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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Jun 20. 2023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七宮 칠궁

; 아픈 역사속 영빈관 담장 너머 비밀스런 思母曲 사모곡

궁궐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궁(宮)’과 궁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말하는 ‘궐(闕)’을 합한 말이죠.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에는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제1법궁인 경복궁, 태종때 지어져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창덕궁,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창경궁, 임진왜란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가 머문 덕수궁(당시 경운궁), 선조의 5남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지은 경희궁, 이렇게 5개의 궁궐이 있습니다.

그런데, 宮궁이 붙은 공간이 하나 더 있습니다.

七宮칠궁.


조선의 왕들을 낳은 친모이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입니다.

일곱개의 궁이라해서 칠궁이라고 불리지만 사적으로 등록된 이곳은 서울 육상궁이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칠궁이 잘 알려지지 않은것은 역시나 청와대때문이었습니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이 입주하고 4대 윤보선 대통령에 이어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 당시만 해도 청와대는 수시로 국민에게 개방되는 장소였는데,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부대 김신조 등 무장공비 32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져, 이승만 정부 이후 계속됐던 청와대 개방이 중지됐고, 뒷산인 백악산 통행도 금지됐습니다. 

칠궁 역시 1·21 사태 이후 전면 통제됐고, 2001년에야 통제가 풀렸습니다.

그렇게 일반인에게 개방되었으나 청와대 관람코스에 속해 있는 바람에 여전히 보기 힘든 공간 이었습니다.

그러다 2018년 6월 시험 개방을 거쳐 확대개방되었고, 이후 1일 7회 시간제 관람으로 다시 변경되며 누구나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22년 5월 10일 마침내 청와대가 일반인에게도 개방됨에 따라 칠궁도 완전히 개방되었습니다.

개방된지 1년을 넘긴 청와대를 둘러보다 보면 곳곳에 가는 길을 알리는 사인을 따라 영빈관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멀리 외삼문이 보입니다.

가까이 가면 외삼문 앞 도로쪽(왼쪽)으로 ‘大小人員皆下馬 대소인원개하마’라고 새겨져 있는, 이후의 공간은 성역이니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하마비下馬碑를 볼 수 있습니다. 

하마비는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기어 궁가, 종묘, 문묘 따위의 앞에 세웠던 비석이죠.

외삼문 오른쪽으로 담장이 있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행각으로 드나드는 문이 보입니다.

왼쪽 하마비와 오른쪽 외삼문

외삼문을 지나면 정면과 오른쪽으로 협문이 바로 보이는데 안쪽의 사당에 닿기 전, 제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지은 재실齋室 공간 입니다.

오른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행각 맞은편에 사철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처럼 관원들도 재실에 머물며 늘 변치 않는 마음을 가지라는 송죽재 松竹齋와 영조가 휴식하며 어머니를 그리던, 이 곳이 재계하는 곳이므로 정신을 깨끗하고 고상하게 가진다는 풍월헌風月軒를 볼 수 있고 그 바로 앞에 노둣돌(;말에 오르거나 내릴 때에 발돋움하기 위하여 대문 앞에 놓은 큰 돌)을 볼 수 있는데 전용가마인 여輿를 타고 다니는 임금이 내릴 때 디딤돌로 사용한것으로 보입니다.

영조는 어머니에게 예를 다하기 위해 여기서부터는 직접 걸어 사당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하마비는 아직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지만 하마석은 말이나 가마가 사라지다 보니 남아 있는 곳이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송죽재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삼문을 통해 사당으로 가는 길입니다.

칠궁 외행각 외삼문 앞 칠궁내부
재실로 통하는 협문과 노둣돌, 하마석

처음 입구를 지나, 정면에 있는 협문은 또 다른 재실 공간으로 들어가는 곳으로 이 문을 들어서면 ’삼락당三樂堂’이라는 현액이 걸려 있는 재실의 안채 격인 가옥으로 이곳에서 영조는 어머니를 모신 육상궁에 거둥해 예를 올리기 위해 준비도 하고 쉬기도 하며 신하들을 접견하기도 했습니다.

숙빈최씨에 대한 존경심을 높이기 위한 크고 작은 행사와 토론이 펼쳐지곤 했던, 응접실 역할을 하던 곳이죠.

