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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Jan 31. 2019

음식문화 I 맛 있는 이야기 넷, 만두

; 설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고향의 맛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생각나는 뜨끈한 국물음식들이 냉각난다.

김장김치가 시어가고 설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만두를 빚으셨다.

떡만으로 뭔가 부족한 부분을 고기, 두부, 신 김치로 속이 꽉 채워진 만두가 그 자리를 메운다.

어릴적 어머니가 빚은 만두는 두부가 많이 들어간 개성식 편수에 가까웠다.

크기도 한입에 넣기에는 넘쳐나는 소위 왕만두 스타일이었다.

초계탕, 백긱치에 가까운 물 많은 김치등 남한에서 가장 북서쪽에서 유년에서 장년까지의 시절을 보내신 어머니의 기본은 아마도 개성음식이었던것 같다.

제갈공명이 군사를 이끌고 드넓은 중국에서도 가장 변두리에 속하는 운남지방으로 원정나갔을때의 일이다.

운남지방의 야만족은 사납기로 유명했다.

당시 정벌나간 南蠻남만땅의 우두머리는 孟獲맹획이었다.

제갈공명은 용맹하기로 이름난 맹획을 7번이나 사로 잡았다가 7번 모두 풀어준다.

용장 맹획을 어찌나 손쉽게 다루었는지 무슨일이든 제 마음대로 능란하게 한다는 七縱七擒칠종칠금이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유래 되었다.

어쨋든 승리를 거두고 촉으로 돌아가는 길, 滤水여수에 이르렀을때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지고 모진 광풍이 불어 왔다.

물결이 높고 풍랑이 심해 배를 띄울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水神의 노여움을 산 탓이었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은 수신의 노여움을 풀기위해 蠻地만지의 풍속에 따라 사람의 머리 49개를 바쳐야 한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버럭 화를 냈다.

어찌 산사람을 죽여 제사를 지낸다는 말이냐?

개선길에 오른 장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순간, 공명의 머리속에는 묘책이 떠오른다.

즉각 요리사를 부르더니 밀가루를 반죽해서 사람의 머리모양을 만들라고 지시한다.

안에 고기를 넣고 둥ㅇ그렇게 빵을 빚어눈속임으로 제사를 지내자 언제 그랬냐는듯이 구름이 걷히고 바람도 멈추었다.

이로서 촉나라 군사들은 무사히 강을 건너 고국으로 귀환 할 수 있었다.

饅頭만두는 蠻人만인의 머리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蠻頭만두라 하였으나 蠻만과 饅만의 음이 같아서 饅頭만두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가장 보편적으로 들어온 만두의 기원이고 유래다.

걸출한 역사의 이야기가 바탕에 깔린 오랜 시간의 음식이라고 하면 만두라는 음식을 접하면 아~!라는 탄성과 함께 깊이나 맛도 배가 되었던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는 정사가 아니라 소설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다.

演義연의는 사실을 부연하여 재미나게 설명한 소설을 말한다.

正史정사에는 瀘水노수와 瀘水大祭노수대제가 아예 없다. 

정사에는 제갈공명의 남만정벌 자체가 그리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는다. 

아주 짧은 시기의 남만 행 이야기만 나올 뿐이다. 

물론 노수에 갔다는 기록조차도 없다.

시대적 배경은 후한이지만 삼국지연의는 14세기에 정리된 소설이다.

소설 속의 만두는 제갈공명 시대의 만두가 아니다. 

14세기의 만두 이야기가 후한 말의 음식으로 나타난 것이니 제갈공명의 만두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만두에 대한 다른 유래이야기는 없을까...


최근 유력하게 주목받고 있는 이야기는 실크로드를 통해 국수가 전세계로 퍼져 나간 것처럼 만두도 실크로드로 들어왔다는 설이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Mesopotamia 메소포타미아.

성서 연구가이자 앗시리아 전문 학자인 Jean Botero 장 보테르는 Sumer수메르와 Akkad아카드의 요리책에서 만두의 원조 격인 Vögelchen 푀겔헨이라는 음식을 발견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밀가루를 반죽한 피 위에 다진 고기를 올린 뒤 피를 다시 덮어 삶아 먹었다. 

