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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Coffee break

coffee break…제사(차례)=조상숭배(?)

; 풍성한 한가위, 관대한 사랑으로…

by Architect Y

고등학교를 개신교 미션스쿨을 나온 후 지금까지 줄곧 개신교 크리스쳔으로 살아가며 망가지고 있는 개신교를 개탄하며 문제점들을 원론적인 측면으로 보곤 합니다.

개신교 내부 문제가 되는 십일조는 제외하고 교회내에서도 암암리에 행해지는 술 문제도 접고 오늘은 조상 제사에 대한 생각을 해 봅니다.


몇해전 종교에 대한 글을 쓰며 유학은 종교가 아니라는 생각을 피력 했는데 그 이유중 가장 큰 것이 숭배할 신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유교가 종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중국에서 활약한 Matteo Ricci 마테오리치와 같은 Society of Jesus예수회의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공자나 조상에 대한 제례행위를 종교적 행위로 간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는데, 마테오리치는 보다 폭넓은 포교를 위해 유학은 종교가 아니므로 제례행위는 우상숭배를 금하는 기독교 교리와 충돌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Dominican Order 도미니크수도회와 Franciscan Order 프란체스코회의 선교사들은 유교는 종교이므로 제례행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논쟁은 선교사들 내부의 쟁점에 불과했죠.

1893년 만국종교회에 중국 대표로 참석한 彭光譽팽광예는 유학은 종교가 아니라 학문이며 유학 이전 시대의 무속신앙과 후대에 나온 도교및 불교는 종교에 속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중국인들의 유학에 대한 자부심을 여실히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듬해 청일전쟁에서 패한 뒤 서구 과학기술의 위력을 절감하고 강한 중국을 위해 서양의 기독교와 같은 강한 정신력이되는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變法自彊運動변법자강운동(혹은 戊戌變法무술변법)을 일으킨 캉유웨이康有爲는 공자를 인류 최고의 교주이자 神明成王신명성왕이라 칭하며 명칭도 기독교를 흉내내 孔敎공교로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우스꽝스럽게도 유학이 유교로 변한것은 이러한 정치적인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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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캉유웨이의 제자인 梁啓超양계초는 변법이 실패하자 유학이 종교가 아니라는 쪽으로 돌아 섰습니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 칸트를 공부하고 돌아온 蔡元培채원배는 처음엔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가 신해혁명후 초대 교육부 장관으로 부임하면서 반대쪽으로 선회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지식인 대부분이 종교가 아니라는 의견이 대세로 작용하고 유학이 봉건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며 다시금 유학의 종교논란은 다시 불붙지만 여전히 종교가 아니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구한말이후 이러한 논쟁이 일기는 하였으나 유교의 종교화운동은 실패하고 유학 자체도 서서히 고사해 갔습니다.

1995년 성균관유도회는 유교제도개혁이 중심이 되는 종헌을 제정하였는데 명칭을 「성균관유교회」로 바꾸고 공자를 교주로 「四書五經사서오경」을 경전으로 삼는 사실상 유교의 종교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오늘은 이 부분이 주제가 아니라 여기까지)

어쨌든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전개되며 20세기에 들어서며 갑자기 학문이 종교로 탈바꿈한것이죠.


개신교가 주장한 부분은 바로 조상을 신으로 간주해 우상숭배하는것이 제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조상 제사는 동아시아 전통문화의 핵심 제도로, 단순히 “음식을 차려 올리는 풍습”이 아니라 가족·국가·우주의 질서를 연결하는 의례로서 발전해 왔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으면서, 제사를 유교적 예(禮)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종교적 신앙을 배제한 윤리, 제도에 관한것입니다.

단지 민간에서 샤머니즘이 믹스되면서 죽은 자를 신명으로 받아들이고 현실적 효험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이는 분명 유학의 입장이라기보다 전통 샤머니즘과 조선 전 삼국시대에 전래되고 국교화된 고려의 영향으로 유학이 불교와 믹스된 모습을 보였기때문입니다.

그 예로 지금은 개신교인들도 이를 따르는 사후 49재는 유학을 개념이 아니라 불교의 이론이라는것입니다.

만약, 정말 유학을 생각한다면 3년상이나 이를 축소한 100일 탈상이 맞는것입니다.

물론, 3년상도 잘못알려져 36월로 알고 있는 이가 많은데 정작 공자가 생각한 시간은 햇수로 산정해 14월입니다.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인물입니다.

늘 군역으로 끌려가서 살던 민초들에게 상을 핑계로 3년간 집에서 집안을 돌보라는 인본적인 생각에서 기인 한것입니다.(왕도정치)

뿐 아니라 공자는 상례에는 살아온 시간에 대한 망자에 예로 집중했지만 정작 죽은자에 대한 제사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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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能事人 焉能事鬼 미능사인 언능사귀

未知生 焉知死 미지생 언지사

- 論語 先進 논어 선진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

공자는 분명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불가지론 또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현실의 삶에 대해서 더 치열하게 궁구(窮究:속속들이 파고들어 깊게 연구함)하느라 죽음에 대해서는 궁구할 겨를이 없다는 뜻입니다.

타 종교에 비해 유학은 죽음보다는 삶을 훨씬 더 중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교적 성리학에서는 죽은 자를 실제 존재하는 신적 존재라기보다는, 기氣가 흩어져 남긴 흔적을 기리는 의미가 강했습니다.

공자도 제사는 마치 조상이 여기 있는 것처럼 한다(祭如在)라고 했는데, 이는 실제로 조상이 와서 음식을 먹는다는 신앙이라기보다는 상징적 태도를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성리학 국가로서의 조선은 「죽은 자=신적 존재」 라는 종교적 믿음을 최소화했습니다.

