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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Mar 15. 2017

건축가의 역사 읽기 IV 근현대사

다섯번째. 한국전쟁 그 후(전쟁 후~516쿠테타) 4/5

이승만 정권의 붕괴
315부정선거와 事件의거


오늘은 315의거 기념일이다.

어쩌면 낯선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사건이지만 

6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겐 현실이였고 

7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에겐 살아 있는 역사가, 

8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에겐 역사적 토대가, 

9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에겐 귀감이 된 전설적 역사가 되었던 사건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1958년 4월 선거는 이승만정권의 엄청난 부정선거로 시작되었다.

공갈과 협박, 매수, 선거 운동 방해 및 운동원들에 대한 폭력, 투표 방해 행위, 투표함 바꿔치기, 일부 농총지역에서 공개적집단투표를 하기도 하였고 군 부대에서는 병사가 투표한 용지를 상관이 확인하는 등 온갖 방법의 부정이 자행 되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진정한 정치적 대변자를 갖고 있지 못하였던 민중들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거부와 증오심을 야당인 민주당에 투표함으로써 분명하게 알렸으며 당시로서는 그것만이 독재자 이승만에 대한 유일한 공격수단이었고 투쟁의 방법이었다. 

결과는 선거전 131석이던 자유당의석은 126석으로 줄었고 서울에서는 본래 자유당이 가지고 있던 의석 16개 중에서 15개가 민주당에 돌아갔다.

401 1958년 5월 4대 민의원 선거에 앞서 선거사무소를 개설한 김두한
1958년 제 4 대 민의원 선거 민주당의 합동강연이 열리고 있는 장충단 공원

여기서 손을 들고 투항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작금의 현실속에 반복되는 역사의 수레바퀴의 모습이 아닐까.

이승만의 권력에 도전하거나 반대하는 정치세력과 민중들을 탄압하고 이승의 독재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1958년 11월 이승만은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시장과 지방공무원을 국민이 직접 뽑는 대신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는 법안과 국가보안법의 범위를 넓히고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 개정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유력 언론사들을 비롯한 야당 정치인과 민중들은 이승만 독재권력의 음모에 대하여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으나 이승만정권은 1958년 12월 24일 법 개정을 반대하는 야당의원들을 지하실에 감금한 채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말았다. 

격분한 야당은 '국민주권사수투쟁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더이상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의사당을 박차고 나가 거리의 군중들과 합류했다. 

William H. Draper 윌리암 드레이퍼 특사와 Douglas MacArthur 맥아더장군
Walter C, Dowling 다우링 주한미대사(가운데)

애초에는 모든 문제를 한국의 국내문제로 돌리며 불간섭의 원칙을 천명하던 미국 정부는 이승만에 대한 남한 민중의 거센 불만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향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다 Walter C, Dowling 다우링 주한미대사와 William H. Draper 윌리암 드레이퍼 특사와 국무성 동북아시아국 차장 등이 내한하여 야당인 민주당에게 새 국가보안법을 인정하고 이승만 정부와 협력할 것을 설득하여 초록은 동색이라고 민주당은 미국의 요구를 수락하고 국가보안법 개정 등에 동의하였다. 

민주당의 배신과 이승만 독재권력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의 시위는 점점 더 격화되어 갔고 이에 이승만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언론과 민중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더 높여 1959년 4월 30일 어처구니 없게도 미 군정 법령 88호(신문과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조항, 1961. 12. 30 폐기)를 근거로 이승만에 가장 비판적이던 경향신문을 강제 폐간시켜 버렸다.

경향신문을 강제 폐간


1960년 3월 15일

자유당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그리고 민주당에서는 미군정 당시 경무부장으로 악명을 떨쳤던 조병옥과 화려한 친일 경력의 장면이 각각 정,부통령 후보로 나섰다.

야당탄압 선거운동을 방해, 유권자 매수, 깡패고용하는등 1958년의 선거와는 비교도 안되는 부정이 자행되었다.

이제 끓던 가마 솥이 절정에 달하는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부정선거 책동에 항거하는 민중들의 투쟁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나갔는데 이는 민주당에 대한 지지 투쟁이라기 보다는 이승만 독재권력에 대한 항거였고 부정선거 음모를 분쇄키 위한 투쟁이었다.

2월 28일 대구에서의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3월 5일에는 서울에서, 

3월 8일에는 대전에서, 

3월 10일에는 수원에서 격렬한 대규모 학생시위가 있었고 

3월 12일과 투표 바로 전날인 14일 부산에서도 고등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1960년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미 육군병원에서 뇌수술을 받던 중 사망하고 이로인해 이승만은 쉽게 당선이 확보되자 선거의 촛점과 관심은 이기붕과 장면의 부통령 선거로 모아졌다. 

1956년 선거에서 이기붕에 압승한 바 있는 장면의 당선을 거의 확실시 하는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조병옥 사망

3월 15일, 더 이상 선거가 아니다.