푀겔헨이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만두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설이다.

실크로드 인접국가들의 만두 이름이 터키는 Manti 만티(Mantu만투), 우즈벡키스탄, 카자흐스탄는 Манты 만띄로 불리는것으로 미루어 설득력이 있다.

Manti
Манты

우리나라에 만두는 그 이전에도 있었겠지만 늦어도 고려시대에는 널리 퍼졌을것으로 짐작된다.

고려 충렬왕때의 가요인 雙花店쌍화점은 2008년 개봉한 영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데 雙花쌍화란 오늘날의 만두와 비슷한 것으로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만주집이 되는것이다.

霜花상화.

곡물가루를 찜통에 넣어서 찌면 하얀 김이 서리처럼 피어오르거나 맺힌다. 

하얀 김이 서리는 모습, 서리꽃을 이야기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내내 만두와 상화는 혼용된다.  

쌍화는 잠깐 나타나고 사라지지만 만두, 상화, 상화병이라는 이름은 자주 나타난다. 

반가와 궁궐에서는 늘 만두라고 불렀고 상화를 표현할 때는 俗稱속칭이란 표현이 덧붙는것으로보아 우리 것이고 저잣거리 상민들의 음식일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상화는 만두라기보다는 찐빵의 모양에 가깝다.

조선시대 기록에도 나와 있다

조선의 雙花쌍화, 床花상화와 비슷한 음식이 있다. 만두다

용한 세종4년(1422년) 5월17일(음력)의 태상왕(태종)수륙재에 관한 기록에도 만두는 귀하게 나타나는데,

만두饅頭, 면麵, 병餠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단하소서 라는 구절이다. 

만두는 국수, 떡과 더불어 귀한 음식의 대명사로 만두라고 정확하게 표현했다.

숙종 연간(1690년)에 발행된 중국어 사전 격인 譯語類解역어유해에는 

만두는 우리나라 풍속의 霜花餠상화병이다 고 명확하게 표현한다. 

중국에는 다양한 모양의 만두가 있는데 무덤 같은 모양을 한 만두는 오늘날 중국인들이 말하는 包子 바오츠(bāo‧zi 포자) 혹은 饅頭 만토우(mán‧tou, 만두)의 모양이다. 

포자는 둥글게 만들어 보따리 묶듯이 위를 틀어 올린 것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고기만두라고 부르는 것은 포자일 때가 많은데 북경 王府井 왕푸징의 小吃包子店 구부리만두점 (xiǎochī bāozi iàn)에서 파는 天津狗不理包子 천진구부리포자(tiānjīn gŏubùlĭ bāozi)가 바로 이것이다. 

天津狗不理包子

만두가 아니라 포자다. 

서울 삼청동의 천진포자도 반드시 포자라고 한다. 

부산초량동의 장춘향의 그것도 모방송사에서 언급되며 포자라고 이야기를 했다.

왼쪽 천진포자, 오른쪽 장춘향

한글로는 만두라고 쓰지만 한자로는 포자라고 쓰고 중국인들은 포자를 반드시 포자라고 부른다. 

小籠包소룡포는 小籠包子소룡포자의 준말로 작은 대나무 찜통(小籠 시아롱)에 넣어서 찐 포자다. 

포자는 만두를 둘러싸는 겉껍질이 다르게 발효시킨 곡물, 주로 밀가루를 발효, 숙성 시킨 후 가루를 사용한다.  

이에반해 餃子교자(jiǎozi)의 경우는 반달 같이 생긴 것이고 겉껍질을 부풀지 않은 생 곡물가루를 사용하고 한, 중, 일 삼국이 모두 같은 표기를 하며 발음도 비슷하다. 