대신, 제사를 효孝와 가문 질서를 실천하는 윤리적 장치로 강조했어습니다.

「주자가례」 를 근본으로 삼았고, 주자는 조상을 신격화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제사는 종교적 숭배라기보다 도덕적 예절로 규정되었습니다.

즉, 조선의 제사는 종교라기보다는 윤리적 예절로 제도화되었으나, 실제 생활 속에서는 종교적 색채가 혼합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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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크리스쳔인 카톨릭의 경우, 조상 제사에 대해 여유로운 포용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1939년 비오 12세 교황이 “제사는 종교적 숭배가 아니라 효의 표현”이라며 허용으로 전환한 이후, 현재 한국 천주교는 추모, 효의식으로서의 제사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개신교의 경우, 19세기 후반 한국 선교 당시, 개신교는 조선의 성리학적 가부장 질서를 “우상숭배”와 연결해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조상 제사 = 신앙적 행위로 규정했기 때문에,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선교사들은 제사를 거부하고 대신 「추도예배(추모예배)」 라는 형식을 도입해 제사상 대신 예배당이나 가정에서 기도·성경봉독·찬송으로 고인을 기리는 예식을 가지며 조상 숭배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며 고인을 추모하는 의례로 강조한것입니다.

따라서 개신교 신자들은 전통 제사 참여를 거부했고, 이 때문에 가족 내 갈등과 사회적 마찰이 매우 심했습니다.

그렇다면 유독 개신교는 유학의 조상제사를 배척하고 있는것일까요?


보수적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성경적 근거를 보면 출애굽기 20장 십계명 부분에거 제1,2 계명인 ‘다른 신들을 주지 말라’와 ‘우상을 만들지 말라’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신명기 18:10–12에서 이방인의 조상·영혼 숭배가 반복적으로 비판되고, 예수 이후 신약성경에서도 죽은 자는 다시 오지 않는다 [히브리서 9:27]라고 죽은자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며 이를 뒷바침하고,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 고린도전서 10:20]이라며 일관된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괄적으로 우상숭배로 단정하는데는 앞에서 언급했듯 조선 성리학적으로는 제사가 효와 예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 주장이 모호해지고 한국 사회에서는 효의 부정으로 비춰지기도 하고 카톨릭의 주장에 근거의 주장이 모호해집니다.

그럼에도 개신교의 주장은 실제 종교적 주장을 넘어 심리적, 정치, 사회적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불교, 가톨릭)와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 제사 거부를 ‘신앙 순결’의 상징으로 삼고 신앙 안에서 제사에 참여하면 ‘배교’로 낙인 찍히거나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은 스스로 신앙 정체성을 지키려는 강박으로 이어지고 초기 한국 개신교는 강한 종말론 의식(세상과 단절, 오직 하나님 나라 지향)을 가짐으로 제사는 세속 질서와 결탁된 ‘우상숭배’로 심리적 거부감 강화하였으며 제사 거부는 곧, 우리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라는 구분선이자 자기 정체성 유지 장치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일제 강점기, 일본은 신사참배를 강요(유교(?)적 제사와 유사한 국가 의례)당하며 개신교는 이를 신앙 자유 침해이자 우상숭배로 규정, 강하게 저항한 이후 ‘제사 반대’가 곧 ‘순수 신앙’·‘저항 정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사실 이때 신사참배한 교단이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의 중심이죠).

여기에 개신교는 서구 문명과 함께 들어오며 ‘근대화·합리화’와 결합하여전통 의례(제사)를 미신, 비합리로 규정, 근대 국가 건설과 맞물려 배격한것이 20세기 중반 이후 개신교는 보수 정치 세력과 결합하여 전통문화 일부를 비판하고 서구식 질서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영향력 확대한것도 한몫했습니다.

제사는 가부장 권위의 핵심 의례였기에 개신교 가정에서는 제사 거부를 통해 전통적 가부장 권위를 약화시키고, 대신 교회 공동체 중심으로 가족 질서를 재편하려는 내부적 이유도 존재 합니다.


이 주장은 크리스쳔 스스로에게 자기 정체성 확립, 신앙 순결 유지라는 자부심부여, 교회 공동체 결속 강화할수 있지만 심리적 압박과 고립감이나 한국 사회 전통문화와 단절, 정체성 혼란을 야기 할 수 있고 크리스쳔들의 지상 목표인 복음전파에 전도 대상자들에게 기독교의 독특성, 일관성 강조하며 순결한 신앙이라는 매력을 어필할수는 있지만 가족 반발로 전도 어려움을 겪게하거나 한국 전통 가치(효, 가문)를 무시하는 종교로 인식되며 선교 거부 반응 유발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차세대인 Gen Z에게는 전통 의례에 대한 거부감(형식주의·가부장제 비판)과 맞아떨어질 수도 있지만 그 보다 절대적 금지 태도가 ‘배타적’·‘시대착오적’으로 보이고 유연성과 다양성을 중시하는 Z세대 가치와 충돌하며 전통·문화적 뿌리와 단절, 정체성 혼란 초래하게 됩니다.


제사의 의례적 행위(절, 제물 올림)를 종교적 숭배가 아니라 예禮로 본다면, 이는 성경적 신앙과 반드시 모순되지 않고 조상에게 제사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님을 받아들여야하고 선교학적 입장에서 복음이 뿌리내리려면 토착문화와 조화를 이뤄야한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것입니다.

과거, 로마에의해 기독교가 세계의 종교로 거듭난 모습을 생각한다면!


2,000년전 모든것을 희생하며 모든것을 포용하며 전파한 관대한 사랑이 옹졸함으로 희미하게 흐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한가위를 맞이하는 한 크리스쳔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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