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닷없는 깨달음의 순간에
살아오며 생각치 못했던 문득 다가온 깨달음에 삶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신학적 논리나 문법적 인과관계를 깨뜨리는 직관적이고 순간적인 깨우침, Epiphany 에피퍼니는 내 안에 있으나 미처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자각이요, 그것에서 벗어나 세상과 조화를 이루려는 깨달음일것입니다.
There's nothing better when something comes and hits you and you think 'yes'!
뭔가가 다가와 어떤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며 "그래!"라고 생각할 때만큼 더 좋은 순간은 없다.
- 해리포터 저자 J.K. Rowling 로버트 갤브레이스, Epiphany 에피퍼니에 대하여
Epiphany 에피퍼니는 appearance 나타남, manifestation 현현(顯顯: 환하고 명백)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epiphaneia에서 온 말로 성서에서는 하나님이 그 모습을 인간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말하죠.
카톨릭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 성공회에서는 '공현절', 개신교에서는 '주현절'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주현 主顯, 공현 公現’은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보였다는 의미로 종교적 색채가 짙은 단어입니다.
종교적 의미를 걷어내고 문학쪽에서 본다면 에피퍼니는 ‘드러나는 주님’보다는 ‘그 모습을 본 인간들의 놀라움’에 방점을 맞춥니다.
그런 깨달음, 깨우침(enlightenment)에는 (큰 사건이 아니라)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건들 속에서 깨닫는 갑작스러움이라는 전재조건이 있습니다.
에피퍼니란 개념은 영문학에서 주로, 영문학에서도 조이스를 위주로 연구되었죠.
정신적 마비상태에서 찾은 자기 발견의 순간,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현현함을 던지는 James joyce 제임스 조이스는 사물의 형상 이면을 꼼꼼히 보는 눈과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신경으로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한복판에서 여전히 중절모를 쓰고, 현미경 렌즈와 같은 둥근 안경을 끼고 짐짓 도도하게 치켜든 턱이며 걸음걸이가 삐딱한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 합니다.
그의 작품 중 Dubliners 더블린사람들에서 특히 많이 등장하고 있죠.
조이스는 당시 더블린을 영국의 오랜 식민지배의 그늘에 속박된 채 부패와 타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회로 보고, 이러한 시대의 암울한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고 삶에 안주한 채 쾌락만을 좇는 무관심한 더블린 사람들에게 어떤 경종을 울리고 싶었을것입니다.
더블린 사람들의 이러한 정신적 '마비' 상태가 조국의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했고 15편의 단편으로 묶여 있는 더블린 사람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일관된 키워드가 바로 Paralysis 마비로 15편의 단편으로 묶여 있는 더블린 사람들 중 플린 신부가 죽고 난 이후에 신부 및 그 가족들과 피상적으로 친했던 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첫번째 작품 The Sisters 자매에서부터 마지막 작품인 The Dead 죽은사람들까지 모든 단편에는 무엇인가에 '마비'되고도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Araby 아라비에서 소년이 깨닫는 장면을 두고 에피퍼니라고 설명 하고 있습니다.
이웃집 친구 누나를 향한 소년의 혼란한 성장통을 그린 이 작품은 에피퍼니를 통한 격조 높은 단편 미학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종교적 '마비'는 사람들의 정신적 붕괴를 가져오는데 After the Race 경기가 끝난 뒤에서 술과 도박이 주는 정신적 쾌락에 도취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졸부 청년 지미는 자동차 경주가 끝난 후 친구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고 취해서 카드놀이를 하는데 재미로 시작한 카드놀이가 거액의 판돈이 오가는 도박판이 되어버리고 술에 취하고 기분에 취한 젊은이들은 환각의 분위기에 빠져들며 생각합니다.
흥청망청하는 자신이 어리석고 부끄럽지만,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고, 순간의 쾌락을 제압하지 못하고 단지 그런 어리석은 기쁨에 젖어 있고 싶을 뿐인데 더블린 사람들의 정신적 피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가 보여주는 더블린의 사람들은 어리석고 나약해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쾌락에 빠져들며, 타인을 욕망하고 질투하는 존재들이면서 동시에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정신적 '마비' 상태에 빠져 있지만 더블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기회를 주고 있는것입니다.
눈은 아일랜드 전역에 내리고 있었다.
