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해지는 피맛골의 추억 하나, 무교동 낙지
종로통을 돌아다녀본 사람은 피맛골이라는 말을 익히 들어봤을것이다.
나 또한 90년대에 처음 접한 후 10년이 넘게 그곳의 세월의 맛을 느껴왔다.
대로변을 양반들의 질주하는 말과 마차를 피해 서민들이 걸어다니던 뒷골목.
사람이 모이던 곳에 의례 생기던 먹거리들은 어느새 먹자골목이 되고 일제침략기를 거치고 현대로 접어들어서도 20세기를 거치며 주머니 가벼운 서민의 허기와 치기를 달래주는 대표적인 공간이 돼줬다.
골목마다 주점, 해장국, 낙지등의 먹거리를 앞세우며 북적이고 간이의자에 앉아 뒷사람과 등을 부비며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로 가득찼던 곳.
이런 서민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던 공간이 21세기 들어서며 시작된 재 개발로인해 그 시작점이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남아 있는 곳들도 재개발 순서를 기다리는 신세다.
주점과 맛집들은 대부분 간판을 내렸고 아직 문을 열고 있는 식당도 활기가 떨어졌고 밤이 되면 적막감이 골목길을 따라 흐른다.
소설가·시인·화가·언론인 등의 아지트로 인기를 누렸던 시인통신, 주당들의 쓰린 속을 달래주던 부산뽈데기 등 많은 터줏대감들이 피맛골을 완전히 떠났다.
하지만 여전히 서늘해진 골목을 지키고 있는 집들이 있다.
뿐만아니라 장사 자체를 접지 않고 새로 들어선 주상복합건물로 스며들거나 근처로 이전 재영업을 하는곳도 있다.
오늘은 그 첫번집을 소개 하고자 한다.
고 박무순 할머니의 낙지볶음집.
할머니는 소위 무교동 낙지로 불리는 낙지볶음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무교동 낙지를 탄생시켰고, 가장 대중적인 음식 가운데 하나로 성장시킨 주인공이다.
‘원조’라고 주장하는 집이 많지만 박 할머니 앞에만 서면 이내 꼬리를 내린다.
무교동 낙지는 1965년 서울 서린동 한국수출보험공사 자리에 탄생했다.
대폿집을 인수한 박 할머니가 내놓은 신메뉴가 낙지볶음이다.
상호는 실비집.
낙지가 쌌고, 흔했던 시절이야.
그런데 이를 당시엔 데치거나 국 끓여 먹는 게 전부였지.
그래서 평소 집에 온 손님에게 술안주로 내놨던 것을 선보이기로 했지.
매콤한 낙지볶음과 이에 어울리는 담백한 조개탕, 그리고 감자탕과 파전이 전부였다.
손님들은 줄을 이었고 대박이 터졌다.
그러자 얼마 안가, 유정·미정 등 유명한 낙지집이 생겨났다.
서린동 일대에 열 곳이 넘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밀려드는 손님을 감당하지 못해 낙지센타(72년)를 열었다.
서린동에서 시작된 낙지는 무교동에서 다시한번 낙지골목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소위 무교동 낙지가 된것이다.
70년대 중반 서린동이 재개발되면서 박 할머니는 청진동으로 옮겨 실비집만 운영했다.
프랜차이즈화된 이강순실비집의 원조식당이다.
그러다 93년 큰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가면서 가게를 이강순(77) 할머니에게 넘겼다가 2000년 한국으로 돌아와 둘째 아들 이중택(68)씨와 함께 청진동에 ‘원조할머니 낙지센타’를 다시 열었다.
그리고 피맛고 개발과 같이해 다시 청진동에서 북창동으로 이전해 2010년 원조할머니 낙지센타라는 상호로 재 영업을 시작했다.
박 할머니의 낙지볶음은 세월이 흘러도 맛이 한결같다.
주전자에 담아 냈던 막걸리가 소주로 바뀌었을 뿐이다.
구순의 할머니는 거동은 많이 불편해 카운터에 앉아 손님을 맞는 일을 주로 하지만 매일 음식 상태를 점검하는 건 잊지 않으셨다.
할머니의 바람대로 2015년 1월 9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실때까지 손을 놓지 않으신것이다.
잃어가는 피맛골의 맛을 생각하다보면 구순의 연세에도 카운터를 지키시던 할머니 모습이 아련하다.
손님들이 맛있게 먹을 때가 가장 보람 있지.
죽을 때까지 낙지를 손에서 놓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