겠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루이스의 강조점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기독교의 핵심, 즉 새 사람으로 되는 신비한 과정,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거듭남과 성숙함에 있습니다.

‘만든다’와 ‘낳는다’의 개념, 시간과 영원 사이의 관계, 인간 실존 차원과 신적 실존 차원 사이의 차이 등을 설명함으로써 삼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아들을 원하신다면 처음부터 아들을 많이 낳으면 되지 왜 굳이 장난감 병정들을 먼저 만든 다음 굳이 그토록 어렵고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 생명을 주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답의 일부분은 아주 쉽지만, 다른 일부분은 인간의 지식을 뛰어넘습니다.

쉬운 부분부터 말해 봅시다. 인류가 오래 전에 하나님께 등을 돌리지 않았다면, 피조물에서 아들로 변화되는 과정이 그토록 어렵거나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가 하나님께 등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이 인류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은, 자동 인형에 불과한 존재는 사랑할 수 없으며, 따라서 무한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 p280. 4-6 인격을 넘어서, 두가지 부연설명 중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른 목적—교육, 건축, 선교, 예배—이 많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국가에 여러 목적—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목적 등등—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국가의 목적은 어떤 점에서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간단합니다. 국가는 단지 사람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평범한 행복을 보호하며 증진 시키기 위해 존재 합니다. (…) 마찬가지로 교회는 오직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 작은 그리스도로 만들기 위해 존재 합니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 건물도, 성직자도, 선교도, 설교도, 심지어 성경 자체도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목적은 단 하나뿐입니다. 이 우주 역시 다른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성경은 전 우주가 그리스도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모든 것이 그 안에 함께 모인다고 말합니다.

- p302. 4-8 인격을 넘어서, 기독교는 쉬울까 어려울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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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가 기독교 변증가로 예측하지 못했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였습니다.

그의 유명세는 대영제국의 울타리를 떠나 대서양 건너 미 대륙까지 강타해서 the Time지의 표지 인물이 되기도 했으며 ‘An Apostle to the Skeptics 회의주의자들에게 보냄받은 사도’라는 거창한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루이스의 영향력에 대하여 반갑지 않은 시각으로 보는 자들도 있었는데 Alistair Cooke 알리스테어 쿡은 루이스를 주목할 필요가 전혀 없는 꼬마 선지자 일 뿐이라고 비꼬면서 그에 대한 기억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심리적 혼란기가 끝남과 동시에 사그라질 것이라고 말했고 당시 런던에서 나돌던 한 작은 책자에서는 그의 기독교 변증은 ‘이성에 의지하기 보다는 충격 요법을 통해 남을 설득하려는 시도일 뿐’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스의 삶과 작품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커져만 갔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30여 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미국과 영국에서만 매년 팔리는 그의 책의 수가 육백만권을 넘어섰을뿐 아니라 이런 추세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날이 갈수록 더할 뿐이었습니다.
루이스의 삶을 기초로 한 1993년 영화, Shadowlands 새도우 랜드가 헐리우드로부터 전 세계의 관객들에게 루이스를 인식시켜 주었고, 디즈니사에서 출품한 나니아 연대기의 첫 작품인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영상화한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큰 수익을 올렸습니다.

결국 루이스는 20세기의 범주를 넘어 21세기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인물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전통적인 의미에서 신학자가 아니었던 루이스의 신학을 논하는 것이 필요한 것일까요?

한 가지 재밌는 추세는 과거와 달리 루이스의 신학과 사상에 대한 연구가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으로 루이스가 언급한 내용들이 본질상 신학적인 것들이고, 그가 비록 평신도 신학자였지만 실제로 신학적 추론과 토론을 그 무엇보다 즐겼다고 하는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루이스가 평생 특별한 애정을 갖고 교제했던 친구 Owen Barfield 오언 바필드 변호사는 다섯 명의 루이스를 접해야 루이스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 세 사람은 루이스의 작품 세계를 따라 베스트셀러 작가 루이스, 둘째 기독교 변증가 루이스, 셋째 영문학자 루이스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의 신앙에 따라 나누면 넷째는 무신론자 루이스, 다섯째 그리스도인 루이스입니다.

이렇기에 루이스를 21세기가 주목하며 그의 위대함은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 평신도라는 말은 말은 신약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직분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은사 중심의 교회였으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는 동역자들아었기에[고전12장] '성직자'와 '평신도'에 대한 개념이 성경적으로 전혀 지지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헬라어 '라이코스'(laikos)의 '라오스'(laos:백성)에서 파생된 단어로 '일반 백성'을 의미하나, 다른 이방인들과 대비되는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말로 세월이 지나면서 교회 안에서 '평신도'라는 용어는 지위가 '낮은 신분'으로 구별된것으로 없어져야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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