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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Mar 30. 2018

음식문화 III 맛의 시작, 소금(자염)

; 정책의 익숙함에 잊혀진 우리의 소금, 煮鹽 자염

생명과 건강을 위해 필수적인 소금은 음식의 기본 맛, 짠맛. 간을 하는 것 외에도 소금이 요리에서 발휘하는 힘은 다양하다.


배추를 소금물에 절이면 소금의 Magnesium 마그네슘과 Calcium 칼슘이 배추 속 Pectin 펙틴과 결합해 아삭아삭한 식감을 돋우고 소금은 잡균 번식과 비타민C의 공기 산화를 막아 배추가 썩지 않고 숙성이 되게 한다.

더욱이 소금 속 미네랄은 배추 고유의 맛과 향에 새로이 발효의 맛을 더해준다.

소금은 단백질을 응고 시킨다.

육류나 생선을 구울 때 미리 소금을 뿌려두는 이유는 겉면의 단백질이 수축하면서 속살의 수분을 가두어주기 때문이다.

수분이 빠져 흐르지 않으니 당연히 속살의 맛 성분도 그대로 갇힌다.

소금은 생선 구울때도 큰 역할을 한다.

수분이 많은 생선은 굽기 직전 소금을 뿌려 두면 안팎의 염도 차이로 인해 삼투압이 일어나 생선살 속 수분이 빠져나온다. 생선살에 탄력이 생기면서 식감이 좋아지고 구웠을 때 모양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비린내를 잡아주는 것도 소금의 역할이다.

물론 너무 오래 절인다면 살이 뻣뻣해져서 오히려 맛을 떨어뜨린다.

소금은 자체로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설탕을 만나면 단맛을 도드라지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옥수수를 소금물에 삶고, 단팥죽을 소금으로 맛내고, 수박이나 멜론에 소금을 쳐서 먹기도 한다.

조심해야 할것은 소금 양이 많아지면 간이 세게 느껴지는데, 단맛이 가장 극대화될 때는 설탕의 0.5% 정도 양의 소금을 썼을 때다.

아이러니하게도 소금은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과다섭취하면 고혈압과 같은 질병을 유발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소금은 언제부터 먹어온것일까.

아무도 언제 사람들이 소금을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소금은 오랜 역사 이전부터 널리 사용되었다. 


소금은 인류역사가 시작되기 전, 지구의 탄생과 그 시작을 같이한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과일과 열매를 통해 그리고 바다 속의 물고기를 먹으면서 그 속에 있는 소금성분을 자연스럽게 섭취하게 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이라를 만들 때 시체를 소금물에 담아서 썩지 않게했고 고대 근동에서는 산모가 아기를 낳으면 신생아의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서 피부를 단단히 하도록 하고 병균으로부터 보호하였다.

고대 로마나 그리스에서는 소금이 화폐로 사용되었는데 관리들의 봉급으로 지급했으며 노예를 사고 상품을 교환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는 거대한 소금광산을 지배해서 제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의 gabelle염세나 20세기 인도에서처럼 소금에 세금을 부여하는 문제는 거대한 사회의 변화나 혁명을 불러일으킨 원인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세계의 모든 바다와 각국의 소금광산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요리용 소금이나 식용 소금 등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누구나 식탁에 소금을 구비해 둔다.

이와 같은 소금의 대중화에 혁신적인 발전과 기여를 한 인물은 Joy Morton조이 몰튼이다. 

1911년 몰튼은 탄산마그네슘을 이용해 습기에도 쉽게 뭉치지 않아서 사용이 용이한 소금을 생산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물론 오늘날에는 탄산마그네슘 대신에 규산칼슘을 사용하지만, 몰튼 소금의 catchphrase인 When it rains, it pours(비가 와도 뿌릴 수 있는 소금)와 우산을 든 소녀가 있는 로고는 1914년부터 몰튼 소금 용기의 파란색 겉포장에 등장한 것이다. 

그가 설립한 회사인 Morton Salt Company는 미국인이 사용하는 소금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있다.

Morton Salt

소금이라는 말은 우리 고유어 이다.

이를 두고 비싼 가격을 생각해서 한자 소금을 어원으로 밝히는것은 잘못된것이다.

한자에는 염자가 있는데 이는 국가에서 관리하고 녹봉으로 책정이 되었다는 의미로 풀고 있다.

