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속 재즈를 읽으며…
이제 알겠다.
내가 언젠가 바닷가에서 그 돌멩이를 들고 있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생각난다.
그것은 일종의 달착지근한 욕지기였다.
얼마나 불쾌한 느낌이었던가!
그 느낌은 분명히 돌멩이로부터 왔다.
돌멩이에서 내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그거였다.
바로 그거였다.
손안에 느껴지는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 본문 중
이렇게 시작된 주인공의 구토 체험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됩니다.
문손잡이를 잡으면서,
타인의 얼굴을 보면서,
땅에 떨어진 종이쪽지를 보면서,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보면서,
나이프 손잡이를 잡으면서……
이러한 체험은 자신, 그가 자주 들르던 카페, 부빌 시의 공원, 급기야 이 세계 전체가 구토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주인공의 삶 전체가 되어버린 ‘구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중등교육과정에서 배워온 철학을 돌아보면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의 대표 저서는 ‘구토 La Nausée’로 바로 연결이 됩니다.
닫힌 문에 이어 당시를 떠올리며 다시한번 읽어봅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지난 세기 번역서에 이어 지난 2020년 새롭게 번역된 책이 나와서 집어 들었습니다.
사르트르는 유명해도, 사르트르를 읽어본 이는 드물죠.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프랑스의 대표 지성, 작가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지만, 명성과 인기에 비해 그의 저작, 특히 그의 문학작품은 대중들에게 의외로 낯섭니다.
고교생 필독서로, 20세기를 만든 책으로, 현대고전으로 늘 손꼽히는 작품이지만 주변에서 「구토」를 읽어봤다고 하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구토」가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근저를 이루는 작가 자신의 체험을 형상화한 작품이라서인지 난해하고 비의(祕儀; 비밀스러운 종교 의식과 같은)적이다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점이 무관하지 않을것입니다.
「구토」는 사르트르의 분신이라 일컬어지는 주인공 로캉탱의 일기를 통해 그의 삶과 고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책의 편집자 일러두기에서 이 책은 ‘앙투안 로캉탱의 서류 가운데에서 발견된 노트들을 전혀 손대지 않고 발행한것‘이라고 밝히면서 마치 탐정소설처럼 시작됩니다.
이어서 그 노트들은 로캉탱의 일기이며 1932년 1월 초 무렵부터 쓰였다는 것, 로캉탱은 중부 유럽, 북아프리카, 극동지역을 여행한 후 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연구를 마치기 위해 3년 전부터 Bouville 부빌이라는 도시에 정착해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 추가 단서로 주어집니다.
이런 앙투안 로캉탱의 일기를 들여다 보듯 자연스레 그가 체험한 구토 현상을 파악하게 됩니다.
18세기 탕아이며 음모가였던 정치가인 Marquis de Rollebon 롤레봉 후작의 전기를 집필합니다.
롤르봉이라는 인물에 대해 연구하며 점차 무의미함과 존재의 부조리함에 점점 더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로캉탱은 관념적으로 사유하지 않고 사물을 대하고 있는 인간의 시각, 촉각, 후각, 청각 등을 통하여 존재에 대한 이유를 찾고 싶어 한 그는 마비될 것 같은 심오한 실존적 깨달음의 순간을 연이어 경험하며 자신의 존재의 본질과 마주하고 존재라는 것의 본래 모습은 아무런 뜻도 이유도 없이 내던져져 있는 상태임을 알게 됩니다.
실존과 마주서는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며 이미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해 자신에게 지워진 책임을 벗어 던질 수 없습니다.
‘구토’란 이러한 모습으로 무책임하게 내던져진 존재, 이유 없는 존재들 앞에서 선천적인 감정에 충실하게 느끼는 헛구역질인것이죠.
사물과 만남 속에서 존재 의미가 흔들릴 때 느끼는 관념적인 증세.
'구토'라고 불리는 이 순간은 물리적 세계의 우연성과 부조리함,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깊고 불안한 자각이죠.