전국 각 투표소에는 경찰의 비상선이 쳐지고 대한반공청년단 등 깡패들이 투표소 주변을 설쳐대며 공포스런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야당의 선거감시원은 내쫒겼으며 투표를 끝낸 일반인들의 투표소 접근은 철저히 차단되었다.

폭력배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공개적인 투표가 행해졌으며 그런 공갈 협박에 굴하지 않고 야당후보에게 던져진 표는 그자리에서 수거되어 버리고 당연한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은 폭력배들의 무차별 폭력에 희생되었다. 

어떤 투표함은 불타기도 하고 몰래 바뀌기도 했으며 아예 무시되어 버린 것도 허다했고 이 가운데 이승만이 총 투표의 97% 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기붕은 822만 587표를 얻어 장면의 184만 4,257표를 비웃듯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투표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끓어 넘치는 가마 솥은 폭발한다.

3월 15일 경남 마산에서는 투표 부정을 보다 못한 학생들의 주도로 수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돌입하였고 경찰은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학생들과 시민들 15명 이상이 사살되고 수백 명이 다쳤다. 

이 과정에서 고등학생이었던 김주열 군이 미제 최루탄이 눈에 밖혀 사망하자 경찰은 김주열 군의 시신을 마산세관 앞바다에 던져버리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4월 11일 최루탄이 눈에 밖힌 채 마산세관 앞바다에 던져져 바다에 표류하던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소식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민중들의 거센 분노를 샀지만 이승만정권은 언제나 처럼 공산주의자들의 사주한 사건이라고 매도하였다.

순진한 소년의 주검을 목격한 마산 시민들과 학생들은 격분하여 모두 시내로 나와 마산의 여고생들을 중심으로 한 15만여 명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김주열 군의 살인범을 찾아 파출소를 습격하여 서류를 불태우고 마산 경찰서와 시청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이승만은 이런 마산 시민의 격분에도 여전히 공산주의 사주 운운하는 작태만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이러한 논리는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부패한 군사독재 시절에도 그대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마산에서 시작된 투쟁의 불길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이 3.15부정선거의 무효를 외치며 재선거와 시위를 벌이다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가던 중 이승만이 고용한 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많은 학생들이 부상당 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격분한 서울시민과 학생들은 대규모 투쟁에 돌입한다. 

4월 19일 10만 이상의 시민들이 서울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동참하였다. 

200 여명의 무장 경찰대와 수 백명의 대한청년단 등 깡패들은 쇠뭉치, 자전거 체인, 못 밖은 몽둥이들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무차별 공격하였으나 시위대는 조금도 물러서거나 굴하지 않고 자유당 본부와 깡패 소굴인 대한청년단 본부, 어용신문인 서울신문과 서울방송국을 공격하였다. 

미국 대사관이 시위대의 공격을 당하였고 원조라는 탈을 쓴 수탈기관인 미국의 원조기관이 습격을 당하였으며 곳곳에 있던 맥아더의 동상이 공격당 하여 파괴된 채 넘어졌다. 

민중들의 대규모 항쟁에 이승만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오후 7시 이후의 야간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미국이 신임하는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이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어 육군 제15사단 전차대를 서울에 진주시켰다. 

그러나 계엄령 하에서도 민중들의 항거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더욱 확산되고 격화되었다. 

시위대들은 경무대를 향해 돌진하였고 잔악한 경찰들은 비무장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자행하여 120명이 죽고 450명이 부상당 하였다. 

이날 부산에서도 수만 명의 시위대들이 경찰서를 비롯하여 군청, 소방서, 대한반공청년단 지부 등을 습격하여 파괴하였고 10 여 명이 경찰발포로 살해되고 80여 명이 부상당 하였고 광주, 대구, 대전 등 전국 각 도시에서도 경찰서, 자유당 사무실과 반공청년단 사무실 등이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불타고 부서졌다. 

419 당시 시청 앞

4월 19일 화요일은 혁명의 시작이었다. 

이날 경찰 측의 추정만으로도 사망자 183명, 부상자 6,259 명에 달하고 있었다.

평화적 시위로 출발하였던 남한 민중들의 투쟁이 경찰의 무차별 발포 등 유혈적 탄압과 맞부딪치면서 급속히 민중봉기로 전환하여 갔다. 


마침내 이승만은 4월 26일 대통령 사임의사를 공식 발표하고 임시행정수반으로 미 대사관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던 허정을 지명하였고 허정은 이를 즉각 수락하고 과도정부를 수립하고 내각제로의 헌법개정과 공정한 선거의 실시를 약속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의 대통령 사임서가 국회에서 정식으로 수리되고 다음날 자유당의 2인자로 군림하였던 이기붕 일가가 자살하면서 12년 이승만 독재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와이로 망명하기위해 비행기에 오른 이승만 전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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