만두는 서울과 평안도, 황해도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한반도는 중국이든 유라시아 대륙이든 북쪽에서 받아들인 혹은 독자 개발한 만두 혹은 상화로 독자적인 만두를 만들었다.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중국인들이 몰려들면서 인천과 영등포일대에는 중국인들이 몰려들어 음식점 혹은 만두전문점을 여는데 손수레든 움막 같은 가게든 만두도 팔고 춘권, 월병과 더불어 공갈빵도, 호떡도 팔았다.

독창적인 만두도 이 시기에 만들어진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탕반문화는 중국의 포자와 다른 만두국이라는 음식으로 변화했다.

물론 중국에도 馄饨[húntun]이라든가, 水餃子수교자(물만두)라고하는 물이 있는 만두가 있지만 그 국물을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부수거나 밥을 말거나 마시며 전부를 먹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이라면 역시 개성 편수라 할 수 있다.

왼쪽 馄饨[húntun], 오른쪽 水餃子수교자(물만두)

1929년 12월1일자 별건곤 잡지에 珍品 名品 天下名食八道名食物禮讚 진품 명품 천하명식팔도명식물예찬라는 칼럼에 필명인듯한 秦學圃진학포라는 이름의 작가는 天下珍味 천하진미 開城 개성의 편수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개성 편수 중에도 빈한한 집에서 아무렇게나 만들어서 편수 먹는다는 기분만 맛보는 것 같은 그런 편수는 서울 종로통 음식점에서 일금 20전에 큰 대접으로 하나씩 주는 만두 맛만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고기라고는 거의 없고, 숙주와 두부의 혼합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남들이 일컬어 주는 개성 편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편수 속의 주성물은 우육·돈육·계육·생굴·잣·버섯·숙주 나물·두부 그 외의 양념 등 이렇게 여러가지 종류이다. 

이것들을 적당한 분량씩 배합하여 넣되 맛있는 것을 만들려면 적어도 숙주와 두부의 합친 분량이 전체 분량의 3분의 1을 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으로 정말 맛있다는 개성편수는 그리 염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략...

여러가지 물건이 개성 부인네의 특수한 조미법으로 잘 조미되어 똑 알맞게 익어서 그것이 우리들 입속으로 들어갈 때 그 맛이 과연 어떠할까. 

세 가지 고기맛, 굴과 잣맛, 숙주와 두부 맛들이 따로따로 나는 것이 아니요 그 여러 가지가 잘 조화되어서 그 여러 가지 맛 중에서 좋은 부분만이 한데 합쳐져서 새로운 맛을 이루어서 우리 목구멍으로 녹아 넘어가는 것이니 그 새로운 조화된 맛 그것이 개성편수 맛이다.


개성 편수에 관해서는 그보다 앞선 1890년대에 쓰인 한글 필사본 조리서 <시의전서>에 그 조리법이 나온다.


밀가루를 냉수에 반죽하여 얇게 밀어 네모반듯하게 자르되 너무 작게 하지 않고 소는 만두소처럼 만들어 귀를 걸어 싸서 네모반듯하게하되 혀를 꼭 붙게하여 삶는 법도 만두와 같으니라. 

...중략...

소 감으로는 쇠고기·꿩고기·돼지고기·닭고기를 모두 쓴다. 

미나리·숙주·무는 다 삶고 두부와 배추김치는 다지고, 고기도 다진다. 

다진 채소와 두부·닭고기에 파·생강·마늘·고춧 가루·깨소금·기름을 넣어 간을 맞추어 양념한다. 

기름을 많이 넣고 속에 잣을 두어 개씩 넣어서 아주 얇게 빚어 고기 장국에 삶는다. 

만두는 물이 팔팔 끓을 때 넣어 솥뚜껑 을 덮지 않고 삶는데, 만두가 둥둥 뜨거든 건져서 합그릇에 담아 후춧가루를 뿌린다.

2008년 북한의 근로단체출판사에서 발행한 우리민족료리에서도 편수를 개성음식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편수라는 이름은 물에 삶아 건져낸 것이라는 뜻에서 생겼다고 밝혔다.

편수를 먹기 위해서는 밀가루를 쉽게 확보할 수 있어야 했다. 