서양에서도 Salt는 라틴어 SAL에서 왔고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급여를 의미하는 salary샐러리이듯 동서양 전체에서 소금은 그 가치가 화폐로 인정 받은듯하다.


우리나라에는 전통 소금 채취 방식인 煮鹽法자염법이 있었다.

국토의 세 방향이 바다인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일찍이 바닷물로부터 소금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어 바닷물의 염도를 높인 뒤 불에 끓이는 방식으로 소금을 얻어 왔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천일염은 일제 식민지하에 만들어진 전략적 소금의 산물이다.

자염

개항이 되면서 소금은 주로 청나라에서 들어왔는데 선의 소금보다 많게는 7~8배 저렴했기 때문에 수입 초기부터 상당한 호황을 누렸다. 

청의 소금은 산에서 채취한 암염과 호수나 갯벌에서 태양열로 생성된 천일염으로 넓은 땅의 중국은 소금이 풍부했다.

청국 소금이 들어 올 때 일본 소금도 있긴 했지만 일본 소금은 품질 면에서 청국소금 보다 월등히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비싸서 조선인에게 외면당했다. 

더욱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국모시해 사건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반감은 소금을 포함한 일본 제품의 불매로 이어졌다. 

값싼 청국 소금을 먹긴 했지만 청국소금은 제염 기술이 낮아 소금발도 굵고, 맛도 쓰며 색깔은 거무죽죽하여 늘 불만이었다. 

일본 업자들은 자국 소금을 포기하고 청국 소금을 사서 그것을 다시 녹여 깨끗하고 입자가 고운 재제염(일명 꽃소금)을 만들어 국내에 선 보인다. 

이 소금이 일명 꽃소금이라 부르는 재제염이다. 

차별화된 고급소금이었지만 여전히 가격이 문제인지라 재제염 역시 초기 판매는 부진했다. 

그러던 중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진다.

일본은 막대한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에서 담배와 소금을 독점하고 전매제를 실시하지만 조선인들이 담배와 소금소비를 급격히 줄였기 때문에 결과는 또다시 실패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숙원 사업이었던 소금생산에 박차를 가해 서해안에 천일염전을 조성할 계획을 세운다. 

한마디로 청국 소금 고사후 독점권을 행사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천일염은 염전을 축조하고 해수를 끌어들여 태양열과 풍력을 이용해 소금을 결정시키는 염법으로, 막대한 양의 바닷물을 원료로 사용할 수 있고, 특별한 기계설비와 많은 노동력도 들지 않았다. 

일본은 청나라 기술자를 고용한 후, 인천 주안에 염전 3,000평(1정보)을 축조하여 시험해 본 결과 산출된 천일염이 중국보다 품질이 훨씬 좋아 그로부터 본격적인 생산채비를 갖추게 된다. 

일본이 서해 연안에 더 좋은 염전부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에 제일 먼저 염전을 만들게 된 이유는 우선 생산된 소금을 소비할 수 있는 큰 시장이 서울이었고 경인철도로 인해 신속한 물류가 가능했으며, 무엇보다도 항구를 통해 일본과 청나라로 반출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주안 염전

주안염전을 필두로 소래염전, 고잔염전, 시흥염전 등 서해안을 따라 도처에 염전을 축조하고 조선의 값 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엄청난 천일염을 생산했고 이 결과 조선에서 청국소금은 사라졌고 일본은 물론 청국으로까지 소금 역수출을 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긴다. 

1937년 일본은 인천과 수원을 잇는 수인선을 개통하는데 열차는 전형적인 일본식 협궤 열차였는데 수송목적은 객차용이 아니라 화물용이었다. 

인천에서 종착역 수원을 가는 사이에는 소래, 고잔, 남동, 시흥을 거치게 되는데 이 역 주변으로 대단위 소금 생산지가 산재하여 해당 역을 통해 소금을 수거할 목적이라서 당시 사람들은 수인선을 소금열차라고 불렀다. 

이 소금열차는 1990년대에 사라지지만 이 열차로 인해 대표적인 명소가 탄생하는데 다름 아닌 인천 소래포구다.

수인선

해방 후 1960년대에 경인고속도로와 경인공단이 들어서기 전까지 인천 주변의 염전은 전국 판매량의 반을 훨씬 상회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煮鹽자염

100살짜리 天日鹽천일염이 아닌 우리의 전통소금인 煮鹽자염.


