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 장영철, 전숙희(와이즈건축)
2015년에 있었던 '한일위안부합의'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 철학을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가해자는 가해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피해자는 합의 과정에 빠졌는데, '합의'는 됐다는 발표. 양측은 '최종적', '불가역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한국 측에게는 왠지 역사적 숙원 사업을 풀었다는 치적을 되돌리지 말라는 외침처럼 보였다. 그들의 국정 철학에는 '공감'이 빠져있었다.
합의 2년 후 문재인 대통령은 '위안부 합의 TF 조사 결과에 대한 입장문'을 냈다. 그리고 이듬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박근혜 정부가 합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소홀히 했던 피해자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합의는 다시 시작되어야 하고 그 주체는 정부가 아닌 피해 할머니들이어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여성과 관광문화 세미나(1988)'에서 윤정옥 교수에 의해 처음 세상에 드러났다. 그리고 1991년 8월 14일 故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공개 증언이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기 위해 '(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는 1992년 1월 8일 '수요집회'를 시작했다.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한국 방문을 앞둔 때였다.
수요집회 개최 이듬 해 정대협은 집회에서 머물지 않고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겪었던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박물관 건립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건립위원회'를 조직했다. 당시 정부와 국회가 지원한 금액은 5억 원. 같은 해, 서울시는 박물관 건립부지로 서대문독립공원 내 매점 터를 기부했다. 건립위원회 입장에서는 사업비의 상당 부분을 절약할 수 있는 아주 감사한 조치였다. 박물관의 설계도 여성 건축가 김희옥(ATEC건축)의 재능기부로 실시설계까지 완료했다.
2006년 8월, 박물관 건립을 위한 관련 심의가 모두 통과됐다. 그런데 광복회, 순국선열유족회 등 일부 독립유공단체들이 서대문 독립공원 내 박물관 건립을 반대했다. 이유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 광복회의 입장은 "위안부 희생자들이 물론 불쌍하긴 하지만 목숨을 걸고 광복을 위해 싸운 이들과 '피해자'인 위안부는 층위가 다르며, 서대문 독립공원에 위안부 박물관이 들어오면 독립운동이라는 성지의 '순수성'이 훼손된다"는 것이었다(출처: 세계일보 2008.11.03, 뉴스한국 2010.01.06).
그럼에도 2009년 3월 8일 박물관 착공식이 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독립공원은 피해자를 기리는 곳이 아니라 독립 운동가들의 투쟁과 독립정신을 후손에게 교육시키는 장"이기 때문에 "좁은 울타리 안에서 순국선열 봉안소와 박물관이 같이 있다는 것은 억눌리고 피해를 받은 역사와 나라의 주권을 찾기 위해 투쟁한 자랑스러운 역사가 공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런 공존이 "역사를 배우기 위해 오는 학생들에게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출처: 한국신문, 2010.01.06.). 역사와 나라의 주권을 찾기 위한 '자랑스러운 투쟁' 만큼이나 내 딸, 내 여동생, 내 누나의 삶과 인권을 찾기 위한 싸움도 중요하다고 여겼다면 이런 박물관 만들 일도 없었을 텐데.
결국 서대문독립공원 내 건립은 중단됐다. 건립위원회의 입장은 ‘보류’였다. 수요집회를 1,000회(2011년 12월 14일) 이상 열면서, 그리고 그전부터 자신들의 잃어버린 인권과 회복될 명예훼손을 기다렸듯이 이번에도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박물관 건립 자체를 미루지는 않았다. 건립위원회는 모금액 17억 원 중 일부를 성산동 부지와 주택 매입에 사용했다. 준비한 사업비의 상당 부분을 부지 마련을 위해 썼으니 남은 사업비는 당연히 부족했을 터, 결국 박물관 건물은 신축이 아닌 기존 집의 리모델링으로 결정됐다.
