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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Aug 17. 2016

일반인문 LXXII 덕혜옹주 그리고 낙선재

; 영화로 재 조명된 인물과 황가의 마자막 체취가 서린 궁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그녀의 숨겨진 이야기 <덕혜옹주>


최근 개봉한 역사극으로 논쟁이 뜨겁다.

사실이냐 허구냐의 문제는 역사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필연적으로 이야기되는 부분이다.

광해가 그랬고, 관상이 그랬고, 명량, 사도, 허준, 정도전이 그랬다.

분명 허구가 가미되어 영화로 만들어진것이 분명하다.

그래, 영화가 나올때마다 사서를 다시 뒤져가며 그 역사의 내용을 확인하고 글을 올려왔다.

아무래도 근현대사를 다룬 작품이다보니 그 논쟁이 더욱 많은것 같다.

건축가이다보니 많은 논쟁사이에서 덕혜옹주가 마지막 생을 지낸 낙선재와 함께 엮어본다.

昌德宮 樂善齋 창덕궁 낙선재

헌종은 명헌왕후에게서 후사가 없자 1847년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맞아 중희당 동쪽에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건립한다.

군자의 덕목 중에서도 으뜸이 되는 善선을 즐기는 집이라는 의미의 樂善齋낙선재는 헌종의 사랑채다.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된 후 참담한 고종을 가까이 모시던 엄 상궁은 1897년 나이 44세에 은垠을 낳는다.

그래 영의정과 동급 품계인 후궁 서열 1위 빈이 된다.

1900년 이 은은 적자라서 왕 이름에 친자를 넣어 영친왕英親王이 된다.

엄 상궁은 후궁이라 계비가 될 수 없지만 워낙 아들이 귀해 그에 준하는 예우를 받은것이다.

1392년 건국 후 506년간 중국의 황제에게 조공을 갖다 바치며 머리를 조아리던 조선 제 26대 왕 고종은 대한제국을 공포하고 1899년 황천상제에게 제사 드리는 제단을 만들기 위해 소공동에 명나라 사신들을 재우는 영빈관을 때려 부수고 돌 제단을 둥그렇게 3단으로 높여 쌓았다.

환구단.

환구단 옆에 연이어 천황상제의 위패를 모시는 3층 규모의 팔각정 황궁우 건립.  

1907년 7월 20일 덕수궁 중화전에서 순종황제의 즉위식을 하지만 순종황제는 부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데 항의해 불참하자 일제는 대리인 앉혀 놓고 연다.

조선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영친왕의 이복형인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 협박해

1907년 영친왕은 11살에 볼모로 시모노세키 가는 관부연락선에 오르고.

1910년 대한제국 멸망.

1907년 황제의 자리에 물러나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고종에게 삶의 큰 위안이되었던 인물이 소주방 나인 출신으로 고종의 후궁이 되었던 福寧堂복녕당 양씨.

1912년 5월 25일 두사람사이에 고종이 회갑을 맞던 해에 얻은 늦둥이 딸 덕혜옹주가 태어난다.

역사의 격랑은 망국의 옹주에게 만만치 않은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덕혜옹주 돌 사진

덕혜의 출산 이후 고종은 늘 그녀와 함께 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덕혜를 데려 왔다. 

1916년 4월에 고종은 덕수궁의 浚明堂준명당에 다섯 살 난 덕혜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덕혜가 외롭지 않게 동년배 5~6명을 함께 이곳에 다니게 했다.

덕혜옹주 유년시절 가운데

덕혜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어머니인 귀인 양씨가 아닌 아버지 고종과 함께 보냈기에, 아버지에 대한 정이 그만큼 깊었다. 

왼쪽부터 영친왕, 순조, 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한때 덕혜의 나이 이제 겨우 8살로 개인적인 슬픔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친의 죽음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1921년 고종의 삼년상이 끝난 후 10살이 된 덕혜에게 조선 황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일제는  저한 일본식 교육을 시키려 했다.

1921년 4월 덕혜는 일본 거류민이 세운 日出小學校일출소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까지도 그녀는 ‘복녕당 아기씨’로 불리다, 이때에 ‘덕혜’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받게 되었다. - 순종실록 1921년 5월 4일

일출소학교 시절

일제의 압박에 굴복한 순종은 14세의 어린 소녀에게 1925년 3월 24일 덕혜의 동경 유학을 명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영친왕은 1920년 나시모토 마사코와 강제 결혼당하고 일본여자와 결혼 했다는 이유로 종친회에서도 연락을 끊는다.

