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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 Dec 01. 2021

우리가 써 내려간 이야기

-도서 '불과 나의 자서전'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의 우리들은 주식투자, 비트코인, 재테크 공부에 열정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너 주식 해?”라고 물어보면 대다수는 “당연하지”라고 답했고, 특히나 젊은 층들은 ‘뼈 빠지게 일해도 내 집 마련하기 힘든 세상’ 속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을 꾸며 주식 시장 성행에 한몫을 했다. 오죽하면 ‘주린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까. 얼마 전 내 아버지께서 드디어 자가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게 되셨다며,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며 말씀하셨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산물에 부정적인 나조차, 그런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부러움 가득한 눈을 하고 있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자신이 투자한, 혹은 살고 있는 지역의 재개발을 꿈꾸는 우리들은, 정작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뿌리내린 계층의식과 한국 사회에 드리운 그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김혜진 작가의 소설 ‘불과 나의 자서전’에서 ‘나’의 부모님은 과거에 자신들이 속했던 남일동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신들이 비로소 그곳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어머니는 어릴 적의 내게 가게 아이들과 늦은 시간까지 놀지 말라며,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대의 위치를 보고 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머니가 그렇게 내게 계층의식을 심어주었듯 다른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소설을 통해 바라본 한국 사회는 그것이 대물림되는 암울한 곳이었으니까. 이는 학교에서 ‘나’를 남토(남일동 토박이)라고 부르며 동네에 따라 서로를 구분하고 벽을 구축해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학교 주변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도 있었고, 주택가에 사는 친구들도 있었다. 거주지로 누군가를 놀리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그곳에는 분명히 미세한 경계가 존재했다. 소설 속 아픈 이야기가 과거 내 삶 속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니. 순수한 우정을 가로막는 것이 고작 거주지였고, 빈부였다는 사실이 씁쓸하고 마음 아팠다. 


한 부모 가정의 어머니인 주해는 남일동으로 이사와 가로등 설치부터 시작해 마을버스 운행과 마녀시장 운영, 달산 마을 도서관 건립까지 남일동을 위해 애쓴다. 그러나 초반에 사람들의 반응은 어쩐지 소극적이다. 그것은 재개발 진행 계획이 여러 번 무산된 현실에 체념한 모습임과 동시에, 선의를 의심하는 차가운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희망을 앗아간 재개발, 그리고 오직 재개발 여부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사람들. 어른들은 남일동이 영영 그렇게 남을까봐 두려웠을 것이고, 그 두려움이 자신들의 아이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질까 무서웠을 것이다. 아이들은 학교 친구들로부터 ‘남민’, ‘남토’로 불리며 계층이라는 보이지 않는 선을 체감해야 했을 테니까. 비단 거주지뿐만이 아니라, 빈부를 나타내는 모든 것들, 예를 들면 그 사람이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는지, 직업이 뭔지, 연봉은 얼마인지와 같은 배경들이 평가 기준이 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를 더는 부정하지 못한 채,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싶어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을 때 스스로가 많이 부끄러웠다. 나는 결국 소설 속 주해와 같은 사람이 된 것이었다.      


 소설 속 모든 내용은 ‘불과 나의 자서전’ 일뿐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주해가 과거의 의료사고에 휘말렸을 때, 재개발추진위원회에서 그녀를 끌어내리려는 지역 주민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들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재개발을 기다리고, 집을 위해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과정에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를 헐뜯기에 바빴을 수도 있겠다.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멀리 떠난 주해를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득과 실을 따지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외면했을 수많은 상처들이 여전히 아물어지지 못한 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처들은 꾸준히 재생산되었을 것이다. 남일동을 불태워버리고 싶어했던 소설 속 ‘나’ 심정이 이해됐다. 남일동은 ‘나’의 가족을 아프게 했고, 주해를 아프게 했고, 사람들은 ‘재개발을 희망해야만 하는 현실’에 물들어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냐고 물어보면, ‘나’는 남일동 탓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선, 계층이 언제부터 이렇게 선명했던가. 나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다기보다는 도시에 들어선 빽빽한 아파트의 모습이 삭막해보였고 그것들이 미웠다.

어릴 적 나의 가족이 구독해서 보던 신문엔 언제나 재개발되는 지역의 아파트 단지 사진이 자랑스레 한 면을 장식하고 있었고, 텔레비전을 켜면 조경이 굉장히 잘 된 아파트 광고들이 연이어 나왔다. 그 화려함 속의 이면엔 그늘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엄마 나도 저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라고 말하던 나의 말을 들은  당시의 나의 부모님은 어떤 심정이셨을까. 실제 사회는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바라본 것보다 훨씬 더 냉랭했다. 다들 먹고살기에 바빴고, 자신의 가족을 챙기느라 바빴다. ‘나’의 가족이 남일동을 벗어난 이후, 남일동의 일에 무관심해진 ‘나’의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이기심을 읽었다. 사회 전체의 문제를 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며 그에게서 등을 돌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악순환의 씨앗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지 않았을까. ‘불과 나의 자서전’ 속 주해와 지역 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그 수많은 재개발로 인해 만들어졌을 보이지 않는 경계가 누군가에게는 폭력이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경계가 허물어질 수 없음을 인식하고 어느 새인가 재개발을 기다리는 주해의 모습을 목도했던 ‘나’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알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 내의 분할과 그것의 대물림을 애써 외면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은 누군가를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한 부모 가정의 엄마인 주해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과, 직장 내 따돌림을 받고 있던 직장동료를 위하는 ‘나’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던 타인의 시선들. 그 차가운 시선들을 견뎌내야만 했을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공동체 속에서 타인을 배제하려 하면서도 자신은 반드시 그곳에 남아있으려는 사람들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피해자들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나의 자서전’은 소설 속 내용이지만 이와 비슷한 일들이 실제로 우리 한국 사회에 존재한다고 확신했고, 그랬기에 주해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나도 비참하고 현실적이어서 읽는 내내 마음이 힘들었다. 공동체 속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기심과, 자본주의가 빚어낸 재개발이 누군가에겐 아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써 내려갈 이야기는 소설 속의 슬픈 이야기보다는 더 희망적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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