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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Aug 21. 2016

일반인문 LXXIII 宗敎 종교 religion 04

儒敎유교confucianism 01 宗敎性종교성 유학 1/2

유학을 이야기 할 때는 빠지지 말아야 할 부분이 종교성에 관한 부분이다.

유교는 종교일까, 아닐까?


17세기 이후 중국에서 활약한 서양선교사들은 처음으로 유교의 종교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공자나 조상에 대한 제례행위를 종교적 행위로 볼것인가가 주요 쟁점이 된것이다.

유교가 종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중국에서 활약한 Matteo Ricci 마테오리치와 같은 Society of Jesus예수회의 선교사들이었다.

Matteo Ricci 마테오리치

공자나 조상에 대한 제례행위를 종교적 행위로 간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는데, 마테오리치는 보다 폭넓은 포교를 위해 유학은 종교가 아니므로 제례행위는 우상숭배를 금하는 기독교 교리와 충돌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반면 Dominican Order 도미니크수도회와 Franciscan Order 프란체스코회의 선교사들은 유교는 종교이므로 제례행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논쟁은 선교사들 내부의 쟁점에 불과했다.

1893년 만국종교회에 중국 대표로 참석한 彭光譽팽광예는 유학은 종교가 아니라 학문이며 유학 이전 시대의 무속신앙과 후대에 나온 도교및 불교는 종교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중국인들의 유학에 대한 자부심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彭光譽팽광예

그러나 이듬해 청일전쟁에서 패한 뒤 서구 과학기술의 위력을 절감하고 강한 중국을 위해 서양의 기독교와 같은 강한 정신력이되는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變法自彊運動변법자강운동(혹은 戊戌變法무술변법)을 일으킨 캉유웨이康有爲는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공자를 인류 최고의 교주이자 神明成王신명성왕이라 칭하며 명칭도 기독교를 흉내내 孔敎공교로 바꿔 불렀다.


기독교라는 명칭은 그리스도의 한자식 표기인 지리쓰두基利斯督(기리사독)에서 가운데 2글자를 빼고 종교의 교자를 합한 基督敎기독교가 만들어 진것이고 원래의 의미는 개신교가 아닌 카톨릭을 지칭한것이었다.

梁啓超양계초

이후 캉유웨이의 제자인 梁啓超양계초는 변법이 실패하자 유학이 종교가 아니라는 쪽으로 돌아 섰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 칸트를 공부하고 돌아온 蔡元培채원배는 처음엔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가 신해혁명후 초대 교육부 장관으로 부임하면서 반대쪽으로 선회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지식인 대부분이 종교가 아니라는 의견이 대세로 작용하고 유학이 봉건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며 다시금 유학의 종교논란은 다시 불붙지만 여전히 종교가 아니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구한말이후 이러한 논쟁이 일기는 하였으나 유교의 종교화운동은 실패하고 유학 자체도 서서히 고사해 갔다.

1995년 성균관유도회는 유교제도개혁이 중심이 되는 종헌을 제정하였는데 명칭을 「성균관유교회」로 바꾸고 공자를 교주로 「四書五經사서오경」을 경전으로 삼는 사실상 유교의 종교화라고 할 수 있다.

성균관유교회 석천대전

*四書사서; 論語논어 孟子맹자 大學대학 中庸중용

 五經오경; 詩시, 書서, 易역, 禮예기, 春秋춘추


가지노부유키加地伸行는 「沈默の宗敎儒敎 침묵의 종교, 유교」 에서 크리스트교나 불교 유교 모두 심층에 가지고 있는 종교성을 이야기 하며 유교를 표층에만 가지고 있는 도덕성만을 강조해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중국철학연구자들의 잘못이라고 한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Rudolf otto 루돌프오토가 20세기 초에 저술한 성스러움의 의미에서는 모든종교의 핵심이 되는 것은 초월적인 대상을 접할때 나타나는 성스러운 감정인 「Numinose 누멘적 감정」이 없는 것은 종교라 부를 수 없다고 했다.

실제로 유대교,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도교등 종교 대부분에는 초월적 성스러움이 내재 되어 있다.

전 세계의 주요 종교에서는 대부분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고 여기며 그에게 복을 구한다.


중동에서 나온 세 가지 유일신교는 물론이고 힌두교도 그러하며 중국의 민족종교인 도교 또한 그렇다.

그리고 기복적인 요소보다는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한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조차도 소수의 전문 수행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도들은 부처나 보살들을 구복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대교의 모세를 비롯한 수많은 선지자들도 이적으로써 강렬한 성스러움을 발산하고 있고 기독교의 예수는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존재 자체가 이적으로 인한 성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바다를 갈라놓은 것이나 동정녀에게서 태어나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하는 것은 분명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초월자에 대한 강렬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바로 종교적 성스러움과 직결된다.


