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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12.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VI 충청 회덕향교

대전을 거닐다...01  희미해지는 기억 회덕향교

볼것없어 보이는 대전을 거닌다.

 

대덕구.

원래 이곳 지명은 회덕.

어진 선비들이 모여 사는 위대한 동네.

경부선 철도 개통 전, 더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 또는 구한 말이라고 불리는 시기에 대전의 중심지는 어디였을까.

懷德회덕이다.

1935년 대전과 회덕을 병합하면서 한 자씩 따 이상하지만 대덕구가 되고.

회덕이라는 이름은 논어에 나오는 말을 인용해 생긴 것이다.


大人懷德 小人懷土 대인회덕 소인회토

대인은 가슴에 덕을 품고 소인은 가슴에 고향을 품는다


懷德鄕校 회덕향교

전국 240여개 향교 중 가장 아름다운 향교중 하나는 회덕향교다.

조선 창건 1392년 회덕향교는 1400년.

주소 대전시 대덕구 읍내동 134.

조선시대 이곳은 대전시 중심지.

왜놈들이 대전역을 동구로 옮기면서 여긴 왕따. 선비들의 성지인 향교는 사무라이들의 공격 목표가 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다.


명륜당.

사람을 사람답게 기르는 집.

조선 최초의 명륜당이 문묘에 건립된 건 1398년.

선생님들이 주무시는 좌우 협실은 온돌방.

중앙은 강당이고 동쪽 방은 제사음식 준비하는 전사청, 서쪽 방은 서재.

공자를 비롯한 5성(공자, 안자, 자사- 공자의 친손자, 증자, 맹자) 4현.

우리의 18현 모시고.

이 동네에서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김집 배출.

前學後廟전학후묘(앞에 명륜당이 뒤에 대성전)

대성전에서는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지역 내의 헌관, 제관, 일반유림 등이 모여 석전제(釋奠祭)를 올린다.

상정일은 음력으로 매달 첫째 드는 정(丁)의 날.

정일은 정성스럽고 편안한 날 말하는 거다.

학생들 숙소인 동서재는 소실되었는데 동재에는 양반 자녀, 서재에는 서얼들이 묵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1905년 1월1일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대전역이 본격 영업을 시작하기 전 지금의 중앙로 일대는 민가가 몇 안 되는, 논과 밭뿐인 한가로운 농촌. 현재의 중앙로 일대를 비롯한 주변지역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유 지명인 ‘한밭’으로 불리던 곳이다.

대전역과 대전천, 중앙로 일대에 대전역 개통을 전후해 일본인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해 일본인들 거류지 형성하여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자 이들을 위한 식당, 여관 등 숙박업소, 경찰 주재소, 헌병대 등이 자리 잡으면서 도심 타운이 만들어 진다.

그렇지만 이 같은 서비스 시설이나 치안유지 기관은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지 한국인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현감 또는 원님이라고 불리던 행정수장이 행정을 집행하고 기거하던 회덕현청이 현재의 대덕구 읍내동에 있었으며 주변에 지역행정을 위한 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덕구 읍내동이 읍(邑)의 한 가운데라는 뜻의 읍내동이라는 지명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즉 경부선 철도 개통 전 대전의 중심지는 현재의 대덕구 읍내동뿐만 아니라 읍내동을 에워싸고 있는 원촌동, 와동, 연축동, 중리동, 법동, 송촌동 등이다.

지역행정을 위한 기관뿐만 아니라 제월당·동춘당 등 우리나라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문가를 비롯해 지역유지 등이 이 지역에 살았다.

일본 제국주의가 회덕현청이 자리 잡고 있었던 곳에 경부선 철도가 지나게 하고, 현 대전의 중심지가 원래 중심지였던 회덕이 아닌 중앙로 일대로 형성되도록 한 것은 다분히 고의적이었다.

경부선 철도가 회덕현청을 지나고 읍내동을 가로지르게 한 것은 당시 대전의 중심지, 지역의 최고 행정기관이 있었던 읍내동 일대를 둘로 갈라놓아 쇠락케 하고 지기(地氣)를 꺾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신탄진이나 인근 지역에서 회덕향교로 소풍을 올 정도로 부귀영화를 누렸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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