삼락은 맹자가 말한 세 가지 즐거움으로 부모가 모두 계시고 형제가 무고하며, 위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고,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라는 뜻이 일반적인 내용이고 이 밖에 논어에서는 예악으로 절제하기를 즐기고, 남의 착한 점을 말하기 즐기고, 어진 벗이 많음을 즐기면 유익하다고 하였고, 증자는 두려운 어버이가 있고 섬길 임금이 있으며 가르칠 자식이 있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간쟁할 어버이가 있고 떠날 수 있는 임금이 있고 노여워할 자식이 있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며, 타이를 임금이 있고 도와줄 벗이 있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고 하는 말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삼락당과 송죽재, 풍월헌과는 연결채로 이어져 있습니다.

송죽재, 풍월헌
삼락당과 삼문
육상궁 毓祥宮


왕자를 생산한 최씨는 점차 품계가 높아져 종1품 숙빈淑嬪에까지 봉해졌지만, 국가적인 봉사(奉祀;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심)의 은전(恩典; 나라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리던 혜택)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20대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이복동생이었던 연잉군(延礽君)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영조였습니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시대를 열었던 영조는 외가에 대한 열등감으로 궁녀축에도 끼지 못하는 천한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전하지만 사실, 근거는 없습니다.

참고로 쉽게 이야기 하자면, 궁녀는 왕실의 시중을 들기 위해 양가집에서 뽑아온 여관(여자 관리)이고, 무수리는 궁안 사람(주로 궁녀)들의 시중을 들거나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창의궁(통의동 35번지 일대-현 대림미술관 부근)에서 5년여 동안 연잉군(영조)과 함께 살던 숙빈은 1718년 생을 마감하고 2년 뒤 숙종이 승하, 이듬해 연잉군은 세자로 책봉되고 다시 3년 뒤 1724년 경종이 승하하자, 영조가 즉위합니다.

영조는 경종의 국상으로 인한 공제(公除; 왕이나 왕비가 죽은 뒤 36일 동안 일반 공무를 중지하고 조의를 표하던 일)가 끝나던 날,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 건립 문제를 논의합니다.

육상궁의 중문과 배각
연호궁과 이안청

영조가 최초 숙빈의 사당으로 염두에 뒀던 장소는 잠저(임금이 되기 전의 시기나 그 시기에 살던 집)였던 창의궁이었지만 창의궁에 친어머니의 사당을 둘 경우 제사를 모시는 주사가 거처해야 하는데 신하의 한 사람인 주사에게 임금의 잠저를 쓰게 할 수는 없다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별도의 장소를 물색하다, 1년 뒤 경복궁 북쪽에 사당이 완성되어 숙빈묘(廟; 신위를 모셔놓은 사당-무덤을 을 말하는 묘墓와 다름)라 칭했으며 지금의 칠궁 영역입니다.


그 후로 꾸준한 추존(追尊;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의 노력으로 20년 후인 ‘상서로움을 기른다’는 의미의 육상(毓祥)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렸고 다시 9년(1753년) 뒤엔 마침내 궁으로 격상시켜 지금의 이름인 육상궁(毓祥宮)이 되었고 무덤도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상되었습니다. 

영조는 52년의 재위 동안 육상궁을 200여 차례나 방문했습니다.

육상궁으로 격상된 후 변동 없이 대한제국까지 유지됐으나 1908년 저경궁등 다섯 임금 사친의 신주를 모시면서 육궁으로, 1929년 덕안궁이 또 모셔지면서 지금의 칠궁이 된것입니다.

배각과 연호궁 육상궁 편액

이제, 재실의 오른쪽 삼문을 통해 육상궁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삼문의 가운데 문은 귀신들이 들락거리는 곳으로, 사람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오는것이 조선이 예법이죠(종묘도 같습니다). 

바로 보이는 중문을 통해 들어가면 육상궁 앞에 동각(연우궁이안청), 서각(육상궁이안청)과 배각(拜閣;육상궁을 향하여 절을 올리던 장소)이 있고 나지막한 곡담이 이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배각을 지나면 육상궁에 이르는데 한개의 건물에 두 개의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것은 연호궁, 뒤에 걸려 있는 것은 육상궁입니다. 

육상궁이 먼저 생겼으므로 그 후에 설치된 연호궁의 편액이 앞에 걸리게 된 것이죠.

육상궁과 함께 있는 연호궁은 영조의 후궁인 정빈이씨의 사당으로 정빈이씨는 영조에게 장남 효장세자를 선사한 후궁이지만 효장세자는 아홉살의 나이에 죽었고, 그 다음에 태어난 아들이 사도세자죠.

