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jeong Feb 28. 2023

갑각류는 탈피를 통해 성장한다

물렁이가 껍데기를 벗겨내던 때의 성장일기

알쓸신잡 시즌2에서 장동선 박사님이 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은 척추동물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갑각류가 아닐까 한다고.


갑각류는 탈피를 통해 성장한다. 탈피 후의 갑각류는 너무 말랑말랑해서 당장 누구에게라도 잡아먹힐 만큼 위태롭지만, 그러한 과정이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어떤 상황이든 버틸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당장 죽을 것 같고 잡아먹힐 것 같은 순간에 인간은 성장한다.




│ 내가 가장 물렁물렁했던 날들


지난 편에서 고백한 대로 나는 아주 나약하고, 무모하게 첫 회사를 퇴사했다. 이번엔 그 퇴사 전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퇴근 후 집에 와서 멍하게 이게 맞나- 고민만 하다가 잠이 들 때, 내가 생각해도 내 스스로가 너무 구리게 느껴졌을 때, 좋아하는 사람들과 취미마저 자신이 없어졌을 때였다. 일어날 생각도 없고 변화할 생각도 못했다. 내가 너무 물렁물렁해서였나, 때마침 그 바이러스가 나에게 침투했다. 한 2년 간 잘도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과 마음이 제일 물렁물렁해졌을 때 바이러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고열에 시달리다 아침이 되자마자 병원에 가고, 회사에 양성 확인서를 보냈다. 일주일 동안 푹 쉬고 오라는 감사한 연락을 받았다. 안 좋은 몸으로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격리하면서 뭐 하지.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고,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그 일주일 동안은 한 게 별로 없다. 그냥 푹 자고 아프면 아파하다가, 가끔은 책이나 영상을 보다가 심심해하고. 그렇게 자가격리가 5일 정도 지났을 때쯤 다시 생각이란 걸 하게 됐다. 음.. 이제 격리 해제되면 뭐 하지.




첫 결심은 혼자 바다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솔직히 너무 답답하고 울적해서 바다를 보고 싶은데, 누군가와 시간을 맞추기는 어렵고, 아이고 이러다 죽겠는데 그냥 혼자 한번 가볼까. 그냥 그렇게 강릉행 KTX를 예매했다. 주말에 서울>강릉행 KTX를 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행으로 들떠있는지를. 그때가 여름이었으니 더 많은 사람들이 여름 휴가를 떠나는 기차 안에서, 나는 혼자 창밖만 바라봤다.


강릉에 도착해서 근처 동네 식당에서 칼국수를 먹고 서점에 들렀다가, 바다를 보러 갔다. 남들이 해수욕을 즐기는 해변의 끝에 앉아서 3-4시간을 혼자 앉아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참 청승이다 싶긴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쓰고 싶을 때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때의 강릉 바다에도 나 같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무슨 고민이 있길래'라고 혼자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나처럼, 남들이 바다에서 웃으며 휴가를 즐길 때, 나처럼 혼자 바다에 앉아있는 그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도 나를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무튼 그 흐린 여름날, 나는 회색 하늘과 파도가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해가 들지 않는 바다까지 다 보고 일어났었다.


그날이 시작이었다. 있어봐야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애매하게 너덜거려서 자꾸 날 집착하게나 하는 껍데기는 벗어버리고 그냥 물렁물렁한 나에서 시작하자고 생각한 날. 쾌유해서 보자던 회사엔 정말 죄송하지만, 복귀하면 아무래도 퇴사를 준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회사에서 멀어져 있던 동안 조금씩 괜찮아지던 내 모습을 다시 잃고 싶지 않았다.




│ 점점 껍데기가 자라서


퇴사를 하고 대부분의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운동도 했다. 그러다 보니 급속도로 괜찮아지는 내가 보였다. 강릉 여행에서 자신을 얻었는지 혼자 제주도 여행도 다녀왔다. 제주도 바다와 오름에서 내가 이렇게 쫙쫙 펴질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싶었다. 그날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참 반짝반짝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점점 내가 안쓰럽고 좋았다.


이후에도 나를 자극해 준 말과 영감들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그것들이 주는 말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나에겐 되어있었다. 책에서 주운 문장 한 줄, 좋아하는 가수의 가사 한 줄, 친구들과의 술자리, 편지, 큰 기대 없이 봤던 월드컵, 뉴스에서 본 누군가의 선행, 아침마다 공원에서 운동하는 사람들. 그냥 그 모든 게 내게 너무 깊숙이 다가왔고, 실망하기 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자던 목표가 무색하게 나는 이전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평생에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전보다 훨씬 단단해진 내가 되었다.



어제 오랜만에 친구와 술을 한잔 했다. 몇 년 전, 같이 첫 취업을 준비하면서 나의 물렁물렁물렁물렁 시절을 봤던 친구. 다행히 요즘 어떠냐는 친구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굉장히 초조해. 나 이제 돈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근데 괜찮아. 예전 같았으면 불합격을 받을 때마다 세상이 무너진 사람처럼 굴고, 밤마다 침대에 누워 '하..인생이란..뭘까..? 나는..너무 슬퍼... 아무도 나를 이해 못 해!'라며 구리게 굴었겠지만, 지금은 불합격 메일을 하루에 세 통 받는 날이 있어도, 뺨 한 대 때리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초조하고 불안한데 슬프지는 않다고 진심으로 말했다.


'너 많이 컸네?' 라고 말해줘서 고마웠고, '근데 나 지금은 정신이 남아서 그럴 수도 있어. 다음 달에 리얼 거지 되면 너 붙잡고 다시 울 수도 있어ㅋㅋㅋ'라고 했더니 '그땐 그래도 되지 뭐'라고 말해줘서 엄청 고마웠다.





어쩌면 내가 나를 잃어버렸던 것도, 어딜 가든 다 거절당했던 것도, 마침 그때 혼자일 시간이 많았던 것도 다 일단 물렁해지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간이 없었으면 지금의 나를 또 만나보지 못했을 테니까. 그 기회에 감사하고, 그 놓치지 않고 잘 자라준 나에게도 칭찬을 해주고 싶다.


솔직히 그렇다고 또 아프기는 좀 무섭긴 하지만, 또 다음번 탈피의 시간이 온대도 이 경험을 생각하면서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지금 이렇게 죽을 것 같다니 나는 또 크겠구나, 하며 나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찾아 올 이 탈피의 순간들을, 더 자란 내가 또 잘 버텨낼 수 있기를.




https://youtu.be/tTV6S5qZGdk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보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