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환단고기의 진실은 04
책 안에서 두 가지 기록 발생 또 다른 근거는 환단고기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백성들과 더불어 산업을 다스리니 한 사람도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이가 없었다
학교를 세워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가 크게 진보하여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
이 두 문장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나오는 부분이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사람인 행촌 이암이 썼다고 서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단군세기에 나오는 '산업'이나 '문화'와 같은 용어는 근대에 등장한 것으로, 고려시대에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뿐만 아니라 환단고기 곳곳에는 '국가'와 '인류', '전세계', '남녀평등'이란 말이 등장하는데 이런 기본적인 용어가 네 명의 저자들이 살았던 신라와 고려, 조선시대와 맞지 않는다다.
이런 용어의 문제 말고도, 여러가지 측면에서 환단고기를 사료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 근거는 먼저 다른 책을 베낀 흔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라가 형이라면 역사는 혼이다.
-단군세기 서문
환단고기에 나오는 이 문장은 박은식의 <한국통사>에서 나오는 대목과 일치한다.
나라는 형체요 역사는 정신이다.
이것은 환단고기가 네 권의 책을 그대로 묶은 것이 아니고 편찬자가 가필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고구려 연구회의 박찬규 박사는 환단고기에 나타나는 고구려 관련기록을 다른 사서의 기록과 비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환단고기의 기록 중에서 많은 부분이 다른 사서와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다.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또한 환단고기에서는 찬란한 역사를 강조하다보니 지금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기록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단군조선 시대의 인구.
호구를 조사해보니 모두 1억 8천만 구였다.
환단고기가 사료적인 가치가 없다고 보는 또 하나의 근거는, 이 책이 역사책보다는 경전에 가깝다는 것이고.
특히 태백일사의 <삼신오제본기>와 <소도경전본훈> 에서는 종교적인 경전의 색채가 강한 대목이 많다.
소도경전본훈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천제님이 가라사대 너희 5가와 중생들아! 저 푸른 것이 하늘이 아니며 저 까마득한 것이 하늘이 아니니라.
하늘은 얼굴도 바탕도 없고 처음도 끝도 없으며 위아래 사방도 없고 겉도 비고 속도 비어서
어디나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무엇 하나 싸지 않은 데가 없느니라.
이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에는 천부경과 삼일신고에 실려있다.
이러한 천부경는 대종교의 핵심교리이고 삼일신고는 대종교의 경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단고기를 역사책으로 보기에는 종교적인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편찬자가 가필한 흔적이 나타나는 점,
다른 문헌과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점,
책의 성격이 불분명하다는 점 등 때문에 사료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환단고기를 둘러싸고 진위논쟁, 가치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최근 상고사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 상고사의 화두는 단연, 단군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이 단군을 둘러싸고 신화로 볼 것인가, 역사로 볼 것인가라는 논란이 새롭게 일고 있다.
이렇게 단군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는 것은 환단고기를 둘러싼 논쟁과도 비슷한 면이 많다.
이러한 환단고기 논쟁의 바탕에도, 상고사 열풍의 핵심에도 단군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단군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인식이 나타나게 된 배경, 그리고 최근에 나타난 현상을 다음에 마지막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999년 여름 몇 몇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교정에 세워진 단군상의 목이 잘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었다.
표면적으로 이 사건은 종교계의 갈등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은 단군에 대한 혼란된 인식때문이다.
단군상을 건립하는 것에 대해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었다.
단군이 역사적인 인물로 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단군상을 건립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단군에 대해서 이렇게 신화와 역사라는 두 가지 시각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금세기 초만 해도 단군에 대한 인식은 비교적 통일되어 있었다.
그것은 1900년대 초반에 발행된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교과서에는 고조선을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국조로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고조선 역사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이 교과서에는 단군의 초상화는 비롯해서, 고조선과 삼한의 지도가 실려있다.
1900년대 초까지 단군에 대해 뚜렷한 역사의식이 나타나는 것은, 조선시대까지 단군은 역사적인 실존인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조선의 역대 왕들이 단군을 국조로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까지만 해도 역사적인 존재였던 단군이 신화로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는 일제의 상고사 말살 정책 때문이었다.
일제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우리의 역사를 축소하는 일이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서 일제는 조선사편수회 사업이란 이름으로 서적을 색출한다.
1910년 11월부터 14개월 동안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책이 무려 51종 20만권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 거두어들인 책은 모두 사라졌다.
그 후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신화로 축소됐고 아직까지 완전하게 역사로 인정받고 있지 못한 상태다.
최근 잃어버린 상고사를 회복하고 신화로 머물러 있는 단군을 역사로 받아들이려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의 중심에 시인 김지하씨가 있다.
이런 상고사회복 운동에 대해 한쪽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민족주의, 국수주의라는 비판이 일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도 사실이다.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그리고 학문적인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단군은 역사와 신화 사이에서 끊임없이 표류할 것이다.
환단고기 열풍의 이면에는 이처럼 단군과 고조선을 역사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의 열망이 잠재해있다.
그렇기 때문에 1980년대 환단고기가 알려진 이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며 끊임없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고.
그러나 일반인들의 이런 관심과는 달리 학계에서 환단고기를 대하는 반응은 냉담하다.
많은 학자들이 환단고기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다.
환단고기를 신봉하는 재야사학계에서는 이 책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기존 학계에 대해서 불만을 감추지 않다.
이런 학계와 재야사학계 간의 대립은 이미 1970년대 상고사 파동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재야사학계에서는 단군을 역사상의 인물로 규정하고 기존의 국사학계를 일제 식민주의 사관파로 비난했다.
일명 단군파동이라고 하는 이 사건은 1978년에 법정으로까지 비화됐다.
그리고 1980년대 환단고기가 등장하면서 양쪽의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지게 된것이다.
환단고기에 대해 학계에서는 학문적으로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환단고기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있다.
그들이 열광하는 것은 실증적인 역사가 아니라 믿고 싶은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상고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나타난 갈증이기도 하다.
앞에서 언급한것처럼 최근의 사서의 재분석을 통해 환단고기는 재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억측인 부분이 전무하다고는 단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배워온 상고의 역사는 식민사관에 의한것임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