다만, 1870년에 사당을 육상궁과 합친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냉천정

육상궁을 나와 오른쪽(서쪽)으로 돌면 어머니의 제사 때면 이를 추모하던 영조의 공간인 냉천정을 만날 수 있습니다. 

편액은 영조의 손자인 순조가 직접 썼다고 하는데 전서체 특유의 오묘함이 감돕니다. 

냉천정 뒤쪽에 육상궁을 지을 때 발견된 샘인 냉천冷泉이 있어 건물 이름이 냉천정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제사 때 이 물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냉천 우물 상단의 대리석에는 냉천정에 대한 영조의 친필 오언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御墨雲翰 어묵운한 

昔年靈隱中 今日此亭內 석년영은중 금일차정내 

雙手弄淸漪 冷泉自可愛 냉천자가애 쌍수농청의 

時强圉協洽病月上浣也(시강이협흡병월상완야) .


임금이 지은 글

지난 날 항주의 영은산 속에 있더니 오늘은 이 정자 안에 있네.

냉천과 자연

냉천에서 솟아오른 물은 수로를 따라 흘러가 남쪽 아래 뜰에 있는 냉천정 앞에 있는 네모난 모양의 자연이라

는 이름의 연못으로 모입니다.

자연(紫淵)은 다른 말로 요지, 요수(瑤池 瑤水; 신선이 살았다고하는 땅과 물)ㅇ라고도 하며, 신선의 세계를 나타낸는 도가적 용어로 북두칠성의 앞 머리 부분인 제1성부터 제4성까지를 선기(璿璣; 모든 별들의 회전축이 되는 북극성)라 하고 자루 부분인 제5성부터 제7성까지를 옥형(玉衡;해,달,금성,목성,수성,화성,토성의 운행)이라 하는데, 특히 선기의 네 개 별이 만들어 내는 네모난 공간을 자연이라 합니다.

자연과 냉천정을 마주 보고 자연 오른쪽 끝부분에서 사진을 찍으면 냉천정과 자연에 비친 냉천정 풍경을 담을 수 있는데 하늘과 물과 사물이 하나의 프레임에 담기는 모습에서 자연(紫淵; 신선 세계의 연못)을 의미를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냉천 위의 초가정

냉천정 뒤로는 작은 뜨락이 있는데, 담장 옆에 접근할 방법도 없는 원두막 같이 생긴 정자 한 채가 있습니다. 

칠궁에 모신 왕의 어미들이 조용히 거닐며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것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덕안궁 德安宮

이제 서쪽 삼문으로 들어가면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이 있습이다. 

삼문을 지나며 정면으로 덕안궁의 편액이 보입니다.

덕 있고 편안한 곳, 덕안궁 德安宮.

영친왕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후궁 순헌 귀빈 엄씨의 신주를 모셨습니다. 

순헌황귀비 엄씨는 엄상궁으로 기억하는 인물로 원래 명성황후의 궁녀였는데 고종의 총애를 받아 쫓겨났다가 명성황후가 죽은 뒤 다시 후궁으로 들어왔는데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하는 아관파천에 큰 공을 세우며 고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는데 이때 임신하게 되고 이듬해 1897년 영친왕을 낳고 귀인으로 책봉되었습니다. 

고종이 엄씨가 거처할 궁을 경운궁(덕수궁) 안에 지어 경선궁이라 칭합니다. 

1900년 순빈에 봉해졌고 이듬해 순비, 두해 뒤 황귀비, 1910년 순헌 귀비에 진봉되었다, 다음해 엄씨가 세상을 떠난 뒤 경선궁은 덕안궁으로 개칭되었는데 원래 자리는 1913년까지 태평로였으나 1929년 육상궁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덕안궁
대빈궁大嬪宮

덕안궁 뒤쪽에 세 개의 사당이 있는데 그 가운데가 바로 대빈궁이며 그 좌우로 저경궁과 선희궁(경우궁도 함께 있는)입니다.

크고 높은 후궁의 사당, 대빈궁 大嬪宮; 큰 부인이라는 의미는 내명부(內命婦)의 정1품 품계인 궁녀로서 왕비 바로 다음 서열을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 영역의 중심이 되는 사당이 바로 대빈궁인데 바로 조선 역사상 가장 큰 사고를 친 희빈 장씨의 사당입니다. 

희빈 장씨는 다른 후궁들과 다르게 정식 왕비에 오르기도 했으니, 나중에 문제가 없었다면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입니다.