밀은 연간 평균 기온이 3.8도 이면서 여름 평균 기온이 14도 이상인 지역에서 재배되어야 품질도 좋고 생산량도 많다. 

한반도는 품질 좋은 밀을 생산하기에 적합한 지역은 아니다. 

그래도 재래종 밀은 조선시대에도 재배되었다. 

하지만 밀농사가 가능한 곳이라고 해도 벼농사가 마무리되는 늦가을에야 파종을 하였다. 

품질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산량 역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궁중에서나 부자들만이 겨우 품질 좋은 밀가루를 확보하여 편수를 비롯하여 밀가루 피 로 만든 만두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만약 밀가루를 구 하지 못할 경우 메밀가루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그래 서 조선 후기의 조리서에서는 대부분 메밀가루로 피를 만든다고 적었다. 심지어 육만두·어만두·동아만두와 같 이 아예 피를 쇠고기·생선·동과로 만들기까지 했다.

왼쪽 조선총독부농업시험장 25주년기념 지, 오른쪽 우리민족료리

1931년에 발간된 조선총독부농업시험장 25주년기념 지에 의하면, 조선의 재래종 밀은 황해도·평안남도·강원도에서 주로 많이 생산된다고 하는데 특히 황해도에서 그 생산량이 가장 많았다. 

재래종 밀 중에서 그 품종이 가장 좋은 것 역시 황해도에서 재배되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개성 사람들은 밀가루 피로 편수를 만들 수 있었다. 

시의전서에서는 밀만두가 편수라고 적었고 조선 후기에도 개성의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두부와 숙주만으로 소를 만들어서 비교적 풍부한 밀가루로 만든 피로 보쌈김치 싸듯이 편수를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개성의 부자들은 그것을 시샘하여 온갖 고기와 생굴까지 넣은 소로 자신들만의 개성편수를 만들었다.


만두는 끊임없이 진화한다.

떡볶이에 넣어서 먹기도 하고, 라면을 끓일 때 넣기도 한다.

평양의 어복쟁반도 만두전골의 일종이다.

김치만두로 만든 김치만두전골, 된장, 토장을 넣은 된장, 토장만두전골도 등장한다.


용신동 개성집.

1967년 문을 열어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집은 이북 개성만두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만두 노포(老鋪)다.

진한 곰탕과 담백한 만두의 절묘한 조화가 이루어지는데, 슴슴한 맛이 익숙지 않은 사람은 곁들여 나오는 새콤달콤한 초간장을 넣어 먹으면 더욱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자하문 자하손만두를 한국식 만두, 반가식 만두라고 표현한다. 

고 작은 만두(교자)가 색이 곱고 깔끔한 만둣국. 

다른 곳에서는 만나기 힘든 우리식 채식만두, 편수는 오이 등을 속으로 사용하는데 여름 만두인 편수도 좋다. 

삼청동 다락정에서는 된장만두전골, 김치만두전골 등을 만날 수 있는데 된장 푼 육수나 김치 국물을 넣고 전골로 끓인 다음 각종 부재료와 만두를 넣고 전골처럼 먹는 방식이다. 

목동 개성집이나 인사동 개성만두 궁은 큼직한 만두와 더불어 전골, 탕반식의 중부 반가 음식으로서의 만두를 만날 수 있다.  

허름한 노포로 인천 청천동 이북식손만두국밥은 국밥에 만두를 넣어서 내오는 한국식 만두국밥을 내놓는다. 

손님들은 만두를 으깨서 국물과 섞은 다음 먹는다. 

이태원의 쟈니덤플링에서는 익숙한 중국음식집의 튀긴만두가 아닌 군만두를 맛 볼수있는데 중국식 정통 만두를 국내에 널리 알린 홍콩에서 들어온 만두다.

일일히 열거 할 수 없지만 전국에 내노라하는 만두집들은 지역 특색을 살려가며 새로운 변신을 하고 있다.

설 명절이면 가족이 주욱 둘러 앉아 빚던 만두의 추억은 이제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도 여전히 어머니의 손맛이 생각나는 설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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