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개월동안 에드먼턴에 계신 시부모님과 Zoom으로 한국시를 공부해 오고 있다. 참고로, 나의 시부모님은 한국분들이 아니시다.
코비드-19 때문에 나의 부모님이 계시는 한국도, 시부모님이 계신 에드먼턴도 가지 못하게 되었다. 네분 모두 80 언저리의 노인분들이시니, 살아계실 때 가능한 한 자주 찾아뵙고 싶은데 언제 다시 뵙게 될지 알수가 없다. 그래서, 한국가족과는 전국민(?)이 애용하는 카톡을 더 자주 사용하고 있고, 최근 몇개월간 시댁과는 Zoom으로 연락을 해 오고 있다.
우리집과 달리 시댁에선 와인 혹은 차와 함께 온갖 대화가 난무한다. 정치, 문학, 종교, 여행, 여성문제, 국가분쟁 등 주제를 가리지 않는다. 내가 대화에 끼어 들 틈도 없이, 모두들 수다에 최적화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의 시부모님은 두 분 모두 문학전공자에 학교 교사로 퇴직을 하셨다. 남편이 시부모님께 여자친구(=나)가 생겼다고 했을 때, 시어머니의 첫 질문은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니?"이었다고 한다.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곧 좋은 사람이고, 그러므로 가족구성원이 될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하신거다. 반면에 우리집에서는 "양놈"은 절대 안된다고 펄쩍 뛰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소설 따위 그닥 상관 안한다.
시어머니는 몇년 전부터 틈틈히 한국어를 공부해 오고 계신다. 어디서 배우셨는지 "쏘주, 맥쭈, 양주 다아 쭈세요!"라고 외치셔서 한바탕 배를 잡고 웃기도 했다. 발음은 눈을 감고 들어도 뜨고 들어도, 소위 "외쿡인" 발음이지만 문법과 단어뜻을 생각하시며 나름 열공 중이시다.
독일 출신의 시아버지는 취미이자 특기가 언어 공부이다. 영어, 불어, 스페인어, 라틴어, 아랍어 조금, 원주민언어인 크리(Cree)어, 그리고 10여년동안 중국어를 열심히 갈고 닦아 오셨다. 중국유학생들과 언어교환에도 열심이시다. 한국 방문 며칠전엔 한국어 글자를 독학하시더니, 지하철의 광고판과 길가의 상점명을 읽고 중국어 발음과 비슷한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기도 하셨다. 어쨌든, 시아버지의 한국어 발음은 완벽에 가깝고, 뜻은 몰라도 읽으실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지고 계신다.
두 분과 몇개월 전부터 Zoom으로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여동안 시간을 정해놓고 만남을 가지고 있다. 정해진 시간동안 안부만 이야기하기에는 심심하고, 오프라인과 달리 무턱대고 정치, 종교, 문화에 대해 썰을 푸는 것도 웬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심하던 남편과 시어머니는 일주일에 한편씩 한국시를 읽자고 제안을 했다. 그렇다면, 내가 맡은 역할도 (나는야 네이티브 스피커!) 나름 무게가 생길테니 말이다. 시는 한주 전에 미리 정해, 번역본과 같이 이메일로 부모님께 전한다.
보통은 Zoom 미팅과 함께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나서, 내가 전체시를 멋진 "네이티브 스피커"의 발음으로 읊으면, 시아버지는 한 단락씩 또박또박 다시(물론 뜻은 모르신다) 읊으시고, 시어머니는 아는 범위 안에서 뜻풀이를 하신다. 문법적 설명과 단어 해석, 시대적 맥락 등은 남편과 내가 (하지만 남편이 주로) 맡는다 (참고로, 남편은 나보다 한국어를 더 잘한다. 한문과 중세국어까지 설명이 가능하다). 시인에 대한 배경설명은 물론이다.
박목월, 김상용, 천상병 등을 거쳐 오늘은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게 되었다. 시 한편에 한 시간은 물론 부족하다. 우리의 시공부는 다음과 같이 중구난방이 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예컨데,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이란 구절에서, 남편은 "가"로 끝나는 온갖 직업군을 다 나열한다. 음악가, 성악가, 건축가, 작곡가 등등. 그 와중에 나는 "어라, 그 운동가가 노래 아니었어? 사람이 아니라."라는 질문을 해대고...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에선, 남편이 운동권의 술 마시는 분위기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을 한다. 시어머니가 당신이 즐겨 사용하는 "쏘주, 맥쭈, 양주 다아 쭈세요!"를 외치시면 모두 깔깔 배를 잡고 웃는다.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를 읽으면, 남편은 운동권에서 즐겨부르던 노래들 - 예컨데 "단결투쟁가"나 "사랑도 명예도" 를 부르는 식이다. 그러다가 시부모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독일 버젼의 "인터네셔널가"를 부르면,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아버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라 부르시기도 한다. 더불어, 한국 방문때 목격한 광화문과 시청 앞에서 벌어지던 다양한 데모에 대한 추억을 나누기에 이른다.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라는 구절에 이르면 "상"이 테이블 이외에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며, 남편은 채팅창에 중국어로 "상장," 장례식의 "상," "동상"을 한자로 신나게 써댄다. 중국어가 특기인 시아버지 역시 중국어 발음으로 그 단어들을 읽고 흡족해 하신다.
"마침내 그도 갔지만"을 설명하며, 남편은 일제시대에 "그" 혹은 "그녀"라는 주어가 소개되었다고 전한다. 그럼 대화는 CIS 젠더의 성별표기로 주제가 옮겨가고, 최영미 시인의 "미투"를 이야기하다보면 어느덧 한시간이 훌쩍 넘어가 버린다. 때때로, 남편은 중세국어 중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아래 아 발음을 흉내내기도 한다. 물론, 우리 중 아무도 그 발음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확인은 불가능하다.
중간중간 시아버지의 완벽에 가까운 발음에 나도 모르게 "우와, 우와" 추임새를 넣으면, 남편은 시어머니에게도 똑같이 칭찬을 하라며 팔꿈치를 쿡 치곤한다. 나와 달리 참으로 배려심 있는 아들이다. 이렇게 제멋대로 시 한편을 두고, 온갖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다들 즐거이 웃고 있는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