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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07. 2016

육지것의 제주인문이야기 I 유배지 이익 적거터

유배지 乇羅탁라 그 두번째 장소,  艮翁李瀷 간옹이익 적거터

艮翁간옹 李瀷이익

1579년(선조 12) ~ 1624년(인조2)

본관 경주(慶州)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곧 검열에 등용되고, 1615년 전적에 승직되었다.

그 뒤 사서ㆍ정언ㆍ헌납ㆍ지평ㆍ장령ㆍ예조정랑ㆍ병조정랑을 거쳐 직강을 역임하였다.


「지금 말라 타들어가는 땅이 천리요, 굶어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여,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될 참화가 불행히도 가까워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지금 8년이 되었으나 한번도 경연을 열어 도를 강론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궁첩과 환관들이 얼마나 성상의 마음을 흔들어댈 것이며, 신하들과의 거리가 어찌 천리만 되겠습니까. 궁중이 엄하지 못하여 안팎이 결탁해서 태아의 칼자루가 이미 거꾸로 잡히었고, 사사로이 바치는 것이 줄을 잇는데 다투어 서로 본받아 민생의 곤궁함이 날로 더해지고 있습니다.」

1615년(광해군 7년) 5월 간옹 이익(1579~1624)은 광해군의 실정을 논하면서 상소를 올린다.


임진왜란 와중에 세자로 책봉돼 왕좌에 오른 광해군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증살(뜨거운 증기로 쪄서 죽임)하고, 영창대군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사간원 정언(정6품)이었던 이익은 군왕의 부도덕함과 외척 전횡을 조목조목 상소해 언관의 직분을 다했지만 사형 위기에 처해진다.

광해군일기에는 상소문을 접하고 분노한 광해군이

「태아의 칼자루가 이미 거꾸로 잡히었다는 말이 누구의 무엇을 가리켜 한 말인지 이익에게 물어서 아뢰라」며 수차례 심문을 요구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중국 초나라 보검 「太阿태아」는 권력을 뜻하는 것으로 후한시대 역사서 한서에는 태아의 칼을 거꾸로 잡고 그 칼자루를 초나라에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임금이 신하에게 권력을 맡기고 도리어 신하에게 해를 입는 것을 비유하는 내용의 상소를 접한 군왕의 입장에서는 이익에게 반역죄를 물을 수도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광해군의 엄명으로 의금부와 사헌부에서 문초를 받던 이익은 영의정 기자헌이 거듭 상소문을 올려 목숨만은 건지게 된다.

정6품에 불과한 이익을 위해 영의정이 구명운동을 벌이고 임금이 이를 받아들인 사실은 그가 그만큼 청렴강직하고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알려준다.

실제 그는 생원·진사시(소과)와 문과(대과)에 급제하고 3년 만에 사간원 정언이 된 것으로 전해질 만큼 당대 최고의 수재로 평가받았다.

가까스로 기자헌(奇自獻)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한 이익은 1617년 제주위리안치의 명을 받고 이듬해 유배된다. 유배형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위리안치는 가족 동반 자체를 금지시키고, 집 주위에는 가시울타리를 둘러 감옥살이나 다를 바 없는 감금과 격리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반역죄 등 무거운 죄를 짓고 국왕의 노여움을 산 왕족이나 관료들에게 가해지던 중형을 이익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제주에는 훗날 제주사람들에 의해 '오현'으로 추앙된 동계 정온(1569~1641)과 송상인(1569~1631)이 유배돼 있었다. 이익이 제주 유배 당시 기록한 '간옹집'에는 이들과 시문을 교환하며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달랜 사실이 기록돼 있다.   


간옹 이익은 1618년 (광해군 10)부터 5년간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배우고 가르치기에 열중하여 전적 고흥진과 명도암 김진용 등 훌륭한 문하생을 배출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사예와 장령 등에 임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미처 왕을 호종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한(典翰)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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