이듬해 1921년 첫아들 진晋 출생하고 아들 업고 15년만의 고국방문하지만 황세손 이 진 무리한 여독으로 덕수궁에서 8개월의 나이로 요절하고 영친왕은 일본으로 다시 소환되어 건너가고 일본 황족인 부인 마시코는 이방자로 개명한다.

1925년 3월 30일 덕혜가 동경에 도착해서 간 곳은 오빠인 영친왕과 그 부인 이방자가 거처하던 집이었다.

훗날 덕혜와 이방자는 40여 년 만에 낙선재에서 노년의 모습으로 재회를 하게 된다.

1928년 순종의 3년 상이 끝난 후 계비 윤씨는 낙선재로 들어가고...

덕혜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1926년 오빠 순종의 죽음과 1929년 생모 양씨의 죽음이었다. 

덕혜는 이국 땅에서 말 그대로 고아가 되었다.

이후 1931년 5월 8일 덕혜는 일본의 정략에 의해 대마도 백작 宗武志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게된다.

남편 소 다케유키는 훤칠한 미남이었으며, 동경대 영문학과를 나온 당대의 엘리트 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결혼 1년 후에는 딸 正惠정혜가 태어났고 덕혜는 얼마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신적 스트레스로 덕혜는 결혼 후 조현병에 시달렸고 남편은 집에서 간병을 하다가, 1946년 일제의 패망 후 소 다케유키는 더 이상 귀족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병원으로 덕혜를 옮겼다. 

결국 덕혜는 법적 보호자였던 영친왕과의 합의를 통해 남편과 이혼을 했다. 

1956년 딸 정혜의 실종과 죽음은 덕혜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1945년 해방 이후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덕혜는 어린 시절을 보낸 고국의 궁궐에 가기를 원했다. 

서울신문의 김을한 기자가 덕혜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귀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으나 조선 황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덕혜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가 박정희 정부 시절에 다시 탄원서를 올린 끝에 마침내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덕혜는 1962년 1월 26일, 37년 만에 14세의 꽃다운 소녀가 어느덧 51세의 중년 여인으로, 그것도 풍상에 찌든 얼굴에 초점 없는 눈매를 한 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미 심신이 지친상태로 귀국하는 덕혜

1930년 영친왕은 도쿄 치요다구에 자택 신축하고 1931년 둘째 아들 구玖 출산하고 

이구

1945년 일본 패망하자 이방자 부친 전범으로 구속되고 처갓집 전 재산 몰수되자 헐값에 자택을 프린스 호텔 측에 넘기고 월세 전전한다.

영친왕도 정권의 반대로 환국이 금지된다.

이구는 1950년 도쿄의 가큐슈인 고등과에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점령군인 미국 맥아더 장군의 주선으로 1956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 건축과 입학하고 1958년 세계적인 거장 아이엠 페이 사무실 입사하여 건축가의 길을 걷는다.

덕혜옹주의 입국 다음해에 군사정권의 허가로 영친왕은 기다리던 환국을 하게된다.

그러나 이미 70세의 좋지않은 몸상태의 여행이라 도착하자 뇌졸증으로 병원행이다.


먼저 도착한  덕혜 2년뒤, 1964년도착한 황세손 이구는 창덕궁의 낙선재로 주거 제한한다.

이미 석복헌에는 순종의 비 윤씨가, 낙선재에는 미리 귀국한 이방자 여사가, 수강재에는 덕혜옹주 거주 중이다.

국가에서 주는 연 1천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총 19명이 생활하고.

1847년 건립된 ㅁ자형식의 낙선재.

솟을대문 위 현판, 長樂門장락문(오래도록 즐겁게 사는 집의 문)이 무색하다.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는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9일 뒤인 4월 30일 이방자 여사도 생을 마감했다.

귀국 후에도 지병으로 고생을 하며 불운한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 

그녀가 정신이 맑을 때 썼다는 낙서 한 장이 남아 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이제 낙선재는 문을 닫고.

2005년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객실에서 변사체 발견. 이구다.

곡기를 끊어 영양실조로 사망.


너무 과한 포장이 역사의 진실에서 멀어져 왜곡된 역사표현으로 보일수 있으나 언제나 그렇듯 영화는 영화로 봐야한다.


광해

https://brunch.co.kr/@architect-shlee/122

관상

http://blog.naver.com/shek99/220083279443

명량

https://www.facebook.com/seongho.lee.121/posts/727031754029803

사도

https://brunch.co.kr/@architect-shlee/160

허준

https://brunch.co.kr/@architect-shlee/412

정도전

https://brunch.co.kr/@architect-shlee/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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