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채록 Sep 24. 2023

이름을 가지고 죽는다는 것

15th DMZ Docs <신원미상자의 이름> 리뷰

신원미상의 상태로 죽음을 맞이한 이들에게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탈리아의 법의학자 크리스티나 카타네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신원미상자의 이름>(2023, 발렌티나 치코냐, 마티아 콜롬보).

이 작품은 이름을 가지고 죽는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게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두 사건을 통해 전한다. 하나는 2015년, 지중해를 건너려던 이주민들이 탄 배가 침몰해 28명의 생존자를 제외한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사망자들은 배 안에 1년 넘게 방치되었다가 그들의 유해가 수습되었으나 부패로 인해 이들의 신원을 밝히는 일은 지지부진하다. 또 하나는 96년에 실종된 동생의 유해를 20년 만에 마주하는 가족을 모습을 담는다.


인권을 다룬, 약자를 향한 목소리를 내는 작품들은 대개 주인공의 활동을 부각시켜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풀어가기 마련인데 <신원미상자의 이름>은 크리스티나가 이름 없는 이들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담아낼 뿐이다. 감정의 파고는 인물이 놓인 상황과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크리스티나는 신원미상자들에게 이름을 되찾아주는 일에 함께하자고 여러 기관과 단체에 제안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거절이다. 그녀의 호소는 어디에 닿지 않는다. 거절이 일상이 된 그녀의 감정 상태를 반영하듯 작품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허무가 내내 깔려 있다. 이 작품을 보며 허무와 함께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비정함이다. 자본주의의 비정함. 시신을 감식해 신원을 밝히는데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 이를 꺼리는 유럽 사회를 보며 복지 수준이 높은 것으로 잘 알려진 유럽이 맞나 싶기도 했다. 오랜 시간 실종 상태였던 동생을 유해로 마주한 가족의 모습을 보았을 땐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어떠한 생각 혹은 감정을 느낄까? 과연 안도감일까, 혹은 한 줄기 희망마저 사라져 더 큰 슬픔이 밀려오는 것은 아닐까?


건조한 분위기를 상쇄시키기 위해 시청각적인 요소를 적극 활용한다. 이메일을 쓰는 장면에서 키보드 소리와 음악이 겹쳐 들리는데, 이름 없는 이들을 위해 조용한 투쟁을 벌이는 크리스티나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함으로 보였다. 또, 이어지는 장면에선 그러한 노력에도 별 성과가 없어 침전하는 이의 모습을 인서트와 자막으로 표현한 구성에 감탄했다.

이 작품을 보며 우리 사회에는 이름 없이 죽은 이들에 대한 사건이 없는지 생각해보았다. 1923년 일본 관동 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루머로 인해 많은 조선인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는데, 아직까지 제대로 된 피해자 집계조차 이뤄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한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들은 것이 떠올랐다. 또, 한국전쟁 당시 전사하신 분의 신원이 73년 만에 확인되어 가족 품에 돌아갔다는 기사를 본 것 역시 생각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문제들을 보며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함께 밀려왔다.


크리스티나는 신원미상자들에게 이름을 찾아주는 일은 “의지의 문제”라 말한다. 존엄한 죽음, 이 또한 누군가의 특권이 아닌 인간의 기본권으로 우리 사회가 함께 나서야 한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기억과 역사를 재구성해 공간을 새롭게 전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