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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건축가 건축 이야기 I 세운상가

개발독재와 김수근의 만남, 해결책 없는 거장의 신화

by Architect Y

하와이 알라모어를 능가하는 세계 제1의 쇼핑센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보다 많은 수용인구

서울이라는 바다에 뜬 아파트라는 이름의 배


찬양하듯 추켜세웠던 세운상가 준공 당시 미디어들의 머릿기사들이다.

한국건축을 이야기 할때 정말 지겹도록 거론되는 이름이 1세대 양대스타 건축가인 김수근과 김중업이다.

두명중에서도 더욱 많이 알려진 사람은 단연 김수근.

김수근을 모를 수 있어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김수근의 건축을 접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공간사옥, 경동교회, 불광동성당을 비롯해 대형건축물로는 잠실올림픽주경기장,체조경기장, 서대문경찰청, 서초동법원청사, 경복궁역 등등 이루 열거하기도 벅차다.


대한민국 최고의 위대한 건축가라는 김수근의 세운상가.

그러나 위대할 것이라고 믿는 이 건축가의 건축이 도시안에서는 B급인데도 당시 우리는 이런 김수근의 건축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가 설계한 것은 다 명작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최고의 건축이어야 할 그의 건축은 주변의 무수한 B급, C급 건축을 양산해 왔다.

거장의 신화에만 안주해온 건축계의 타성이 묻어나는 듯하다.

아직도 대한민국 건축의 신화처럼 받드는 수 많은 추종자들에게 돌팔매를 맞을 이야기지만 한다.

김수근의 세운상가는 도시의 생태계의 난입자라는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대지 16,308sm (4,933평)

연면적 205,898sm (62,284평)

2000개가 넘는 점포와 호텔객실 177개,

주거용 아파트 851채.

1인당 국민소득이 144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만들어낸 주상복합건축물의 효시이자 집합건축프로젝트의 원조.

세운상가는 「박정희-김현옥-김수근」 체제가 낳은 대표적 조형유산이다.

비루한 현실로부터 탈출을 욕망하던 당대의 집단무의식이 군인출신 행정가의 직설화법을 통해 민자건축물의 이름에까지 투영된 것다.


1930년대 세운상가의 터는 일제가 공습을 피할 수 있는 소개도로였지만 방공호로 만들면서 당시에 거주하던 민중들의 집들을 부수었다가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피난민들의 판잣집으로 가득 차게된다.

그리고 곧이어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집을 나선 딸들은 이곳에 정착하여 '종삼'이라 불렸던 유곽(성매매촌-편집자 주)을 이루었다.

폭 30~50m에 이르는 넓은 길.

이 소개도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종묘 앞에서 퇴계로 필동까지 종로-청계천-을지로를 관통하는 넓은 길이었다.

이 길이 단숨에 새로운 거대 건물군으로 바뀌게된것은 김현옥 서울시장이다.

군 출신이었던 김현옥 시장은 군사 쿠테타로 나라를 빼앗아 독재정권을 세운 박정희 전 당시 대통령의 핵심 충복으로 군사작전을 벌이듯 서울시를 미친듯이 개조해 불도저란 별명을 얻었다.

김현옥시장은 재임시절 서울의 여러 산꼭대기에 시민아파트를 한꺼번에 무려 400여채나 지었는데 평지를 놔두고 불편한 고지대에 아파트를 지은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이 쉽게 볼 수 있는자리에 지어야 자신이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는지 알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그의 측근들은 증언한 바 있다.

그렇게 무모하게 정책을 추진하는 바람에 결국 마포에 지은 와우아파트가 짓자마자 붕괴되는 최악의 사고가 벌어졌고 그는 서울 시장에서 물러나지만 그 뒤 바로 내무부 장관으로 영전되었을만큼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다.

이 불도저 시장이 시민 아파트와 함께 가장중요하게 추진했던 사업이 세운상가를 짓는 재개발이었다.

세운상가는 처음의도는 실로 그럴듯해 보이는 프로젝트였다.

건축적으로는 대형 건축물로 도시를 바꾸자는 현대 모더니즘 건축의 이상을 실현하려는것이었다.

아래는 상업시설로, 위는 고급 아파트인 복합건물 여덟채를 지어 서울의 대 동맥인 종로, 청계천, 을지로, 퇴계로를 잇는다는 거대한 구상이다.

이 종삼이라 불리운 유곽은 익히 잘 알고 있듯이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에 의해서 지금의 이른바 '미아리 텍사스'로 옮겨가게된다.

근 일세기 동안 세운상가 터는 일제에 의해서 동족간의 전쟁에서 그리고 조국근대화의 사명을 받은 개발주의자들에 의해서 민중은 쫓겨나고 다시 돌아오는 치열한 민중의 역사가 녹아들어 있는 공간이다.


설계자 김수근, 당시 나이 35세.

일본 신사를 모방했다는 논란을 일의킨 부여박물관으로 커다란 홍역을 치렀던 바로 그 김수근이었다.

부여박물관이 왜색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바로 그 즈음에 김수근은 탁월한 정치능력으로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 들어서는 이 엄청난 일감을 따냈다.

그리고 모더니즘 건축의 이상을 교과서적으로 실현하는 설계를 한다.