달이 下弦하현이 되어 潮水조수가 빠지고 갯벌이 드러나면 그 땅을 갈아 소금기 머금은 밭을 만들고, 거기서 받은 소금흙을 굽는다네. 

알갱이가 굵은 것은 결정이 수정 같은 소금(水晶鹽수정염)이 되고, 가는 것은 결정이 싸라기 같은 소금(素金鹽소금염)이 되지.

- 閔翁傳 민옹전, 朴趾源 박지원 1757년



천일염이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鹽井염정(짠물을 모아두는 웅덩이)의 간수를 솥에 넣고 달여서 만든 煮鹽자염이 주로 생산되었다.

염정은 짠 흙을 이용해 염도를 높이는 생산 시설이며 불순물을 걸러내는 여과 장치다. 

염정은 지역마다 명칭, 크기와 구조 등에서 차이가 나는데 전라도에서는 섯등, 경상도에서는 섯, 충청도의 서산ㆍ태안에서는 간통, 강원도에서는 간수통이라 한다. 

염정은 대개는 바닷물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만들어 두고 거기에 바닷물을 길어와 부었다. 

전라도 智島지도(무안반도 서쪽 섬)의 군수였던 吳宖黙오횡묵은 그의 정무일지에다 염막에서 소금 굽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대체로 소금을 굽는 법은 먼저 鹽磴염등(전라도의 섯등으로 짠물을 만드는 여과 장치)을 쌓고 나무를 옆으로 펴고, 나무 위에 솔잎을 쌓는다. 

솔잎 위에는 바다 모래를 여러 번 갈아 말려 이를 덮고, 물을 부어 거르기를 잿물 받는 것과 같이 한다. 

그 아래를 파서 구덩이를 만드는데 이를 鹽井염정이라고 한다. 

鹽幕염막(소금가마에 불을 때는 장소)을 높고 넓게 만들고 위로 연통을 만들며, 가운데 둥근 구덩이를 한 길 정도 판다. 

네 모퉁이에 흙을 쌓아 기둥을 만들고 긴 나무를 그 위에 옆으로 건다. 

그 위에 서까래를 듬성듬성 펴놓고 서까래 아래에는 대나무를 조밀하게 편다. 

또 쇠갈고리를 서까래 위와 대나무 위에 걸어둔다. 

그리고 먼저 짚을 깔고 다음에 주먹만 한 작은 돌을 깔며, 그 다음에 굴 껍질로 만든 회를 바르는데 이를 鹽釜염부(소금솥)라고 한다. 

염정의 물로서 가마솥을 채운 후 밑에다 불을 지피면 반나절쯤 되어 물이 끓어서 소금이 된다. 

한 솥에서 소금 4石석이 생산되며 매일 두 번씩 구워낸다.

-智島郡叢鎖錄지도군총쇄록,吳宖黙오횡묵

염정에서 만든 짠물을 염막에 옮겨와서 저장고에 넣어두고 생산량을 감안해 짠물의 일정량을 소금가마에 붓고 하루 내내 쉼 없이 불을 땐다. 

쇠가마는 소나무 장작을 사용하고 횟가마는 잡목과 잡풀을 땔감으로 쓴다. 

쇠가마로 소금을 굽기 때문에 서해안의 소나무가 헐벗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바닷물을 끓여 수분을 증발시키고 결정된 소금을 걷어올린 것이 자염이다. 

이 자염은 색깔도 하얗고 분말이 고우며 맛이 뛰어났다.

저가의 천일염에 밀려 사라졌던 자염은 2000년대가 들어서며 전통방식 복원에 성공해 생산되기 시작한다.

갯벌자염을 복원해 생산하는 지역은 국내에서 태안과 전북 고창과 전남 순천 정도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브르타뉴주 게랑드



게랑드 소금

프랑스 브르타뉴주에서 생산되는 일명 게랑드소금이 1970년대 지역민들의 ‘게랑드소금 복원사업’으로 다시 태어나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듯이 우리의 자염이 자리를 찾아가기를 바란다.

게랑드소금은 15세기부터 전 유럽에 퍼질 정도로 생산되어 오다가 근대에 이르러 급속도로 몰락했었다. 

2013년 국제슬로푸드생명다양성재단은 사라져갈 위기에 처한 종자나 음식을 찾아내 기록하고 널리는 알리는 프로젝트인 Ark of Taste(맛의 방주)에 태안자염을 추가 등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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