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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07. 2016

육지것의 제주인문이야기 I  유배지 정병조 적거터

유배지 乇羅탁라 그 네번째 장소, 葵園鄭丙朝 규원정병조 적거터

장수당 터와 정병조 적거 터


藏修堂장수당

책을 읽고 배움에 힘쓴다는 제주의 유생들이 공부하던 곳이다.

조선시대 학당으로는 향교 다음으로 오랜 전통을 지닌 장수당 터다.

1660년(현종 1년) 목사 이과가 창건하여 명도암 김진용을 스승으로 맞아 교육을 시작했다.

1665년(현종 6년) 귤림서원이 바로 남쪽에 설립되면서 그 강당으로 계속 교육의 전당이 되었다.

1871년(고종 8년) 귤림서원과 함께 철훼되었다.

한 말의 학자 규원 정병조가 제주에 유배되어 적거했던 터다.

1896년(건양 1년)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된 규원은 처음 교동 이종문가에 잠시 적거한 뒤 이 곳 사마제 터에서 적거했다.

적거 중에는 운양 김윤식을 중심으로 유배인들과 지방문인들이 어울려 귤원시회 활동을 전개했다.

1901년(광무 5년) 천주교난으로 위도로 이배되었다.


鄭丙朝정병조[1863~1945]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寬卿관경. 호는 葵園규원.

판관 기우(基雨)의 아들이다.


1882년(고종 19)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894년 세마(洗馬)를 거쳐 동궁시종관이 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 후 국장위원(國葬委員)에 임명되었으나 동궁시종관으로 있으면서 일본인들의 명성황후 시해음모를 미리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는 죄로 제주로 종신유형에 처해졌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으로 활약하며 《조선사(朝鮮史)》 편찬에 참여하였다.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자 1907년 특사로 풀려나 이듬해 궁내부 예장원과 중추원에서 다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후에는 조선총독부 취조국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13년 중추원 부찬의를 거쳐 1918년 참의로 승진하였다. 한편 《대전회통(大典會通)》을 번역하였으며, 조선어사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조선사(朝鮮史)》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시작(詩作)에도 뛰어났다. 저서에《녹어산관집(?魚山館集)》 4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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