거의 마비될 것 같은 심오한 실존적 깨달음의 순간을 연이어 경험하며 자신의 존재의 본질과 마주하게 오캉탱.
이러한 과정 속에서 로캉탱은 진실하게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는가라는 질문과 마주치게 되면서 우연적이고 정당화될 수 없는 자신의 존재가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대답을 준비합니다.
사르트르는 1931년부터 약 7년에 걸쳐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근현대를 통해 활동했던 Abbé Prévost 아베 프레보, Honoré de Balzac 발자크, Stendhal 스탕달, Gustave Flaubert 구스타보 폴로베르, Andre Paul Guillaume Gide 앙드레 지드, Marcel Proust 프루스트, Hector Malot 말로, Céline 셀린, Franz Kafka 카프카, John Dos Passos 더스패서스, William Cuthbert Faulkner 포크너, Ernest Miller Hemingway 헤밍웨이등 작가들을 섭렵하며 「구토」에 수많은 소설 기법들을 망라했습니다.
소설은 내성적이고 철학적인 성격이 특징으로 내러티브는 매우 주관적이며, 독자들을 로캉탱의 내적 경험과 실존적 위기에 몰입하게 합니다.
결말 부분에서 로캉댕이 강박적으로 재즈 Some of these days를 듣는 장면을 통해 사르트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 곡은 의미가 사라진 세상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모든 환멸을 승화시킨 노래로 읽힙니다.
소설 첫 부분에서부터 음악의 굳고 튼튼한 구조에 반하고 그 속에서 어떤 필연적인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재즈의 유동성과 정서적 깊이는 주인공이 느끼는 소외감과 메스꺼움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의미에 대한 실존적 탐구를 강조합니다.
사르트르는 재즈 음악과 흥미로운 관계를 맺었으며, 이를 철학과 문학 작품에 접목하여 감상했습니다.
전후 파리에서 재즈는 반항과 자유의 의미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재즈는 지식인과 예술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며 기존 규범과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르트르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재즈를 실존주의 사상의 핵심인 자유와 부조리를 구현하는 인간 조건의 표현으로 보았습니다.
소설 「구토」에서 묘사되는 재즈는 모순투성이고 대단히 복잡해 순수한 본질인 음악에 재즈라는 불순물이 섞였기 때문에 피아노의 자리를 보다 개성 강한 색소폰에 내어 줍니다.
순수 음악에 대한 욕구는 로캉탱의 마지막 변신이 그의 욕구는 사르트르가 순수 의식을 주입함으로써 해결됩니다.
역겨움, 불안감은 정화되고 가쁜 숨은 진정되고 음악이 남습니다.
결국 예술을 창조하는 일만이 자신을 절대적 경지로 들어서게 하여 존재한다는 죄악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여깁니다.
소리나 말이 필연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어떠한 우연도 끼어들어갈 수 없는 세계.
전반적으로 사르트르와 재즈의 관계는 실존주의 철학과 자유와 진정성에 대한 문화적 표현 사이의 상호 작용을 강조합니다.
즉흥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한 재즈 음악은 사르트르가 철학과 문학 작품에서 탐구한 실존주의적 주제에 대한 풍부한 은유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Some Of These Days
- Fletcher Henderson and His Orchestra
https://youtu.be/Pm1gERNWBRY?si=HEOChnqBFYjxXZWf
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 그러면 그 소설을 읽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앙투안 로캉탱이 이 책을 썼어. 카페에서 빈둥대던 빨간 머리 친구지.”
그리고 내가 이 흑인 여자의 삶을 생각하듯 내 삶을 생각할 것이다.
귀중하면서도 반쯤은 전설적인 무언가를 생각하듯이 말이다.
(…) 내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이 완성되고, 내 뒤에 놓일 때가 올 테고, 그것이 발하는 약간의 빛이 내 과거 위에 떨어지리라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그 책을 통해 나의 삶을 혐오감 없이 떠올릴 수 있으리라.
- 본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