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라는 환상을 넘어, 두려움을 공유하는 실존의 기록
나희덕 시인의 시 <마른 물고기처럼>을 소개하고 싶다. 이 시는 영화와 소설로 우리에게 익숙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세계를 관통하는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은유이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이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중략)” — 나희덕, <마른 물고기처럼> 중
물기 없는 샘 바닥에 누워 서로의 비늘 위에 침을 뱉어주며 버티는 그 고단한 몸짓은, 장애라는 조건과 사랑이라는 사건이 맞부딪칠 때 발생하는 '실존적 두려움'의 본질을 가감 없이 대변해 준다. 이제 이 시의 행간을 따라, 깊은 바다 밑을 떠나 지상의 햇볕 아래로 걸어 나온 한 여자의 고독한 보폭을 함께 따라가 보고자 한다.
사랑인 줄 알았다. 하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나는 그것이 지독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희덕 시인은 시 <마른 물고기처럼>에서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침을 뱉어 비늘을 적신다. 그것은 숭고한 희생이라기보다, 혼자 남겨질지 모른다는 화자의 공포와 물고기의 생존 본능이 맞부딪히며 내는 비릿한 소리다.
다나베 세이코의 소설 <조제, 호랑이와 물고기들> 속의 조제 역시 이 마른 샘 바닥에 던져진 물고기와 닮아 있다. 25년 동안 할머니가 밀어주는 유모차라는 좁은 수조 안에 갇혀 살던 그녀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그녀를 맞이한 것은 눈부신 자유가 아니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현실의 공기였다. 그녀는 연약한 장애인으로 남기를 거부하며 독설을 내뱉고 이기적으로 군다. 그것은 시 속의 물고기가 파닥거리듯,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츠네오는 그런 조제에게 자신의 일상을 쪼개어 ‘침을 뱉듯’ 온기를 나눈다. 이들의 관계는 장애를 극복하는 감동 서사가 아니다. 서로의 결핍을 확인하고, 그 결핍이 만들어낸 두려움을 기꺼이 공유하는 두 인간의 실존적 투쟁이다.
원작 소설과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는 '유모차'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시작해 '바다'라는 광활한 외부 세계로 나아가는 여정을 공유한다. 그러나 두 매체가 도달한 종착지는 판이하다. 다나베 세이코의 원작은 훨씬 건조하고 주체적이다. 소설 속 조제는 츠네오를 ‘관리인’이라 부르며 대등하거나 때로는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그녀에게 츠네오는 구원자가 아니라, 세상을 구경하기 위한 통로이자 파트너다. 소설의 끝에서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언젠가 올 이별조차 삶의 자연스러운 풍화로 받아들이며, 지금 이 순간의 행복에 집중한다.
반면 영화는 사랑의 유효기간과 현실의 무게에 더 주목한다. 영화 속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는 조제(이케와키 치즈루 분)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현실의 무게에 지쳐 결국 도망치듯 이별을 선택하고 길 위에서 오열한다. 소설이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라면, 영화는 ‘사랑이 끝난 뒤 홀로 서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두 매체 모두 장애를 ‘극복해야 할 고난’이 아닌 ‘삶의 조건’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조제는 불쌍하지도, 성스럽지도 않다. 그녀는 다만 까다롭고, 욕망을 가졌으며, 때로는 비겁해지기도 하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호랑이’와 ‘물고기’는 조제의 내면을 지탱하는 두 축이다. 호랑이는 세상 밖으로 나온 조제가 마주해야 하는 두려움의 실체다. 휠체어를 밀어버리는 행인의 악의, 몸을 요구하는 이웃 아저씨의 파렴치함 등 지상은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정글이다. 하지만 조제는 츠네오의 손을 잡고 그 호랑이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두려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 자유의 첫걸음임을 알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그 투쟁 끝에 얻어내는 찰나의 평화다. 특히 영화의 핵심 장면인 수족관 모텔에서의 대사는 이 에세이의 심장과도 같다.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방 안에서 조제는 고백한다. "거기가 옛날에 내가 살던 곳이야. 깊고 깊은 바다 밑. 난 두 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이 대사는 나희덕의 시와 절묘하게 맞닿는다. 수족관이라는 안전한 어둠(과거)을 떠나 밝은 빛(현실)이 쏟아지는 지상으로 올라온 물고기는, 이제 다시는 눈먼 평화로 돌아갈 수 없다. 설령 언젠가 츠네오가 사라져 혼자 조개껍데기처럼 굴러다니게 될지라도, 조제는 "그것도 괜찮다"고 말한다. 이미 사랑을 통해 자신의 비늘을 적셔보았고, 호랑이를 마주할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나희덕의 시는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며 말한다. 빛은 진실이자 현실이며, 때로는 가차 없는 이별이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 그리고 시가 공통으로 건네는 위로는 명확하다. 사랑은 상대를 구원하는 마법이 아니라, 마른 바닥에서 함께 파닥거려주는 동행이라는 점이다. 츠네오가 뱉어준 침(사랑) 덕분에 조제는 잠시나마 비늘을 빛낼 수 있었고, 그 빛의 기억은 훗날 그녀가 혼자 생선을 굽고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장을 보는 독립된 일상을 지탱하는 동력이 된다.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감당해야 할 위험이다. 조제는 이제 깊은 바다 밑의 정적 대신, 지상의 햇볕 아래서 조금씩 말라가며 자신의 무늬를 완성해가는 강인한 존재가 되었다. 우리 역시 각자의 마른 샘 바닥에서 서로의 비늘 위에 침을 뱉어주며 살아간다. 빛이 어둠을 적셔버린 후에도, 비늘에 남은 하얀 소금기만큼은 우리가 서로 얼마나 뜨겁게 적셨는지 증명하는 훈장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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