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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07. 2016

육지것의 제주인문이야기 I  유배지 이세직 적거터

유배지 乇羅탁라 그 여덟번째 장소, 李世稙 이세직 적거터, 司馬齋사마재터

동문시장 일대는 조선시대 이래 여러 교육기관들이 명멸해간 곳이다.

제주 최초 중등교육기관인 의신학교(1907년)터,

생원·진사 등이 모여 공부하던 사마재司馬齋(1879년) 터,

향교 창건 터 등을 알리는 표석들이 길모퉁이마다 숨어 있다.


그 중 사마재는 1879년(고종16)에 목사 백낙연이 창건한 것으로 제주지방의 생원, 진사 등 사마시에 합격한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이들은 이곳에 모여 강독 강론을 펴기도 하고, 대과준비를 위한 강습을 받기도 하였다.

학문 연마를 목적으로 세워진 사마재에 1876년(고종 16) 8월에 유배 온 이세직이 세를 내어 살면서 학생들을 모아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당시 제주도에 유배 왔던 운양 김윤식이 남긴 『속음청사(續陰晴史)』를 보면

“처음에 이세직이 사마재에 세를 내어 살면서, 학생들을 모아 일본어를 가르치니 읍내 소년배가 많이 이세직을 쫓아다녔는데 적객 이태황과 최형순도 가서 배우고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태황이 세들어 살고 있던 집주인 훈장 이규항이 이 사실을 알고 이세직과 제자들을 찾아가

“너희들이 왜놈을 닮을까 두렵다”

고 하자 사제 모두가 화가 나서 이규항을 발로 차고 사마재 마당에 세운 뒤 이규항을 책망하였다.

이규항 훈장은 당시 60살의 노인으로 유생에서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는데, 소년배들에게 욕을 당하자 통문으로 유생 39명을 모이게 하여

“잡것들의 소굴을 돌려 달라”고 관에 호소했다.

이에 제주목사는

“적거인은 마땅히 두문하여야 함에도 무리를 모아 일어를 가르치면서 사단을 일으키고 있다”며

“사마재는 유림에게 돌려주고, 학도들은? 해산하라. 때리고 욕을 한 사람은 잡아 가두고 엄히 징계하라”고 명했다.

이 사건은 당시 구한말 제주에도 일본어 강습이 이루어졌으며, 많은 소년들은 물론 유배객들까지 새로운 문물에 접하려는 의식이 강했으나, 한편으로는 일본에 대한 경계심과 배일 감정이 사회 저변에 깔려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주보 적거비에서 뒤를 돌아 다시 오던 길로 쭉 내려가면 농협은행이 나오는데, 이 농협 옆에 구한말 이세직선생이 적거한 사마재터비가 있다.

사마재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06

사마제 터

제주시 중앙로에서 동문재래 시장으로 들어가다 보면 농협중앙회  제주시지부가 있다.

제주지방의 생원, 진사 등 사마시에 합격한 유생들이 모이던 사마제 터다.

1879년(고종 16년) 목사 백낙연이 창건하였는데 이들은 이 곳에 모여 강독 강론을 펴기도 하고 대과준비를 위한 강습을 받기도 하였다.

19세기말에는 유배 온 이세직이 이 곳에 묵으며 일어 강습소를 열었다가 지방 유림과 충돌이 일어나 다시 유림에 되돌려졌다.


이일직(李逸稙=이세직(李世稙))  

1894년 5?월 박영효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침  

1894년 3월 민영소의 밀명을 받아 홍종우와 함께 김옥균 암살에 참여

1896년(건양 1) 법부주사, 법부검사와 형사국장을 역임

1898년 8월에 제주에 종신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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