건물 맨 아래층은 모두 길로 비워차들이 다니게 하고 사람들은 2층 공중보도로 다니게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고 한 축으로 늘어선 상가 건물들을 공중보도로 연결해 사람과 차가 완전히 분리되어 교통을 원활하게 하는 동시에 보행자들은 2층에서 거리를 내다보며 안전하고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등장한 개념이었지만 국내에선 한번도 시도된적 없는 이 개념을 세운상가가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김수근은 초대형, 최고급 프로젝트엿던것 만큼 아파트 중간을 빈 공간으로 처리해 개방감을 극대화하고 옥상에는 다양한 조형물로 치장하는등 많은 정성을 쏟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힐때여서 쉽지 않은 계획이었지만 김현옥 시장은 민간자본을 유치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서울을 새롭게 개조한다는 야심을 성사시킨다.

그리고 1966년 9월8일 세운상가 A지구 기공식에서 세상의 기운이 다 모여라라는 뜻으로 직접 세운상가라는 이름까지 지었다.

행사장을 찾은 서울시장 김현옥이 붓으로 세운상가라는 휘호를 써 증정했던 것인데, 세계 世의 기운 運이 모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다.

그의 바람대로 세운상가는 국내 최고급 주거단지로 화려하게 출발 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세운상가는 서울 구 도심을 살리기는커녕 종로에 치명상을 입혔다.

너무 큰 상가 건물이 동서로 이어지는 종로, 청계천, 을지로, 퇴계로를 남북으로 관통하면서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양쪽에 극심한 단절이 생겼다.

서울에 가장 중요한 핵심부에 세운상가란 건물이 폭탄처럼떨어져 주변이 초토화된것이다.

지금도 세운상가 양 옆은 허름하고 낡은 저층건물들이 상가를 중신으로 정확하게 대칭꼴로 슬럼가를 형성하고 있다.

거의 한국전쟁 직후의 모습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40년동안 낙후된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것이다.

대형건물이 들어설때 주변에 미치게 될 영향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무조건 도심에 폼나는 건물을 만들고자 밀어 붙인 전시 행정이 만들어낸 참혹한 결과다.

이론적으로 그럴듯한 공중보도도 무용지물이었다.

굳이 땅위를 놔두고 건물위를 올라가 삭막한 시멘트길을 걸으려는 사람은 없었던것이다.

차들이 주로 다니도록한 건물 아래 통로 역시 어둡고 살벌한 동굴같아서 기피공간이 되어 버렸다.

한동안 전성기를 누렸던 세운상가는 이 후 도시안에서 고독한 섬이 되었다.

그라고 70년대에 들어오면서 동부 이촌동 한강 맨션 아파트, 여의도 시범 아파트 등 대규모 중산층 아파트들이 생기면서 주민들은 속속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해 나갔다.

주거지로선 실패했지만 세운상가는 한국 최대의 전자상가로 자리잡는듯 했다.

그러나 동시에 서울에서 가장 음습한 곳으로 전락한다.

각종 포르노 해적판을 사고차는 곳이자 몰래카메라, 도청장치, 도박용품등 온갖 불법 물건들이 유통되는 곳이 세운상가였다.

전자 상가로서 전성기도 오래가지 못했다.

용산에 훨씬 더 큰 전자상가단지가 들어서면서 세운상가는 급속도로 침체되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세운상가는 충분한 고찰없이 막연하고 검증 안된 이론 만으로 건축과 도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당연한 진리를 처절하게 반면교사로 가르쳐준 건물이었다.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건물과 도시, 건물과 건물, 건물과 인간 사이의 유기적이고 건강한 순환 관계다.

거대한 건물 하나 잘못 들어설때 도시의 기본인 이 세가지 층위의 관계가 모두 망가진다는것을 세운상가는 잔인하게 입증했다.

그 대가는 실로 크고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무지막지한 삽질정신의 시장과 이상만 가득했던 30대 건축가의 실험은 서울에 씻기 힘든 흉터를 남겼다.

세운상가는 지어진지 불과 20년쯤 지났을때부터 흉물취급을 받으며 다시 재개발 해야한다는 지적이 이어졌지만 해법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실제 전국 대학 건축학과에서 도시계획 수업시간에 가장 많이 과제로 다뤄지는 건물이 세운상가 였다.

결국 서울시는 2008년 연말 세운상가 철거를 시작하였다.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회색 괴물이 된 상가 여덟개 모두를 헐어버리고 대신 녹지를 조성해 종묘부터 남산으로 이어지는 녹색축을 만들겠다는 또 다른 야심찬 계획을 내놨다.

그러나 오세훈 시장의 계획은 녹지축 주변에 건물을 지을 소유주에게 보다 높은 빌딩을 짓게 배려해 주는 대신 녹지조성비용을 부담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름만 녹색축일뿐 실제로는 녹지공원 양측을 빌딩 숲으로 만들어 이 일대를 다시 한번 망칠 가능성이 높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논란속에서 세운상가가 완전히 철거됐고 그 자리에는 작은 고원이 먼저 들어섰다.

하지만 녹지축사업의 성사여부는 다시 불투명해진 상태다.

막대한 비용이 들고 효과도 불투명한 계획 대신 철거하려던 건물을 리노베이션 하는것이 경제적으로 더 효과적이며 오락가락 행정으로 고통받는 입주 상인들도 보호 할 수 있는 있는 대안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어서.

그 사이에서 서울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세운상가는 반세기 가까이 도시를 옥죄며 괴롭히고 있다.

잘못된 도시계획은 이처럼 지독한 것이다.

그래서 더욱 신중해야 하고 더욱 고민해야 한다.

세운상가는 토요일 오후 김수근 선생이 갑자기 불러 맡긴 과제였는데,

며칠만에 계획안을 정리해 드리면서 사업이 시작됐다.…

시장이 당장 그려오라고 해서…

건축적으로 그만큼 성의가 부족했고…

나도 그 근처를 좋아하지 않았다. - 윤승중(당시 세운상가설계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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