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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12.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 강원 강릉 선교장

둘. 아흔아홉칸을 넘어서 최대의 조선가옥, 선교장

조선시대 최대의 칼잡이 태종은 고민이다.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한 효령대군은 세종대왕에게 부담을 줄까봐 절로 들어가 버렸다.

1450년 세종 가고,

1462년 양녕대군도 가고.

1469년 조선의 제 8대 왕 예종도 가고.

1486년 91세로 효령대군도 8명의 왕을 보내고 생을 다한다.


내 후손들은 당상관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그리고 가능한 빨리 한양을 떠라라고 유언을 남긴다.

당상관은 의자에 앉아 서류에 도장 찍는 정 3품 이상의 벼슬.

후손은 번창해 아들 7명에, 손자 33명, 증손자 109명이나 된다.

전주 이 씨 105파 중 사람 수도 가장 많고 가장 센 집안이다.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이 유언을 실천한다.

8명의 왕이 미안해 계속 효령대군에게 하사한 가히 수십만 평에 이르는 전국의 땅을 다 팔았다.

충주에 살던 이내번은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안동 권씨와 강릉으로 옮겨왔다.


처음에는 경포대 부근의 저동에 기반을 잡고 가산을 일으킨 이내번은 후대가 번성할 터전을 찾게 되었다.

하루는 집터를 찾고 있는데 어디선가 족제비가 한 마리씩 나타나더니 조금 뒤에는 한 무리를 이루어 서북쪽으로 몰려갔다.

이를 신기하게 여겨 그 뒤를 쫓던 이내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울창한 숲 속에 들어가게 되었고, 숲 속의 경치가 아름다워 집터로 삼고 선교장(다리를 건너야 들어 갈 수 있는 집이고 집 이름에 장莊이 붙으면 자고가도 되는 곳)을 지었다.

지금은 물이 많이 빠져 경포호수의 둘레가 4km 밖에 안 되지만 당시는 둘레가 12km에 달해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었다

정문 현판은 월하문.

정문이 소박하다.

해가 지고 달이 뜬 밤에 하루 묵고 갈 거처를 찾는 나그네가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고 아서라 발길을 돌릴까싶어 대문을 작게 만든 거죠.

주련.

새들은 연못가의 나무숲으로 자러 들어가고 스님은 잠자리를 찾아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

60m에 걸쳐 펼쳐지는 전면의 행랑채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11개의 하인들 방과 6개의 광, 부엌 2개, 대문 2개가 연속되고, 당시 선교장의 하인은 1백 명에 이른다.  

솟을대문의 현판은 仙嶠幽居(선교유거;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

선교장의 전체 칸수는 99칸이었지만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84칸이다.

안마당 들어서면 정면에 사랑채다.

悅話堂(열화당; 가까운 이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는 집.)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이름.

그 유명한 출판사 열화당의 사장이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13세손 이후가 1815년 건립.

이후의 별명이 산림처사.

산골에 파묻혀 글이나 읽고 지내는 사람이다.

열화당에 묵고 간 러시아공사가 선물로 러시아풍 처마를 설치해 주었다.

설계는 당시 왕실의 전속건축가였던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

열화당 우측의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다.

안방 뒤로 골방이 달렸고 반침이 연이어 있다.

안채는 마루가 낮고 마당이 좁은 반면에 사랑채인 열화당은 마루가 높고 마당이 널찍하다.

이는 추운 북쪽 지방의 폐쇄성과 따뜻한 남쪽 지방의 개방성이 복합된 독특한 아이템이다.

안채는 “집안의 해”라고 불리는 “아내”와 아낙들의 공간이다.

그녀들은 남정네들이 부엌에 드나들면 안 된다는 논리로 자신들만의 독립된 자유공간을 확보했는데 바로 그 여권이 건축의 설계과정에서부터 영향을 미쳐서 집주인조차 외곽으로 밀려 격리된 사랑채에 머물게 했다.

동별당을 지나 바깥마당으로 나오면 조선시대 최고의 명품 活來亭(활래정;다시 힘차게 살아나는 정자.)을 만날 수 있다.

연못엔 연꽃이 활짝 만개하고 물위에 쌍정자가 둥실둥실 떠 있고.

1816년 이후 건립.

벽도 없이 창호지사이로 바람이 자유로이 들락날락하면서 선교장의 자유 분망함을 노래한다.

몇해전부터 선교장은 활래정을 전통다실로 개방했다.

연간 방문객 10만 명.

선교장은 원래 3만평이었지만 지금은 1만평.

선교장은 대한민국 최고의 한옥이다.

대문만 12개

선교장 땅이 북으로는 양양, 남으로는 삼척, 동으로는 동해 바닷가까지 이어졌고 서로는 대관령 넘어 평창까지 이르렀다고하여 한 때 동대문에서 강릉까지 갈 때 남의 땅 밟지 않고 간다는 말도 돌았다.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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