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해지는 피맛골의 추억 둘, 빈대떡
2000년 무렵 파트너와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첫 사무실을 꾸리고 일을 시작 했을때, 그곳이 좋았다.
인위적인 냄새보다는 자연스레 역사가 묻어나던 곳이 왠지 낮설지 않은 곳이었다.
새로운 트랜드에도 밀리지 않고 살아 있는 역사도 함께 품었던 곳.
그 후 일대는 개발과 함께 복원이라는 쓰나미를 맞았고(물론, 개발에의해 더욱 상처가 크지만) 일과를 마치고 오랜 세월의 잔상이 흥건한 허름한 선술집에서 부데끼며 마시는 한잔은 하루를 털어내던 기억은 추억속으로 점점 사라져간다.
열차집
교보빌딩 로비에서 뒷문으로 나가면 바로 보이던 피맛골 골목의 첫번째 위치하며 진~한 기름 냄새로 유혹했던 열차집은 피맛골의 대명사였다.
등 받이도 없고 뒷 테이블에 앉은 사람과 등을 마주하고 마시던 자그마한 전 집은 발 딛을틈이 없이 사람들로 벅적거렸다.
열차집에서 파는 안주는 빈대떡, 조개탕, 굴전, 파전, 두부 다섯 가지.
당연히 기름냄새 진동하던 집이라 빈대떡이 간판메뉴다.
우리집 빈대떡은 녹두를 맷돌에 갈아 직접 짠 돼지기름에 굽는다.
화학조미료는 물론 김치나 고사리 따위도 넣지 않고 돼지고기 몇 점만 얹는다
빈대떡뿐만 아니라 다른 굴전, 파전 등에도 전혀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는다
- 우제인(2대 사장)
빈대떡 안에 들어가는 내용물이 없다보니 열차집 빈대떡은 처음 먹어보는 사람들에게는 어찌보면 심심하기 이를 데 없어 맛이 없다고 타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심심한듯한 바로 그 맛에 빠지게 되면 평가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곳의 기본 밑반찬 또한 유명하다.
어리굴젓과 양념장에 담긴 양파·풋고추, 단무지 등 세가지가 그것인데 어리굴젓을 올린 갓 구운 빈대떡을 먹은 뒤 양념 간장에 절인 양파·고추로 입가심하면 깔끔하고 개운하다.
광화문과 종로의 역사를 이고 있는 열차집도 개발에 밀려 지금은 자리를 옮겨 공평동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여전히 화학 조미료 없이 돼지기름에 구워내는 빈대떡 그 맛은 유지되고 있다.
1954년 세종로 뒷길 한옥집의 담 틈에서 번철 하나 놓고 빈대떡을 구우면서 막걸리를 팔기 시작했다.
지금의 교보문고 뒤에서 종로소방서 쪽으로 가는 길가에 일종의 불법 노점을 차렸던 것이다.
추녀 밑에 길게 의자를 놓고 빈대떡을 파는 이 집을 보고 사람들은 기차집이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피란길 기차 칸처럼 엉성한 의자만 놓여 있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1957년 가게의 위치를 지금의 피맛골 초입으로 옮기고 기차집과 이미지가 비슷한 ‘열차집’이라는 정식 간판을 내건 이후에도 손님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교보빌딩이 들어서기 전 여관과 빈대떡 파는 집들이 이 일대를 채웠다.
처음 창업하신분은 작고하신 안덕인님이다.
빈대떡 솜씨가 남다르기도 했지만, 배고픈 사람들의 체면과 호주머니 사정을 미리 알고 인심을 쓸 줄 아는 심성으로 인해 더욱 손님들과 친밀해졌고, 장안의 명소가 됐다.
당시에는 지금의 어리굴젓대신 깨끗한 조개로 만든 조개젓을 내놓았다.
2대 사장이신 우제인님은 1976년 가게를 인수 받았다.
남편과 함께 열차집부근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안덕인님은 우제인님 부부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자녀들 가운데 그 누구도 가업을 잇겠다는 이들이 없어 어차피 주변에서 후계자를 물색하고 있던차라 평소 성실하고 심성도 좋다고 여겨온 우제인님께 흔쾌히 가게를 물려주었다.
종로통이다보니 당시 문화예술인들이나 기자들은 이곳을 즐겨 찾았다.
방명록이 2004년 화재 때 타버려서 2005년부터 다시 방명록에 이름을 받았는데 얼마되지 않는다고 한다.
새 방명록에는 오랜 단골인 개그맨 전유성, 영화감독 이장호, 가수 노영심, 탤런트 최불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유명한 전남대 일문과 교수 미즈노 순페이(水野俊平) 등의 이름이 실려있다.
사장님 부부는 함께 가게에 자주 나온다.
아들 윤 상건님에게 대부분의 운영 일을 맡겼지만 열차집에 바친 일생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더 이상 인문이고 문화이며 살아있는 역사가 개발이라는 명분하에 그 명맥이 끊기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