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전문가 대체가 아닌 분야의 진화
어릴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우물만 파라. 한 분야에 집중해야 전문가가 된다. 이 조언은 산업화 시대의 지혜였습니다. 공장에서는 한 가지 일을 잘 하는 사람이 가치 있었고, 분업화된 조직에서는 자기 영역만 아는 것이 미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언이 여전히 유효할지는 의문입니다.
AI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특정 분야의 깊은 지식은 AI가 몇 초 만에 검색하고 요약해 줍니다. 한 우물만 판 사람은 그 우물이 마를 때 대안이 없습니다.
인재상은 알파벳 형태로 진화해 왔습니다. I자형은 한 분야의 깊은 전문성만 가진 사람입니다. T자형은 한 분야의 전문성에 다양한 분야의 교양을 더한 사람입니다. 파이형(π)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폴리매스(Polymath)형이 이야기됩니다. 세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영역에서 전문성을 갖춘 사람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역사적 폴리매스로 꼽히지만, 이 개념이 21세기에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AI는 여러 분야에서 인간을 압도합니다. 체스, 바둑, 이미지 인식, 언어 번역. 하지만 AI가 여전히 어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영역을 연결하고 맥락을 파악하며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일입니다.
인간만의 종합적 인지, 메타인지, 다차원 판단 능력. 한마디로 다재다능함(Versatility)입니다. AI는 주어진 패턴 안에서는 탁월하지만, 패턴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은 아직 인간의 몫입니다.
AI 시대에는 코딩을 잘하는 솜씨보다 무엇을 코딩할지 결정하는, 즉 문제의식을 뾰족하게 발견하는 능력이 더 중요합니다. 이건 비단 코딩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기술적 깊이보다 방향을 설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 핵심이 된다는 뜻입니다.
T자형 인재들이 모이면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 작동합니다. 각자의 전문 영역에서 기여하고, 합쳐서 문제를 해결합니다.
폴리매스형 인재는 다르게 작동합니다. 한 사람 안에서 여러 분야가 연결됩니다. 이것을 연결지성(Connected Intelligence)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밤중에 샤워하다가 갑자기 두 분야의 접점이 떠오르는 경험, 그것이 연결지성입니다.
집단지성은 팀을 구성해야 하고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발생합니다. 연결지성은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납니다. 물론 폴리매스들이 모이면 더 강력한 협업이 가능합니다.
전문성이란 무엇일까요. 전통적으로는 '지식의 깊이 곱하기 시간'이었습니다. 한 분야에서 1만 시간을 투자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공식. '기술을 활용한 적용력 곱하기 민첩한 연결력'. 얼마나 오래 했느냐보다 얼마나 빠르게 새로운 것을 익히고 연결하느냐가 중요해진다는 뜻입니다.
폴리매스형 전문가는 정답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해법을 찾아갈 가능성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세 개의 분야를 안다는 것은 세 개의 관점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막다른 길에서 다른 길을 찾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사람은 때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기록 관련 학회에 가면 'IT 쪽 사람'으로 보이고, IT 컨퍼런스에 가면 '인문학 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경계인의 위치가 강점이 됩니다. 양쪽 언어를 모두 아는 통역사처럼, 분야 간 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기술자에게 아카이브의 가치를 설명하고, 아키비스트에게 AI의 가능성을 전달하는 번역자 역할. 이런 역할은 한 분야의 전문가 집단 안에서는 나오기 어렵습니다.
AI가 등장했다고 해서 전문가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화하는 것입니다. 아키비스트와 AI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협력 관계입니다. 폴리매스형 전문가는 이 협력을 설계하고 조율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입니다. 한 우물의 시대가 끝나고 연결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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