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름엔 아카시아 향이 나는 것처럼
누군가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늘 가을 아니면 봄이라고 대답했다.
추위보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 여름은 찝찝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좋을 이유가 없는 계절이었다.
그런데 본격 여름 찬양 책 [아무튼, 여름]을 읽으며 어느새 공감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니, 나 여름을 꽤 좋아하고 있었구나?'
작가는 여름과 관련된 좋았던 추억과 나빴던 기억들을 모아 모아 자신이 여름을 얼마나, 왜 사랑하는지 이야기한다.
편의점에서 파는 4캔에 만 원짜리 맥주가 여름에 얼마나 맛있는지, 초여름에만 살 수 있는 초당옥수수가 얼마나 아삭하고 달콤한지, 여름의 덩굴장미가 얼마나 예쁜지, 여름 한 철 사랑(fling)에 휩쓸려 얼마나 끙끙대고 아팠는지.
이런 ‘구체적으로 좋아하는 마음’ 들이 좋았다.
누군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할 때,
“넌 그냥 최고야 너니까 좋아!”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의 낮고 간결한 목소리가 좋다”
“웃을 때 눈이 없어지는 표정이 좋다”
“밥 먹을 때 젓가락을 까딱까딱하는 습관이 웃기고 귀엽다”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더 진실 같다. 그래서 이 책이 좋았다. 한 계절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살아낸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우리도 각자 기억할 만한 여름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 내려 집으로 가려는 찰나,
아카시아 향기가 얼굴을 덮는 듯한 날이 있었다.
그날 나는 이렇게 메모했다.
신남성 초교 후문 정류장에 내리니 아카시아 향이 콧구멍을 달달하게 간지럽혔다. 이건 여름이 온다는 뜻이다. 2019.5.14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는 말은 이제 생각해보니 계절을 못 느끼고 지나간다는 말인 것 같다.
어린 날의 여름은, 저녁 8시까지 땀 흘리며 놀았던 놀이터와, 밀린 방학 숙제가 몰아치던 날들과, 바닷가 텐트 안에서 바베큐를 기다리며 동생과 낄낄거리던 날들로 가득 차 있는데.
오늘 나의 여름날은 잠시 더운 출퇴근길과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한 회사의 반복뿐이니까.
그러니 시간이 최대한 천천히 흘러가도록, 남은 여름은 좀 더 구체적으로 좋아해 보려고 한다.
여름이라 조금 더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여름이라 더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여름이라 더 진한 풀냄새를 맡고, 여름이라 더 까매진 당신의 얼굴을 더욱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