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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07. 2016

육지것의 제주인문이야기 I 유배지 광해군 위리안치

유배지 乇羅탁라 그 네번째 장소,  光海君 광해군 위리안치터

병자호란속에 교동도로 移監이감(?)된 광해군은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 피해의식이 충만했던 인조에게 다시 먼 제주도로 移配이배당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1637년(인조 15) 5월이었다.

그 먼 遠島원도에서 다시 한양으로 돌아 올 길을 전혀 없었다.

광해군은 자기가 죽을 자리로 보내 진 것이다.


강화도와 교동도에서 15년 이상의 세월을 보낸 뒤에 남은 여생을 보낼 광해군을 실은 이송선은 교동도의 포구에서 제주로 떠났다.

중사(中使)·별장(別將)·내관(內官)·도사(都事)·대전별감(大殿別監)나인,서리,나장(羅將)들도 승선해서 광해군을 감시 호송했다.

광해군에게 어디로 간다는 행선지를 알려 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의 선실을 장막으로 다 가려서 밖을 내다 볼 수도 없도록 했다.

인조는 쌀쌀한 바다 날씨에 먼 곳을 가는 광해군에게 솜옷 한 벌을 보내주어 약간의 성의 표시를 했다.

째째해 보이는 성의 표시였지만 광해군은 적어도 자기가 죽임을 당하는 운명으로 보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한 가닥 위안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1637년 6월 6일.

광해군의 유배선은 제주 어등포(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하였다.

포구에서 하루를 보낸 광해는 제주로 들어와 처소에 안치되었다.

광해군을 교동에서 제주까지 압송해온 호송 수행원 조직의 규모가 상당했던 규모로 보아 광해군이 아직 중요 감시 대상인의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유배 생활이라지만 거의 형무소와 같은 유폐 생활이었다.

광해군은 집 밖으로의 외출은 물론 방 밖으로의 외출도 제한을 받았다

그가 있던 집에는 감시 포졸만 30명이 넘었다.

하루 세 교대한다고보더라도 열 명의 포졸이 광해군에게서 항상 감시의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고 하겠다.

말이 유배지이지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광해군 말년에 제주 목사 이 시방이 광해군을 각별하게 모셨다고 특기하고 있는데 말년에 노쇠해진 광해군에대한 인간적인 연민의 정이 일어났기 때문인 듯하다.

이시방은 반정군에 말석으로 참가헸던 반정인사였다.

광해군에 대한 반정 패거리중에 유일하게 베푼 마지막 인정이었던 것이 광해군에게는 다행이다.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 7월 1일에 67세로 눈을 감았다.

그의 임종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단지 죽기전 자기가 죽으면 어렸을 때 헤어진 엄마 공빈 김씨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공빈 김씨는 선조의 후궁으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고 광해군이 아직 어렸을 때인 25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목사 이 시방이 광해군의 부음을 듣고 달려 가보니 계집종이 이미 싸늘하게 식은 광해군의 시신을 염을 하고 있었다한다.

시신이 상할 것을 염려한 이 시방은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지시가 있기전 즉시 상복을 입고 상을 치뤘다.

인조는 예조 참의를 보내서 예를 표하고 그 해 9월 그의 시신을 한양으로 운구해서 매장했다.

그리고 광해의 생존했던 딸에게 물질적인 특전을 베풀고 광해군의 외손들이 묘를 돌보도록 하였다.

그것이 그가 광해군에게 표했던 마지막이자 최대의 호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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