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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20. 2017

건축가의 역사 읽기 IV 근현대사

다섯번째. 한국전쟁 그 후(전쟁 후~516쿠테타) 3/5

조봉암, 진보당사건


피폐해질 수 밖에 없던 이승만집권하의 남한사회는 값싼 원조물자의 공세에 밀려 광범위한 농민과 중소기업이 몰락하게 되고 그에 따라 민중들의 빈곤화가 가속화됨으로써 결국 買辦資本매판자본(comprador capital)가들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 자체가 파괴되어 가고 있었다.

원조마저도 1950년대 말부터는 급속히 감소되기 시작했해 1957년 3억8,289만달러였던 원조액이 1959년에는 2억 2,220 만달러로 크게 삭감되어 제품생산에 필요한 각종 원료와 부품의 조달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전반적인 구매력 감소와 원료 및 부품의 부족으로 인한 각 공장의 조업율의 저하를 가져와 문을 닫는 공장들도 속출하였다. 

곧 실업자의 증대로 이어졌으며 실업자의 증대는 다시 노동자들의 임금의 인하를 재촉하였다. 


대량해고, 임금인하, 물가상승, 조세부담가중 등 전방위 벼랑끝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는 결국 절망적인 상황에 봉착한 민중들의 투쟁으로의 결과를 이끌수 밖에 없었다. 

1958년 대한석탄회사 산하 광산 노동자, 부산과 목포의 항만 노동자, 한국모직공장 노동자 등이 체불임금을 돌려받기 위한 투쟁에 돌입하였고, 이와 동시에 정부의 철도 전기 노동자들이 임금인하와 해고에 항의하는 파업을 잇따라 이르켰으며 주한 미육군 기지의 한국인 노동자들과 미국계 회사들의 노동자들도 파업투쟁에 합류하였다. 

농촌에서도 각지의 농민들이 일어나 군사기지를 위한 농지의 강제 징발, 불법적인 소작료, 엄청나게 비싼 비료, 저곡가 정책 등에 항의하며 근복적인 토지개혁을 강력히 요구를 하였다. 

노쇠한 독재자는 점점 더 야수로 돌변하여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감추어진 야비한 폭력에 의존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1952년 국회의장단, 윤치영 부의장, 신익희 의장, 조봉암 부의장

1958년 초 이승만은 대대적인 반대 세력에 대한 소탕작전에 돌입하여 10,000여명의 민주인사를 체포 투옥하였고, 자신에게 도전한 진보당과 조봉암에 소위 진보당 간첩사건을 조작하여 죽이기에 들어 갔다.

1958년 1월 13일 새벽, 이강국 치안국장과 최치환 시경국장의 진두 지휘 아래 서울시경 관하 형사대는 조봉암을 위시한 진보당 간부에 대한 일제검거에 나서 윤길중, 조규택 등은 서울에서, 부위원장 박기출은 부산에서 각각 체포되었으나 조봉암은 이틀 전에 치안국에서 새어나온 수사기밀을 탐지하고 관철동에 있는 친구의 집에 은신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일 밤 죽산의 지인들은 해외로 망명이나 하라고 권했으나 동지들의 체포소식에 도망을 가면 무고한 혐의가 사실화될 것이고 애꿎은 동지들만 희생될 것이라고 말하며, 1월 13일 오전 당국에 자진출두 하였다.


망명을 한다면 어느 나라에서 나를 받아주겠는가. 

또 설사 해외탈출이 가능하다고 해도, 나에게 걸린 혐의는 사실화되고 애꿎은 당원들만 희생될 것이 아닌가. 

설마 하니 나를 죽이기야 하겠는가. 

선거가 끝나면 내주겠지.

- 竹山曺奉岩 죽산조봉암

조봉암과 진보당사건 관련자들

육군특무부대는 2월 2일 「양명산 간첩사건」을 발표하였다. 

조봉암이 간첩 양명산과 접선하여 북과 접촉하였으며 정치자금을 받았고 북한의 지령에 따라 여러가지 간첩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 

양명산은 정부의 묵인하에 북한과의 비밀무역을 하며 군 첩보기관과는 밀접한 관계에 있던 사람이인데 이승만정권은 정적을 죽이기 위한 간첩사건을 조작하여 만들어 내었다. 

조봉암, 윤길중, 박기출 등 진보당 간부들은 국가보안법상 간첩죄로 기소되었으나 1심 재판부는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로 인정했지만 간첩 및 간첩방조죄는 무죄로 조봉암에 대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판결 후 자유당의 정치깡패, 이정재등과 반공청년단원 200여 명이 용공판사 타도를 외치며 법원으로 난입해 법원 청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지며 1심의 변호인단이 구속되거나 검찰의 신문을 받기도 했다. 

이승만의 압력과 극우 테러단들의 협박에 굴복한 2심 재판부의 판단은 크게 달랐다. 

