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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Nov 07.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VI 충청 암서재

스물. 화양계곡, 巖棲齋암서재

1659년 한때 자신의 제자였고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계획의 정치적 동지였던 孝宗효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난 후 송시열은 보위를 이은 顯宗현종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1666년 8월, 우암 금사담으로 낙향.

맑은 물과 깨끗한 모래가 반짝이는 계곡속의 못.

원래 화양동은 華陽九曲화양구곡이라고 불리는 빼어난 풍경을 자랑한 명승지였다.

송시열이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로는 남송 성리학의 鼻祖비조인 朱子주자(주희)의 武夷九曲무이구곡과 비교해 조선의 주자인 宋子송자(송시열)의 華陽九曲화양구곡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화양구곡은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면서 경천벽→운영담→읍궁암→금사담→첨성대→능운대→와룡암→학소대→파곶으로 이어진다.

화양구곡의 중심.

바위위에 정자 짓고 현판을 걸었다.

巖棲齋 암서재.


송시열이 이 서재를 지을 당시 이름은 암서재가 아니라 巖齋암재였다.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은 후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허물어졌는데, 그가 죽은 뒤 26년이 흐른 1715년(숙종 41)에 김진옥이 서재를 중건했다.  

다시 6년이 지나 권상하가 '암서재'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이때는 남인이 권력에서 완전히 실각하고 송시열의 학통을 이은 제자들인 서인(노론)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민정중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의종에게 非禮不動비례부동이라는 글씨를 직접 받아왔다.

예의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행동하지 않는다.

우암은 암반에 새겼다.

1696년 숙종 사액 현판 하사.

1717년 계곡에 임진왜란때 도와준 명나라의 명종, 신종묘인 만동묘를 만든다.

萬折必東 만절필동

황하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

再造之恩 재조지은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게 도움을 준 은인

1896년 흥선대원군이 전부 철거.

1970년 암서재 중건.

2009년 수백억 투입 만동묘 일원 중건.


지금은 충북 유형문화제 제175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목조기와로 방 2칸, 마루 1칸으로 되어 있다. 방 안에는 현판 5점이 걸려 있고, 건물 앞으로는 일각문이 세워져 있다.

懷德회덕에서 이 화양동 계곡으로 들어오면 몸과 마음이 상쾌해 마치 신선의 세계에 온 듯하다.

이곳에서 회덕을 돌아보면 그곳은 참으로 塵世진세(티끌 같은 세상)이다.

그런데 정사에서 다시 北齋북재로 옮긴 후에는, 북재가 더 빼어난 신선의 세계여서 정사가 오히려 진세인 듯하다.

이곳은 맑고 기이한 곳이라고 할 만하니, 다시 무릉도원 가는 길을 찾을 까닭이 있겠는가?

- 尤庵 宋時烈 우암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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