눈은 기우뚱한 십자가와 묘석 위에도, 작은 출입문 위의 뾰족한 쇠창(槍) 위에도, 그리고 앙상한 가시나무 위에도 눈은 바람에 나부끼며 수북이 쌓이고 있었다.
- The Dead 죽은사람들 중
소설의 마지막 작품 The Dead 죽은사람들에서 보여주는 눈이 내리는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아일랜드 전역에 내리는 눈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과 죽은 사람들 위로 쌓이며 마치 세상의 온갖 허물을 덮어주고 새로 태어남을 축복하는 고요하고 적막하면서도 아름답게 모습을 그리며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는 자기 발견의 순간을 이 눈을 통해 '에피퍼니'가 실현되는 상징적 장면으로 마무리 합니다.
물론 에피퍼니는 조이스의 전유물이 아니죠.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있을텐데…むらかみはるき 무라카미 하루키, 그에게 소확행의 영감을 준 작품인 Cathedral 대성당의 저자 Raymond Carver 레이먼드 카버.
사실 영화쪽은 좀 다릅니다.
영화는 아무리 작은 디테일이더라도 시작이 있으면 마무리가 되어야하는 정합성을 철칙으로하는 반면, 에피퍼니는 느닷없어야하죠.
에피퍼니의 전제조건이 영화 서사의 전제조건과 충돌이 생기며 에피퍼니는 오히려 영화의 서사구축에 위배되는 경우가 많아 일상 속 느닷없는 깨달음이 들어갈 여지는 많지 않습니다.
작은 마을에 사는 소년 네 명이 시체를 찾아 떠나는 이틀간의 여행을 담고 있는 1986년 개봉(한국에서는 2019년 개봉)한 Stand by me에서 사춘기 소년이 역경 중에 느닷없이 노루를 목격하며 마음의 평온을 찾는 장면은 영화의 극적 구성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지만, 소년 캐릭터의 감정상으론 나쁘지 않은 에피퍼니적 순간이라 할 수 있고 1982년 개봉(한국에서는 1993년 개봉)한 해리슨 포드 주연의 Blade Runner 블레이드 러너는 지루할 정도로 이미지 중심의 영화인데, 형사 데커드가 꿈꾸는 유니콘이 그 이미지의 중심에 있고, 엔딩에는 넘어진 유니콘 종이인형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데커드의 클로즈업이 있는데 유니콘 장면은 개봉 당시 삭제당했고, 엔딩의 에피퍼니 끄덕임만 남아서 어설픈 에피퍼니 엔딩이 되고 말았죠. (1992년 재개봉한 디렉터스 컷에는 이 유니콘 장면이 당당히 들어가 있습니다).
이렇게 당황스러운 무맥락의 장면이되는 영화속 에피퍼니 컷은 영화감독들이 보여주고 싶은 장면입니다.
그래서 1988년 개봉한 The Last Emperor 마지막 황제에서는 에피퍼니 컷으로 귀뚜라미 장면을 감독의 한마디를 넣기에 좋은 포인인트 엔딩컷에 배치 합니다.
에피퍼니를 제목으로 사용한 음악도 있습니다.
2018년 방탄소년단 진의 '에피파니'는 방탄소년단 정규 3집 리패키지 앨범 'LOVE YOURSELF 結 Answer' 수록곡으로, 발매 당시에도 전 세계 72개국 아이튠즈 톱 송 차트 1위에 오르며 많은 사랑을 받았죠.
이 노래 덕분에 거의 모든 초등학생들이 에피파니라는 단어를 알고 있습니다.
‘I love you’가 아닌 자신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에피퍼니, ‘I love me’
참 이상해 분명 나 너를 너무 사랑했는데 (사랑했는데)
뭐든 너에게 맞추고 널 위해 살고 싶었는데
그럴수록 내 맘속의 폭풍을 감당할 수 없게 돼
웃고 있는 가면 속의 진짜 내 모습을 다 드러내
I‘m the one I should love in this world
빛나는 나를 소중한 내 영혼을 이제야 깨달아, oh, so I love me/....
살아오며 생각치 못했던 문득 다가온 깨달음에 삶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신학적 논리나 문법적 인과관계를 깨뜨리는 직관적이고 순간적인 깨우침, Epiphany 에피퍼니는 내 안에 있으나 미처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자각이요, 그것에서 벗어나 세상과 조화를 이루려는 깨달음일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