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중순부터 시작된 집콕생활이후, 인종주의의 정점을 찍듯 유럽과 북미 등으로부터 연이어 들리는 사건 사고들은 사실 내게 그닥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인종주의자들이 일상에서 공공연히 드러내는 그 적개심이 시너지 효과를 내어, 적어도 겉으로 드러내어선 안된다는 암묵적 규율에 균열을 내고 그 틈새가 더 벌어지는 건 아닐까하는 걱정과 공포를 때때로 느끼곤 한다.
몇년전만 하더라도 인종차별의 존재를 부정하는 한인 이민자들을 종종 목격하곤 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한국의 사례를 들며 한국에는 있지만 이곳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것(=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식의 선진국 신화와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으므로, 이 주제에 대한 대화 자체가 조심스러웠다고나 할까? 마치, 인종차별 이야기를 하는 이민자들은 적응을 못한 실패자이며, 실패의 원인을 자신이 아니라 외부적 요소인 인종차별로 몰아가는 거라고까지 이야기를 했었으니까 말이다.
길거리에서, 버스안에서, 학교와 직장 등에서 벌어지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형태의 인종차별이 수면위에 떠오른 경우를 돌아보면, "백인의 우월성"에 대한 불안과 균열, 그들이 유지하고자 하는 균형이 흔들리거나 위협받을 때였다. 오바마가 당선되던 바로 그날 벤쿠버에서는 백인 경찰들이 인도계 배달원을 린치하였고, 사스라는 전염병이 토론토를 강타했을 때에도 지금과 같은 혐오 사례들이 있었다. 더 멀리 가자면, 응당 19세기 철도 노동자로 왔던 중국인들을 겨냥한 차별과 2차대전 당시 일본계 캐나다인들을 따로 몰아내서 박해했던 yellow peril, 좀 더 멀리 가자면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의 아이들을 빼앗아 버린 residential school을 이용한 문화적 학살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종차별이 위기 상황에서만 그 얼굴을 보이는 건 아니다. 오히려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그 밑에 커다랗게 자리한 빙하의 밑둥처럼 숨어 있다가 코비드19 와 같은 "사회적 위기" 상황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결국, 그 빙하의 밑부분을 "비위기적" 상황에서 다함께 이야기하고 인정하며 성찰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당연한 과정은 불행히도 다문화주의 (multiculturalism) 라는 캐나다의 자유주의적 국가 이데올로기로 인해 쉬워 보이진 않는다. 캐나다인들의 대다수가 비교 가치도 없어보이는 미국이라는 문제투성이의 나라를 옆에 두고, "저 야만의 미국을 보라. 우리는 다문화국가라구. 인종주의 따위는 없어" 라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비위기적 상황에서의 인종차별에 대한 성찰과 논의는 결코 쉽지 않다.
몇가지의 대안을 생각해 보자면, 1) 위기적 상황에 등장한 일련의 사건들이 예외적이고 일회적인 개인들의 일탈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 2) 그 일탈들이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었던 역사와 특정 인종의 우월성/열등성 에 대한 신화를 깨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 3) 그리고 그 작업은 비위기적 상황에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담론화 되어야 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