비록 기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변경된 대상지에 지어질 박물관 설계권은 김희옥이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젊은 건축가들에게 설계 기회를 주었으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냈고 자신은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이 외 심사위원은 조성룡, 한만원, 김준성, 임재용, 선탁). 결국 제한경쟁 설계 방식으로 설계공모가 추진됐다. 설계 참여에 지명된 건축가는 장영철, 전숙희(와이즈 건축), 전병욱(JNK건축), 이정훈(조호건축), 김창균(UTAA건축)이었다. 4개 회사 중 와이즈건축이 '기억과 추모와 치유와 기록'이라는 주제로 당선됐다. 당선작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사랑방 같은 박물관'이라고 평가했다.
대지 서쪽 구석에 있는 주출입구로 오는 동안 관람객에게 박물관은 큰 건물처럼 보인다. 건물 기단부 옹벽에 쓰인 전벽돌이 건물 입면에도 사용되어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실제 크기보다 더 커 보이게 했을까? 위안부 할머니들이 원했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좋은 집은 큰 집이다. 고래등 같은 큰 집. '나라의 주권을 찾기 위해 자랑스러운 투쟁'을 한 사람들이 기념되는 그런 큰 집. 위안부 할머니들도 그런 큰 집을 가지고 싶으셨을 것이다.
평범한 동네와 전쟁이라는 콘텐츠 간에 간극은 의외로 순식간에 바뀐다. 관람객이 박물관의 작은 출입구를 들어서 맞닥뜨리는 공간은 좁은 통로다. '쇄석길'이라 불리는 이 통로에서 관람객은 어디로 끌려갈지 모르고 전쟁터로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한다. 할머니들의 평범한 삶이 전쟁터라는 비일상적인 환경으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경험. 쇄석길은 건물과 뒤쪽 옹벽 사이의 틈이다. 박물관이 집이었을 때 길고양이나 다니던 틈. 척척 거리는 군화소리가 내가 밟는 쇄석 소리와 뒤섞이는 이 좁은 틈에서 삶은 전쟁터로 전환된다. 어쩌면 이 둘은 실제로도 정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그 가까움은 집이었을 당시 2층 발코니였던 박물관의 추모관에서도 절정에 이른다.
발코니 난간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벽돌을 듬성듬성 쌓아 만든 벽이 있다. 듬성듬성 쌓인 벽돌은 틈을 만든다. 벽돌 안쪽에는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진과 이름 그리고 날짜가 적혀 있다. 그 기록 사이사이로 박물관 주변의 지극히 평범한 풍경이 포개진다. 난 이 장면이 가장 슬펐다.
현재 나의 삶은 '나라의 주권을 찾기 위한 자랑스러운 투쟁'을 통해 있을 수 있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 장소에서 추모하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나의 매일매일과 전혀 상관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싶은 역사와 억눌리고 피해를 받은 역사 모두가 있었기에 지금 내가 보는 평범한 풍경이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마도 맞다.
발코니 난간의 벽이 만들어내는 장면을 보면서 지극히 평범한,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을 지닌 동네와 박물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전쟁 그리고 피해자 사이에 간극을 굳이 메꿀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 간극이 있기에 평범한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전쟁의 리얼러티(reality)와 그 전쟁으로 희생된 할머니들을 더 처절하게, 하지만 사색적으로 추모하고 기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잘 모르는 것으로 교육시키지 말고 내가 잘 아는 것을 통해 무엇이든 느끼게 해 주자고 다짐했었다. 그래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녔다. 심지어는 뱃속에 있을 때도 그랬다. 내가 데리고 간 곳에서 아이가 무언가를 꼭 얻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공감하고 싶은 그곳의 분위기만이라도 느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나만의 교육방식이다.
그런데 정말 미안하게도 이 박물관만큼은 데리고 오고 싶지 않았다. 박물관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사실을 아이에게 설명해줄 자신이 내게는 아직 없다. 하지만 나를 울컥하게 만든 늘 보아온 주변의 평범한 풍경과 늘 대하는 햇살을 공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그때 함께 오려고 한다. 그때까지 난 이 집이 여전히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