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하고 싶어 다시 읽은 책
'아! 또 한 사람을 잃었구나!'
지난 4월 18일 그의 부고 기사를 보았다.
개인적으로 만나 본 인연도 없었는데, 가슴 한 켠이 묘하게 허전했다.
가치와 철학을 공유하고 또 존경하는 존재들이 나이를 먹고 병이 들어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마다 큰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어차피 기울어진 운동장이지만, 더 기울지 않도록 고군분투하던 이들의 부재가 주는 불안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의 존재 없이 세상의 불평등, 부조리가 더 가속화되는 느낌이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어찌보면,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남민전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 난민으로 살던 그를 처음으로 알게 된 건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을 통해서 였다. 워낙 책명이 잘 만들어진 탓인지, 다들 그의 책을 읽지는 않았어도 제목은 쉽게들 기억한다.
또, 그가 난민으로 일상을 버텨내도록 물적, 정신적 도움을 준 프랑스의 "똘레랑스(관용)" 역시 이 책을 통해 한국사회에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국"이었던 프랑스의 똘레랑스는 제국통치기술의 일환이기에 분명 한계가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빨갱이"를 만들어내고 가차없이 때려잡는 70년대 말 한국사회를 피해 타국에서 살게 된 그의 경험을 생각해 본다면 나름 들여다 볼 만한 가치도 있을 터이다.
신자유주의가 광풍으로 몰아치기 직전의 유럽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타자를 환대(?)하고 관리했는지, 푸코가 조롱하던 welfare state 가 실제로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던 나름의 안전망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도 있다.
서론이 길었다. 나는 그의 첫 책을 읽으며 추모하고 싶었다.
도서관의 상호대출로 책을 받았다. 2006년 개정판이었다. 개정판 서문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문구는 "세상을 혐오하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다. 혐오하기보다는 분노하라. 분노하기 보다는 연대하고 동참하라" (p.6) 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나는 내가 경험한 세상을 종종 혐오해왔다. 당연히 분노도 느꼈다. 연대와 동참의 중요성은 대학시절 머리로 마음으로 뼈져리게 느껴보았다. 하지만, 지구화와 환경문제, 전쟁, 가속화된 지구적 분업화, 심각한 경제 불평등, 시민사회의 신자유주의화, SNS가 만들어낸 파편화된 일상과 자기계발에 함몰되어가는 개인의 원자화를 목도하고 (때로는 나 스스로도 그 보수화에 참여하며) “연대”는 저 멀리 달나라에나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종종 그 단어의 무게에 눌려 가능성을 외면하기도 했다.
다시금, 그 말을 곱씹어 보며 내 주변에서 미시적이지만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자고 되뇌어 보았다. 당장 노조의 파업준비위원회에 작은 시간이라도 내어 자원봉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동참없는 불평은 창피하니까.
...그리고 송경동 시인의 추모시를 찬찬히 읽어 보았다.
<이성과 사랑, 그 고귀함에 대하여 - 홍세화 선생님 영전에>
당신이 마지막 남기고 가신 말
'겸손'을 되새깁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빨리 오지 않더라도
절망하거나 훼절하지 않고
겸손하겠습니다
왜냐면, 이 나쁜 세상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견디며 살아가야하는
모든 소박한 이들의 삶이 우리에겐 더 소중하니까요
당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부패하고 썩어가는 인간들 앞에서도
겸손하겠습니다
왜냐면, 그들의 이른 주검이 새로운 시대의 싹들이 자라날
좋은 토양과 거름이 될 거니까요
겸손이 특권이 되지 않도록
겸손이 무슨 권위나 식견이나 자랑이 되지 않도록
겸손이 온갖 공모와 협잡의 안온한 밀실이 되지 않도록
겸손이 행동하지 않음의 핑계가 되지 않도록
겸손 앞에서도 겸손하겠습니다
끝까지 소년 척탄병으로 남아
어떤 야만의 땅에도 끝내 뿌리내릴 수 없었던 외로운 난민으로 남아
약자와 소수자와 빼앗긴 자들의 스피커로 남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한 한 알의 씨앗으로 남아
그렇게, 끝까지 추해지지 않은 어른으로 남아 준 당신을 따라
우리는 어떤 주체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지
어떤 관계의 회복과 성숙과 연대를 실현해 나가야 할 지
어떤 사랑과 불관용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할지도
잘 되새기겠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소년처럼 내내 해맑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수줍고 선하고 참할 수가 있었을까
어제는 한강변 가로수 잎들 사이에서 당신이 웃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토요일인데도 작업복을 입고 일터로 가고 있는
씩씩한 이주노동자들 사이에 끼어 웃고 있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멋진 오토바이를 타고 쌩하니 지나가는 무심한 청년에게서
당신을 보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이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서로 연대하며 어울려 살기를 바라던 한 인간"
당신의 고난에 빚지며
한국의 근대가 조금은 부끄럽지 않아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수줍고 겸손한 미소에 기대
한국의 오늘이 조금은 근사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부단한 학습과 질문을 따라 읽으며
이 사회가 조금은 눈귀 밝아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동지
잘 가십시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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