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나. 실학자(?) 정약용 6/7
정조와 다산
; 결코 뜻을 같이 하지 못한 군신의 미화
다산의 與猶堂全書여유당전서의 내용 중에는 정조의 명을 받은 다산은 수많은 연구 끝에 <城說성설>과 같은 공사계획서를 꼼꼼하게 썼고 그것에 따라 화성을 건축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자연스레 다산이 정조의 측근으로 정책과 이념이 서로 부합했다고 배워왔다.
성설의 내용 중 일부를 보면…
臣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華城화성을 쌓는 일은 비용이 많이 들고 일이 번잡하며 시기는 어려운데 일은 크게 벌여 놓았으므로
聖上성상께서는 근심하며 애쓰시나 조정의 의논은 통일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초 시작할 때 계획을 치밀하게 하여야 하므로 신은 삼가 전에 들은 것을 간추려 외람되나마 어리석은 견해를 진달합니다.
그 조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푼수(分數). 2. 재료(材料). 3. 호참(壕塹). 4. 축기(築基). 5. 벌석(伐石). 6. 치도(治道). 7. 조거(造車). 8. 성제(城制)인데,
거제(車制)에 관해서는 약간의 도식을 사용하여 성상께서 보기 편리하게 하였습니다.
신은 송구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 <城說성설> 양홍렬 박소동 김윤수 (공역) 1983
우선 다산이 화성건설의 총 책임자 였다는 이야기를 하자면…
수원성은 1794년 1월 착공, 1796 10월 완성되었다.
다산은 1794년에는 암행어사로 경기 지역의 민정을 시찰하러 다니었고 1795년에는 동부승지였으니 정3품 堂上官당산관이었다.
급격히 승진한 것으로 보아 수원화성에 적극적인 찬성론자로는 볼 수 있지만 형의 천주교 사건으로 충청 금정찰방(종6품)로 좌천된다.
그러니 총 책임자일 수 없었다.
그럼 정조와의 관계는 어떨까.
위의 성설에서는 비굴할 정도로 낮추며 아부성의 글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암행어사 당시 민생은 참담하였다.
그래 기 막힌 글을 남겼다.
암행어사가 되어
시냇가 허물어진 집 뚝배기와 흡사한데 겨울바람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다
묵은 재에 눈 덮인 아궁이는 차디차고 체 눈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비쳐드네
집 안의 물건은 쓸쓸하기 짝이 없어 모두 팔아도 7,8 전이 안 된다오
개꼬리 같은 조 이삭 세 줄기 걸려 있고 닭 창자 같은 마른 고추 한 꿰미 놓여 있네
깨진 항아리는 헝겊으로 발라 막고 무너 앉는 시렁대 새끼줄로 얽어맸네
….중략….
오호라! 이런 집이 천지에 가득한데 구중궁궐 깊어 어찌 다 살피랴
직지사는 한나라 때 벼슬, 고을 수령을 마음대로 내쫓거나 죽였지
폐단의 근원 어지러워 바로잡히지 않고 공수, 황패 나와도 뿌리 뽑기 어려우리
송나라 鄭俠정협의 流民圖유민도 본받아, 새로운 시 한 편 베껴 임금님께 돌아갈까.
이글만 읽고 있으면 다산은 민중을 생각하는 훌륭한 관리가 되는 것이다.
민생이 파탄인데, 왕은 엄청난 토목공사를 한다.
당연히 말려야 한다.
그런데, 왕에게 올리는 글은 전혀 다르다.
앞서의 글을 통해 다산은 노비제도의 폐지를 반대 했다고 이야기 했다.
정조의 노비관은 어땠을까.
실로 그 근원을 궁구해 보면 그 노비라는 이름을 싫어하고 사람들도 그들과 어울리기를 부끄럽게 여겨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때를 놓침으로써 인륜의 도리가 막히는 데 연유하는 것이다.
누적된 폐단을 흔쾌히 없애 주는 것은 오직 그 노비라는 이름을 없애 주는 데 있다.
그러나 노비라는 두 글자는 곧 우리 箕聖기성 (箕子기자를 말함) 이래 수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법으로 명분의 큰 한계가 담겨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이름을 없앤다면 私賤사천들도 다 본떠 행하려 하여 마침내는 명분이 싹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 이름을 없애는 것은 그래서 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이에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奴노에게 신공을 지우는 폐단도 의논해서는 안 될 것이란 말인가.
양역에서 황구와 백골에 징수하는 것은 그래도 閑丁한정에게 책임 지워 받아 낼 수 있지만 저 노비는 이 숫자만큼만 있어서 액수와 노비안이 서로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논의를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 놓아둔다면 절대 이럴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한두 가지 생각해 볼만한 것이 있다.
- 홍재전서 제33권, 奴婢貢노비공의 폐단을 혁파하는 데 대하여 묻는 하교.
정조는 노비라는 명칭까지 없애고자 하였다.
그럼 대충 결론이 난다.
다산은 결코 정조와 생각이 같지 않았지만 그의 정치력(?)이 정조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정조 이야기 붙여본다.
정조는 조선의 오랜 질병을 몰랐다.
그는 성군이 되고자 수원성을 지었다고 하지만 축성의 계기는 사도세자의 묘지를 수원 花山화산의 顯隆院현륭원으로 이장하고는 출입이 용이하다고 수원화성을 쌓았다고 한다.
아무리 왕이라지만 자신의 효행을 돋보이게 하려고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임은 멍청한 짓이었다.
더군다나, 다산의 글처럼 민생이 파탄상태라면…
후대 학자들의 설에 의하면 방어에 유리하게 각종 고안을 하였다고 하나 조선은 이 성에서 전쟁 한 번 치르지 못해 보고 망해 버렸다.
왕권의 회복을 위해 노력을 한점과 책을 많이 지은 호학군주라는 점은 인정하나, 민생은 도탄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그들만의 리그를 펼친 그런 왕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홍제전서>는 정조 이산이 쓴 책으로 184권 100책이나 된다.
<퇴계전서>는 51권 31책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