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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jeong Mar 01. 2023

머리는, 어려운 걸 생각하라고 있는 거야

체념이 습관이던 나를 혼냈던 말_(1)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뭔가를 생각하는 일이 늘 괴로웠다. 다들 처음이면서, 어떻게 무언가를 그렇게 깊이 고민하고 생각해서 답을 내는지. 그걸 따라 할 생각을 못하고 도망가기 바빴다.


첫 기억은 대학 입시 때였다. 고3의 여름 수시 접수 기간이 한창인데도, 나는 무슨 과를 가고 싶은지 그때까지도 정하지 못했었다. 남들은 1학년 때부터, 아니 중학생 때부터 진로를 정한다는데 나는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시키는 건 잘해서, 대단하진 않지만 공부로 반에서 손가락 안에 들었었고 선생님도 친구들도 모두 기대하며 내게 물었다. 어느 학교의 어느 과를 가고 싶냐고.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다행히 잘 스쳐갔던 중2병이 이제서야 나타나기라도 하듯, 온갖 예민과 짜증을 세상에 분출시켰다. 나도 모르겠으니까 제발 그만 물어보라고!!


취업 준비생일 때도 그랬다. 남들 다 한다는 3-4학년의 취업 준비를 나는 하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머리만 긁었다. 대학을 올 때와 마찬가지로, 좀 늦긴 했지만 결국 잘 맞는 과를 찾아오긴 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생각하기가 또 괴로워서, 어른거리는 취업 걱정을 덮어놓고 못 본 척했다. 다들 공무원 공부를 시작하거나, 언론 고시를, 또 면접을 본다는데 나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모른 척하면서 불안해만 했다.


이 두 기억은 나에게 가장 굵직한 기억일 뿐, 살면서 나는 생각을 하는 일에 계속 겁을 먹어왔다. 고등학생 때보다는 대학생 때, 학생 때보다는 취업준비생일 때, 회사원일 때, 성장함에 따라 생각하는 일도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또다시 뭔가를 정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으!'하며 눈을 질끈 감게 되는 것은 여전했다.





그러다가 첫 퇴사 후, 또 한 번의 선택이 내 인생에 다가오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을 때, 무라카미하루키의 <일인칭 단수>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저 문장이 나오는 <크림>이라는 단편을 만났다.


소설 속 한 노인이 청년에게 말한다. 중심이 여러 개이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떠올려보라고. 청년이 결국 그게 어떤 원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을 때 노인이 말한다.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열심히 생각하는 거야.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자네 머리는 말일세, 어려운 걸 생각하라고 있는 거야.
모르는 걸 어떻게든 알아내라고 있는 거라고.
비슬비슬 늘어져 있으면 못써.


그 문단을 한참이나 읽었다. 생각은.. 열심히 하는 거구나.


다른 사람들은 그냥 운이 좋아서 가고 싶은 학교를, 하고 싶은 일을 정하는 게 아니었구나. 생각하고 또 생각한 거구나. 나처럼 외면하지 않고 어려운 걸 어떻게든 알아냈던 거구나. 내가 비슬비슬 늘어져 있었던 거구나. 순간 얼굴이 확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말 그대로 나무 밑에 앉아서, 생각이라는 열매가 내게 뚝 떨어지기를 기다린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잘 되고 싶었고 늘 억울했다.


때마침 활짝 열어두었던 내 마음으로 저 말이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이제 '생각은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무언가를 다시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때 '으!'라는 생각이 들어도, 정신을 잡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 그러기 위해서 지금 뭘 해야 하는지, 해온 것에 문제는 없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렇게 나를 더 잘 알게 되었고 처음으로 목표를 향해 착실히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어렵게 느껴져 지레 겁을 먹을 때마다 생각할 것이다. 머리는 어려운 걸 생각하라고 있는 거야. 모르는 걸 어떻게든 알아내자. 못하는 걸 어떻게든 해내보자. 만약 나처럼 생각이 무섭고 막막한 사람들이 있다면 저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생각하는 건 원래 어렵다고. 어려운 거니까 우리 더 열심히 생각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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