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현행화에 대한 짧은 생각
이렇듯 기록은 쉘렌버그의 숲 속에서 관리와 통제가 필요한 대상이 됩니다. 이런 시각을 좀 비틀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영화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에 사는 모든 동식물은 '에이와'를 중심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 먹고 먹히거나 공생하는 생태계를 이루는 것처럼 말입니다. 일상 속에서 매일 기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록은 ‘행위’이자 ‘행위의 결과물’이며, 잘 관리함으로써 집합적 지식의 총체로 발현되는 사회적 의미보다는 나의 공적, 사적 삶의 단편 속에서 우연히 발생하거나 또는 목적을 갖고 만들어 낸 읽어낼 수 있는 정보입니다. 모인/모은 기록은 거대 담론이나 사회의 요구와 관계없이 개인이나 집단에게는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개인과 집단에게 기록은 자기 증명과 PR의 영역입니다. 삶의 노력과 시간이 빚어내면서 켜켜이 쌓이는 것들 말입니다. 기록은 디자인 포트폴리오, 창업가의 아이디어와 사업화 과정을 그때그때 적은 메모집, 예술가의 작업 노트, 코카콜라 상표가 들어간 모든 것을 수집한 컬렉션, 연대기를 정리한 엑셀 목록, 깃허브의 커밋 그래프, 연구노트에 기록된 실험의 실패와 성과, 암 투병 과정에서 하루하루 변화하는 모습을 담은 유튜브 채널, 해가 바뀔 때마다 갱신하는 프로필, 유치원 어플에 쌓인 내 아이의 식단과 키와 몸무게와 교육활동, 현장학습 사진, 고등학교 3년 간 모의고사 성적표, 나의 숨겨진 정체성을 잔뜩 표출한 소셜 미디어 부계정, 스팀(Steam)에 쌓인 게임 이력과 랭킹, 우리 단체의 탄생과 질곡, 성장과정을 담은 자료집, 인스타그램에 모아낸 방석집 간판 모음, 우리 지역의 골목길만 모은 사진집, 50년 된 정미소의 열정과 노하우가 배어난 옛 사진과 단골의 증언 같은 것입니다.
이런 시각은 종종 기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타 분야 전문가들에게서 발견됩니다. 바이브컴퍼니(구 다음소프트)의 송길영 부사장은 최근 저서에서 핵개인의 출현을 시사하며 포용성이 담보된 다양성의 시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개인의 서사라고 표현했습니다.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은 ‘서사narrative’입니다. 성장과 좌절이 진실하게 누적된 나의 기록은 유일무이한 나만의 서사입니다.” 나의 기록은 나의 고유성을 보장함과 동시에, 축적되어 갈수록 진정성을 발휘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송길영,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교보문고, 2023)에서 발췌 및 인용
다양한 영역에서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는 개인들이 '기록하기'라는 공동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집단이 되어 모인 적도 있습니다. 도시연대는 도시의 '기록자'를 스스로 규정해 보고, 개개의 기록자가 도시와 기록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개별적 특수성은 인정하되 이런 활동 자체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과 중요성을 고민하기도 합니다.
인천 개항로프로젝트의 ‘족장’ 이창길 대표는 로컬에서 성공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기록이 쌓여 서사가 되고 팬덤이 된다. (중략) 자료를 남기고 기록을 정리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중략) 비플의 그림과 인도네시아 대학생의 사진처럼 시간이 축적된 아카이빙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로컬에서 공간을 운영하고 싶은데 가진 것도 보여줄 것도 없다면 오픈 과정을 소소하게 사진으로 찍어 인스타그램 계정에 공유해 보자. 동영상 툴을 다룰 줄 안다면 유튜브 채널에 브이로그 형식으로 기록하는 것도 좋다. 서사를 만들고 팬덤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창길, <로컬의 신: 서울을 따라하지 않는다>(몽스북, 2023)에서 발췌
요즘 시대에 자신만의 서사를 보여주는 것은 남들과는 다른 차별성, 경쟁력 그 자체입니다. 이미 기록에 대한 니즈가 곳곳에 존재함을 우리는 확인해오고 있습니다. 기록을 보유한 개인이나 집단이 기록을 보유하지 않은 것보다 자신의 정체성과 고유성, 대체불가능한 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과정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기록의 내용과 맥락을 개인이나 집단이 스스로 오랜 시간 쌓아나갈 수 있게 도구를 제공하고 과정을 돕는다면 그것 역시 기록 전문가의 역량이지 않을까요?
한편 우리는 빠르게 변해가는 정보매체, 정보 접근과 수록 방식, 기록 행위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거나/않으려 하거나, 데이터와 기록과 정보의 애매모호한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통일되고 통제 및 제어 가능한 환경에서 생산된 기록에 대한 수동적 기록관리만을 익숙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상상력과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낼 수 있는 다양한 기록 행위가, 누군가의 납득과 수용이 가능한 형태로 생산되어야만 비로소 관리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전문가의 시선에 서서 사람마다 제각기 달리 사용하는 기록이라는 이 단어에 대해서 냉철히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개개인과 집단이 경험하는 기록 행위와 패턴을 귀납적으로 읽어내고, 대중이 가진 기록에 대한 의미와 인식 체계,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효용가치를 새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존에 기록이라 불렀던 관리의 대상과 무엇이 차이가 있는지 확인하고 현실에 맞게 현행화해야 합니다.
이 글은 작가가 게재한 <기록과 사회> 2024년 5월 22일 자 뉴스레터를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