1심에서 조봉암의 간첩활동을 진술했던 양명산이 진술을 번복, 검찰과 특무대에서 허위로 진술해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았다고 말했지만 2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간첩죄를 적용,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대법원의 3심에서도 역시 조봉암에겐 사형이 선고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재판 당시에도 언론은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했고, 장택상이나 윤치영 같은 이승만 측근의 자유당 인사들까지도 조봉암의 무죄를 주장하며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이승만은 1959년 7월 31일 끝내 조봉암의 사형을 집행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 대법정

북한에서는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되자 바로 애국열사릉에 가묘를 설치하여 그를 추모하였고, 후일 조국통일상을 추서하였다. 

이렇게 조작된 간첩사건으로 조봉암을 죽이고 진보당을 해산시켜 버린 이승만은 평화통일 따위나 주장하는 민중세력들의 정치 참여의 싹을 아예 잘라 버리기 위해 선거법을 개정하여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를 할려면 고액의 공탁금을 내도록 규정하여 버렸다. 

민중들의 정치 참여를 제도적으로 막아 버리고 진보세력을 말살시켜 버린 이승만은 1958년 4월, 두 보수정당인 자유당과 민주당만의 참여로 기만적인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竹山 曺奉岩 죽산 조봉암. 

1911년 강화초등학교와 농업보습학교를 졸업 후 강화군청 사환으로 잠시 근무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1918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상경, 경성 YMCA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죽산은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여운형, 박헌영, 김규식, 장면, 여운홍, 이승만 등을 만나게 된다.

YMCA 중학부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하여 1년간 투옥되었다가 1920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 휘하의 경무국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죽산의 공산주의 활동을 알게된 김구 선생과 사이가 벌어졌고 임시정부의 심각한 파벌싸음에 실망한 죽산은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일본 中央大學敎주오대학교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하고 대학 재학 중 죽산은 박열 등이 조직한 黑濤會흑도회에 가입, 공산주의 운동과 항일 독립운동을 하였다. 

주오대학 1년을 수료하고 1922년 국내 항일운동을 위해 귀국한 죽산은 그해 10월 구소련, Verkhneudinsk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린 국제공산당대회에 조선인 공산주의자 대표로 참가하였다. 

1923년 모스크바 東方勞力者共産大學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해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였고 박헌영, 김단야 등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11월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자 1926년 4월 박헌영 등과 함께 제2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죽산은 만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 책임비서로 선출되어 만주에서 활동하였다. 

그해 7월에는 코민테른 조선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27년 4월 이동녕, 홍진, 조완구 등과 함께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장을 맡아 분열된 항일 독립운동조직의 통합에 힘썼다. 

1927년 5월에는 중국공산당 한인지부를 조직하였고, 1926년 6월에는 Profintern 국제적색노동조합 범태평양노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그리고 ML당(Marx-Lenin당, 제3차 조선공산당)을 조직, 일제의 탄압으로 와해된 국내의 공산당 재건에 힘쓰기도 하였다. 

1929년 10월 조선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하였고, 1931년 12월 만주사변 발발하자 상하이에 반제국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상하이 반제동맹 한인지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상하이에서 활동 중 일경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이송 평북 신의주 감옥에서 7년을 복역한 후 1939년 7월 출소하여 고향인 인천으로 내려와 총독부 경찰의 삼엄한 감시에도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40년 이후 죽산은 공산주의 활동은 물론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뚜렷한 활동의 흔적이 보이질 않아 이 시기 죽산의 행적은 변절에 대한 시비와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당시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그들의 활동을 죽산에게는 일체 비밀로 하였다. 

당시 죽산은 자신의 공산당 활동 중단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을 뿐 아니라, 일제에 국방헌금을 냈다는 의혹과 함께 이승엽에게 사상 전향하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며 전향을 권유하는 등 죽산이 변절하여 일제에 협력하고 있었다는 박헌영 등의 주장은 많은 부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죽산은 1945년 1월 인천에서 지하 노동운동단체를 조직, 활동하였다는 혐의로 일경에 다시 체포 되어 복역하다 8월 15일 해방이 되어서야 출옥할 수 있었다. 

해방 후 죽산은 조선공산당 활동을 재개하며,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지부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46년 5월 박헌영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전향하여 우익노선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후 죽산은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협상을 주장하며 1948년 5.10 단독선거에도 참여하여 제헌의회 의원에 당선된다. 

제헌의원에 당선된 죽산은 그동안의 소신을 버리고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하여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을 지냈으며 1948년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의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농림부장관 재직 당시에는 이승만 정부의 기만적인 농지개혁을 주관하였고, 대한국민당 등에서 윤치영등과 함께 이승만을 위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40년 초에서 1950년 초까지의 10여년은 죽산 일생에 있어서 가장 암울하고 어두웠던 변절과 배반의 시기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이승만의 눈밖에 난 죽산은 이승만 일파와 결별하고 독자적 정치 행보를 하게 된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에 대항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고,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진보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후보로 출마, 이승만 도당의 상상을 초월하는 불법적인 부정선거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30% 이상의 지지를 얻는 파란을 일으켰다. 

결국 이것이 1958년 진보당 간첩사건이라는 이승만 정권의 조작된 정치사건으로 비화되어 죽산은 결국 형장의 이슬로 파란만장한 그의 생을 마치게 되었다. 


죽산은 2011년 1월 20일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하여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복권되었다. 

2015년 조봉암 추모제와 장녀 조호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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