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장(京橋莊) / 김세연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독립.
그리고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보 요원들이 돌아왔다.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도 국무위원들과 함께 제1진으로 도착했다. 환국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청사로 사용한 건물은 경교장(京橋莊)이다. 건물 근처에 '경교(京橋)'라는 다리 이름에서 따와 백범이 '경교장'이라 불렀다.
경교장은 일제시대 광산왕 최창학이 자신의 저택 일부로 지은 건물이었다. 최창학은 이 건물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로 헌납했는데, 이유는 자신의 친일경력을 무마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유통왕, 박흥식', '건축왕 정세권'과 함께 일제시대 경성의 대자본가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23년 삼성광산(三成鑛山)을 경영하며, 조선신탁주식회사 대주주 등 일본인 기업 경영에 참여했던 인물로 '광산왕'으로 불렸다.
1938년 12월 15일에 준공된 경교장의 처음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 갑신정변 때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가 이 건물 인근에 살았는데, 일제가 그를 기념하기 위해 그 일대를 '죽첨정(竹添町)다케조에마치'으로 정했다. 최창학은 건물 일대의 지명을 따라 '죽첨장'이라 불렀다. 건물명에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건물, 집'을 뜻하는 한자어로 '장(莊)'이 사용됐다는 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장(莊)'은 "고급여관, 저택'을 뜻한다. 그만큼 죽첨장이 고급 주택이었다는 얘기다. 1938년 2월호 《광업시대》에 '崔昌學氏와 阿房宮'이라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죽첨장은 화려했다. 전국적으로 건물이름에 장(莊)이 붙은 경우는 강릉 선교장, 이승만 대통령 사저 이화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이 환국 후 거주한 '삼청장(三淸莊)' 그리고 이곳 정도다.
죽첨장을 설계한 건축가는 김세연(1897~1975)이다. 시공은 일본 건축회사 오오바야시구미(大林組)가 맡았다. 이 회사는 현재 일본5대 대형 건설회사 중 한 곳이 됐다. 2012년에 준공한 도쿄 스카이트리(Tokyo Skytree)도 이 회사가 시공했다. 김세연은 '건축구조의 달인'이었다. 1920년 건축과 졸업 후 총독부 건축조직에 입사해 1941년 퇴사할 때까지 21년간 재직했다. 당시 활동했던 건축가들 중 가장 유명했던 박길룡이 설계를 맡았고 김세연은 구조를 담당했다. 둘 간의 호흡은 꽤 좋았다. 김세연이 구조 계산한 건물로는 미쓰코시백화점(現 신세계 백화점 본관), 화신백화점, 조지아백화점, 경성제대 본관 등이 있었고 설계를 했던 건물은 창신동의 舊 동덕여자고등학교 본관, 풍문여고, 동성상업학교(동성고등학교) 강당, 舊 보성중학교 강당, 대한극장, 중앙청 제2별관과 舊 국학대학 그리고 죽첨장 등이 있었다.
김세연은 조선총독부에 재직하고 있을 때 죽첨장을 설계했다. 그에게 죽첨장 설계는 부업이었다고 한다. 죽첨장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1930년대 근대 건축 성숙기의 면모를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와 아치(arch)창을 이용한 단아한 외관,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답다"이다. 분할비(分割比)가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전면은 3베이(bay)로 양쪽이 돌출돼 있다. 양쪽 베이는 대칭이 아니고 서쪽 부분의 폭이 더 넓다. 그래서 양쪽 베이 1층에 원형으로 돌출된 창이 동일하게 있지만 서쪽 베이에만 그 양쪽으로 세로로 긴 창이 하나씩 더 있다. 2층도 세로창이 서쪽 베이에는 5개, 동쪽 베이에는 3개가 있다.
가운데 1층에는 전면 폭 넓이 만큼의 현관이 설치돼 있고 2층에는 세로로 긴 아치창 5개가 연속돼 있다. 이 현관에서 1948년 2월 10일 백범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했다. 김구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경교장은 김구의 정치 철학에 맞춰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주무대였다.
"한국이 있어야 한국사람이 있고 한국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이 자주독립적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 때에 있어서 개인이나 자기의 집단의 사리사욕에 탐하여 국가민족의 백년대계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우리는 과거를 한 번 잊어버려 보자.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의심하지 말며, 타매하지 말고 피차에 진지한 애국심에 호소해 보자. ...(중략)...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백범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1948년 4월 19일, 백범 김구는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출발했다. 당시 북행을 만류하는 이들을 피해 김구는 지하실 한쪽에 있는 문을 통해 경교장을 빠져나갔다. 북한에 간 김구는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남북협상 4자회담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결국 UN 감시 아래 남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수립됐다. 남북 단독정부가 수립됐지만 김구는 민족통일운동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했다.
가장 영화로웠던 이유를 상실한 경교장은 원주인이었던 최창학에게 돌아갔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최창학이 재산관리인을 통해 경교장의 반환을 요구했다. 한국전쟁 전 경교장은 중화민국(타이완) 대사 관저로 잠시 사용되다 전쟁 중에는 미군 특수부대의 주둔지가 되었다. 이때까지도 경교장의 소유주는 최창학이었다. 최창학은 1956년 개설된 주한 월남대사관에 경교장을 빌려주었다가 1957년 매각했다. 그는 1959년에 사망했다. 1967년 10월까지 경교장은 월남대사관으로 사용되다 월남대사관이 회현동으로 이전하면서 고려병원에 매각됐다. 고려병원은 강북삼성병원의 전신이다(1995년 명칭 변경). 경교장을 매입한 고려병원은 2010년까지 병원시설로 사용했다. 2011년 3월 복원을 시작한 경교장은 2013년 3월 2일, 삼일절 94주년에 개방됐다. 경교장이 3.1절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을 기억하듯 건물도 가장 영화로웠던 시기로 기억된다. 80년이 넘은 경교장에서 사람들이 기억하는 시간은 백범 김구가 거주했던 3년 반이다(1945.11.23~1949.6.26). 그리고 복원이 끝난 뒤 경교장 내부는 백범이 암살된 1949년 6월 26일에 멈춰있다. 하지만 건물 앞으로는 쉴 새 없이 응급차와 택시가 지나가고 전면에는 병원 방문객들의 차량으로 가득차 있다.
경교장을 둘러보면서 백범 김구가 잠시 머물렀던 시기와 지금의 상황이 참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먼 거리가 건물의 얇은 벽, 현관문, 유리창을 통해 전환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무거운 커튼과 켜켜이 공간을 나누는 다다미방의 미닫이문이 완화해 주고 있지도 못했다. 결국 백범이 암살된 시간에 멈춰있는 건물 내부와 현재 시간의 외부를 포개어 그 사이의 비약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교장 2층 백범의 집무실에 가면 그의 몸을 관통한 총알이 뚫고 나간 깨진 유리창이 복원돼 있다. 깨진 유리 구멍을 통해 바깥을 보며 白凡(백정과 범부)이 원했던 세상을 상상해 봤다. 그 사이 외부에서 내부로 그 두터운 시간을 순식간에 관통해 들어오는 응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