예전과 다르게 서인과 남인 세력이 서로 대립하던 시절, 인현왕후를 비롯해 숙빈 최씨, 희빈 장씨의 희생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희빈 장씨에 대한 평가가 정치적 희생, 또는 궁중 암투의 피해자란 이미지도 있습니다.

대빈궁은 대빈묘와는 달리 한때 왕비였던 희빈 장씨의 위치를 조금은 기억하도록 몇 가지 장치가 있습니다. 

특히 다른 건물의 사각 기둥과 달리 둘레를 둥그렇게 깎은 두리기둥이 화려함을 더하고, 다른 건물에 비해 한 단 높은 계단과 창호의 철물들 역시 보다 격조 있게 꾸몄죠.

저경궁 儲慶宮

대빈궁 왼쪽의 저경궁은 인빈 김씨의 사당입니다.

경사스러움을 쌓아나가는 사당, 저경궁 儲慶宮 . 

원종의 어머니인데요, 원종은 조선시대 9명의 추존(追尊;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왕의 한사람으로 왕의 묘호를 갖게(추존)된 이유는 아들인 능양군이 인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원종의 어머니 역시 왕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저경궁을 지어 모실 것을 명한 왕 역시 영조로 그는 자신의 어머니인 숙빈최씨의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을 조선 왕실의 법도 안에 넣으려는 시도를 치밀하게 했던것입니다. 

인빈 김씨의 저경궁과, 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후궁인 영빈이씨의 선희궁등 자신 또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어머니들의 사후 관리를 골고루 체계적으로 함으로써 어머니 숙빈최씨의 신분 격상의 명분을 쌓아간 것이죠. 

경우궁 景祐宮 선희궁 宣禧宮

대빈궁 오른쪽 건물은 경우궁과 선희궁의 역할을 하는데 경우궁은 수빈 박씨의 사당입니다. 

큰 복이 있는 집, 경우궁 景祐宮 ; 景(경)은 大'와 뜻이 통하며, 祐(우)는 복

여기에 모셔진 인물 가운데 무난한 삶을 살았던 인물인데, 정조때 문효세자가 죽자 다시 아들을 얻기위해 후궁으로 들어가서고 순조를 낳았고 살아서 순조가 즉위하는 것을 보고 1822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건물에 모셔진 선희궁의 영빈 이씨는 경우궁의 수빈박씨와 달리 어떤 면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일 수 있습니다.


복을 널리 펴는 집, 선희궁 宣禧宮

무척 험난한 삶을 산, 숙빈 최씨, 역대급 사고자 희빈 장씨들을 생각 한다면 도대체 누구길래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죠. 

바로 사도세자의 어머니입니다. 

역사 기록에 영조에게 아들을 죽여달라고 요청한 인물로 나옵니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조는 영빈 이씨가 그렇게 요청했다는 말을 바탕으로 임오화변을 일으키죠.

그래서 영빈 이씨의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영조의 요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러한 영빈 이씨의 행동으로 혜경궁 홍씨와 정조는 살아남고, 또 왕위를 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이 영빈 이씨에게 큰 충격이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도세자의 3년 상이 끝나자마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칠궁에 머물려면 왕의 어머니여야 하는데요, 정조는 영조의 엄명에 따라 사도세자를 추존하지 못하다가 고종때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선희궁이란 사당의 이름을 얻게 된것입니다. 

수복방

원래 고종의 다섯째 째 아들 의친왕은 사동궁(현재 인사동길 중간)에 살았지만, 이승만전 대통령이 왕실가족을 내쫓고 민간에 불하하고 일부는1955년 요정 도원이 됩니다.

1960년 4.19혁명 후 의친왕의 부인인 김비가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칠궁에 살면서 사당을 지키다 1964년 의친왕비 김비 칠궁에서 별세합니다.

근근히 이석을 포함한 황실가족 30여 명이 칠궁에서 버텼지만, 1980년 전두환이 다 내쫓았습니다.


왕들의 사모곡이 어린 칠궁은 오랫동안 금단의 공간이었습니다. 

마지막 후손들의 흔적도 남아 있는 공간입니다.

더더군다나 청와대와 바로 붙어 있어서 지금도 조심스러운 곳이지만 이제는 누구라도 찾아가 볼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 옛 역사와 현대사가 고스란히 이어지는 칠궁, 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의 신주를 모신 칠궁은 또 하나의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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