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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07. 2016

육지것의 제주인문이야기 I 유배지 이승훈 적거터

유배지 乇羅탁라 그 세번째 장소,  南岡李昇薰 남강이승훈 적거터

; 마지막 적거터의 비문은 제주 에메랄드호텔 부근

남강 이승훈 적거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473-2[조천9길 21]

‘남강 이승훈(李昇薰) 적거주택’은 이승훈이 1911년 5월부터 10월까지 유배 생활을 했던 적거주택이다.


이승훈은 오산학교 설립, 민립대학 설립, 물산 장려 운동, 『동아일보』 사장, 신민회 활동 등을 벌였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다.

이승훈은 항일 구국 운동에 나섰다가 일제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 지역에 유배 온 이후에는 신앙 활동에 열중하면서 제주 성내 교회 안에 영흥소학교를 건립토록 하고, 교육과 산업을 통해 조국 독립을 이뤄낼 것을 역설하였다.


‘남강 이승훈 적거주택’은 원래 강원도 평창군수 김희주의 노복이 거처하던 집인데, 이곳에서 이승훈이 유배 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0년 10월 10일 남강문화재단과 제주도사연구회가 공동으로 기념비를 제작하여 이 집 벽에 부착, 이승훈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조천리 고관사 버류 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서울슈퍼 오른쪽 골목에서 약 200여m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인근에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료 제4-5호로 지정된 황인관 가옥이 있다.


1864(고종 1)∼1930.

독립운동가·교육가.

본관은 驪州여주. 본명은 寅煥인환. 호는 南岡남강.

평안북도 정주 출신.


빈한한 서민집안에서 태어나 2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6세 때에는 고향인 정주를 떠나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해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3, 4년간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1874년 학업을 중단하고 그 곳의 이름난 유기상(鍮器商)인 임권일상점(林權逸商店)의 사환으로 들어가 3년 뒤에는 외교원 겸 수금원이 되었다.

1878년 이도제(李道濟)의 딸 경선(敬善)과 결혼하게 되고, 이 때부터 점원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상인의 길을 밟았다.

보부상으로 평안도 및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전전하면서 자본을 모아 납청정에 유기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1887년 유기공장을 세워 민족기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해 한반도가 전장화되자 납청정의 그의 상점과 공장은 전화(戰禍)를 입어 잿더미가 되었다.

1901년 평양에 진출,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손을 대 진남포에 지점을 설치하고, 서울·인천을 왕래하며 사업에 성공해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다시 사업에 실패하자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907년 7월 평양에서 안창호(安昌浩)의 「교육진흥론」 강연을 들은 후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굳은 결심 아래 금연·금주와 단발을 결행하고,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였다.

평양에서 용동으로 돌아와 서당을 개편해 신식교육을 가르치기 위한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설립하였다.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인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개교해 교장이 되었다.

이 학교는 그의 열성과 성의을 바탕으로 이종성(李鍾聲)·이광수(李光洙)·조만식(曺晩植) 등의 노력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해 민족교육사상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다.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 해 가을에 105인사건이 일어나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임치정(林蚩正) 등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애국지사가 잡혔을 때, 그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윤치호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15년 가출옥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이 운동의 기독교대표로 참가하였다.

3·1운동으로 종로서에 구속되어 다른 47인과 함께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2년 가출옥해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이 해 일본 시찰로 견문을 넓히고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1924년 김성수(金性洙)의 간청으로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1년 동안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이 때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가담했으며, 조선교육협회에도 관여하는 등 활동 범위가 매우 넓었다. 동아일보사장에서 물러난 뒤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 운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죽기 직전 자기의 유골을 해부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금지로 실행되지 못하고 오산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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