불교 또한 마찬가지다.

붓다의 원래 의미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어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의 경지에 든 자라는 의미였으므로 특이한 성스러움의 Aura아우라(사람이나 물체에서 발산하는 기운 또는 영기)는 없었다.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렵다는 극단의 고행과 단식을 했기 때문에 존경심을 자아내는 정도다.

그러나 후대 대승불교의 경전으로 갈수록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天眼通천안통,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는 天耳通천이통 등의 영적 초능력을 다 갖추고 이적을 밥 먹듯이 행하는 초인적인 존재로 변모했다.

노자 또한 본의 아니게 도교의 교주로 등극한 뒤에는 보통 사람이 다다를 수 없는 특이한 행적들로 꾸며졌다.

이렇게 전통적인 종교의 성스러움은 특이함으로 가득 차 있다.


유교에는 그런 특이한 성스러움이 없다.


공자는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적은 물론이고 특이한 성스러움의 아우라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일찍이 은미한 것을 찾고 괴이한 일을 행하면 후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그런 일을 하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심지어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조차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후대의 계승자들도 모두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에 불과할 뿐 조그마한 이적도 행한 적이 없고 특별한 성스러움을 보여준 적도 없다.


유학에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신앙이 없다.

유학에도 분명 운명을 주재하는 더 높은 존재를 상정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늘이다.

은대는 물론 주대에도 천자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냈으며 그것은 이후로도 계속된 전통이다.

그러나 은대에는 모든 일을 하늘에 묻고 하늘에 복도 기원했지만 주대 이후 중국인들은 하늘을 인정은 하되 하늘에 대한 강한 신앙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공자는 하늘에 구체적인 복을 구하거나 액운을 뿌리치기 위해 하늘에 기도를 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조상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공자는 일찍이 제사를 지낼 때는 마치 귀신이 옆에 있는 듯이 지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분명히 귀신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전통의 답습을 중시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천신, 지신, 곡식신, 조상신 등에 대한 제례의식을 그대로 수용했지만 그 구체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꺼렸다.

그리고 그는 귀신에 대해 공경하되 멀리하라고 가르쳤다.


전 세계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지상에서의 삶이 끝이 아님을 강조한다.

하지만 유학에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

철학적으로 보았을 때 유교는 분명 죽음보다는 삶을 더 중시한다.

공자는 죽음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자로의 질문에 대해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

라고 답했다.


未能事人 焉能事鬼 미능사인 언능사귀

未知生 焉知死        미지생 언지사

- 論語 先進 논어 선진


공자는 분명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불가지론 또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현실의 삶에 대해서 더 치열하게 궁구하느라 죽음에 대해서는 궁구할 겨를이 없다는 뜻이다.

타 종교에 비해 유교는 죽음보다는 삶을 훨씬 더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일반 신도들을 위한 종교의례나 경전 외에 전문 수도자를 위한 본격적인 수도법이 있다.

이는 각 종교의 궁극적인 경지를 체득하려는 일종의 심신수양법이다.

유대교에는 선지자들과 랍비들 사이에 비밀리에 전수되어오던 Kabbalah카발라라는 명상법이 있고  기독교에도 수도원의 수사들이 행하는  contemplation (觀想祈禱관상기도)라는 전문적인 명상법이 있다.

이슬람에도 Shi'a시아파에서 Sufism수피즘이라는 명상법이 있고 인도의 힌두교에는 요가명상법이, 불교에는 vipassanā 위빠사나, 話頭禪화두선등 다양한 명상법이 있고, 도교에도 丹學단학 명상이 있다.

이런 명상법들은 대부분 고도의 정신집중이나 관조를 통해 내면의 깊은 고요와 평화, 거룩한 존재와의 합일감, 황홀감, 자아와 우주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수양법들은 성스러움의 발현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많은 전문적인 종교인들은 바로 이 수도를 통해 스스로 성스러움을 체험하고 또한 일반 신도들에게 성스러움의 아우라를 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학에는 그런 수도의 전통이 없다.

이런 수도 전통의 부재는 유교의 약점 가운데 하나였다.

이 때문에 체계적인 수양론을 지니고 있던 불교와 도교가 유행하기 시작하자 유학은 윤리 도덕을 선양하려는 학문인것이다.

송대에 유교의 부흥을 주장한 많은 신유학자들이 집중적으로 고민하고 보완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종교학의 관점에서 볼 때 특히 서양종교의 관점에서 볼 때 유교는 종교라고 인정하기 어렵고 설령 인정한다 해도 분명 미발달된 종교로 보이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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