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옛 벨기에영사관)
대학원을 다니면서 사당역으로 갈 일이 잦았다. 그때마다 사당역 인근에 있는 舊 벨기에영사관 건물이 참 생뚱맞아 보였다. 건물에 대한 자세한 내력을 몰라서 더욱 그랬다. 일단, 1900년대 초반에 지어졌을 법한 건물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반 서울의 경계는 여전히 한양 도성 안쪽과 성문 언저리였다. 아무리 넓게 잡아도 한강 이남은 서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건물이 외교시설(영사관)이라면 이곳에 있을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2004년 9월, '서울시립 남서울생활미술관'으로 사용되기 위해 말쑥한 모습으로 바뀌기 전까지만 해도 건물의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건물을 둘러싼 담 안쪽으로 들어갈 수는 당연히 없었고 그 밖에서 바라본 느낌도 쇠락한 가문의 마지막 저택 같았다.
벨기에영사관으로 지어진 건물이니 내력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와 벨기에와의 관계부터 봐야한다. 다른 나라에 비해 늦었지만 조선은 1901년 3월 23일에 벨기에와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조선 쪽에서는 의정부찬정외부대신 박제순이, 벨기에 쪽에서는 레온 뱅카르(Leon Vincart)가 특명전권대신으로 임명됐다. 이후 뱅카르는 벨기에 총영사로 취임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대부분 외국과의 통상조약이 1880년대 이루어졌던데 반해 벨기에와는 10년가량 늦은 1901년에 체결됐다는 것과 당시 벨기에가 중립국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10년 사이에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1897년). 그리고 고종이 국제사회에서 대한제국의 정체성으로 생각한 모델이 바로 벨기에와 같은 중립국이었다.
'조백수호통상조약' 체결 직후 처음 벨기에영사관이 있던 자리는 당시 외교가였던 정동으로, 현재 캐나다대사관이 있는 자리다. 그러다 1902년 10월 뱅카르는 벨기에영사관 건물을 짓기 위해 회현동2가 78번지 일대 땅을 매입했다. 그 자리에는 현재 우리은행 본점이 들어서 있다. 영사관 건물은 1903년 9월 착공돼 1905년에 준공됐다. 설계자는 고다마(小屋), 시공자는 호쿠리쿠(北陸) 토목회사 그리고 공사 감독관은 니시지마(西島)였다. 건물의 공사기간은 러일전쟁으로 인해 늘어졌다. 하지만 러일전쟁이 이 건물에 미친 영향은 늘어난 공사기간 외 또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체결했고 그 결과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당연히 고종이 꿈꾸었던 대한제국의 중립국화는 물거품이 됐고 그 모델인 벨기에의 역할도 크게 줄었다. 1919년 벨기에영사관은 충무로1가 18로 이전했다. 2021년 기준 116년 된 건물의 역사에서 건물의 이름이 된 '벨기에영사관'으로 사용했던 기간은 14년밖에 안 된다.
이후 건물은 요코하마 생명보험회사에 매각되어 지점과 사택으로 쓰였다. 1930년대 중반에는 본권번이 이 건물을 차지했다. 권번(券番)은 기생 조합으로 당시 서울에 5대 권번이 있었는데 본권번은 그중 하나였다(그 외 한성권번, 동권번, 종로권번, 조선권번).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에는 일본 해군성 무관부관저로 쓰이기도 했고 광복 후에는 국유재산으로 귀속되어 해군군악대가 차지했다. 1949년부터는 당시 새로 편성된 공군본부 청사로 전환되기도 했고 1953년부터는 해군 헌병감실 등 해군 제1분청의 용도로 사용됐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군사시설로 사용된 것으로 봐서 건물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 같다.
1970년에 옛 상업은행(現 우리은행)이 이 건물을 불하받아 소유권을 취득했다. 참 당연한 얘기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건물의 소유주만 계속 바뀌었을 뿐 위치는 처음 지어진 회현동2가 78번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건물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건물이 있던 대지가 도심재개발구역에 편입된 것이다. 당연히 소유주는 고층 건물을 짓기 원했다. 사실 1980년대 초반이라면 쓱 부셔버려도 누가 뭐라 할 시대는 아닐 텐데 이 건물은 1977년 11월 22일에 사적 제254호로 지정돼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결국 1981년 11월부터 1982년 8월까지 舊 벨기에영사관이 이곳으로 이전, 복원됐다..
이전 복원 후 옛 벨기에영사관은 원래부터 있었던 땅이 아니었음에도 다른 역사적 건물들처럼 그 땅의 변화를 멈추게 만들었고 앙각이라는 사선제한으로 주변 건물의 형태와 스카이라인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건물의 활용방안은 깊게 고려되지 않았던 것 같다. 우선 우리은행 사료관으로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가만히 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결과적으로 우리은행은 옛 벨기에영사관이 원래 있었던 대지(회현동)의 개발가치를 확보하기 위해 현재 대지(남현동)의 개발가치를 포기한 상황이 됐다.
옛 벨기에영사관이 1980년대 초반 서울 도심을 빠져나와 당시에는 한적했던 지금의 부지로 이전되면서 얻은 영광(?)도 있다. 그것은 100% 원형은 아니더라도 현재까지 남아 있는 원형을 간직한 유이한 대사관 건물이라는 지위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그 땅에, 여전히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영국대사관이다.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19세기에는 외교 관계 건물들이 대부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유는 외교 관계 건물이기 때문에 정치적 행위에 안정적인 분위기를 제공하고 신뢰감을 높이기 위해 자국의 전통 양식이 아닌 유럽 역사주의의 보편적 흐름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옛 벨기에영사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건물 전면에 발코니를 두지 않고 동쪽과 북서쪽에 작게 설치했다. 다른 외교건물인 舊 프랑스공사관(1896)이나 舊 러시아공사관 그리고 영국대사관과 비교했을 때 발코니 면적은 확실히 작다. 아무래도 건물이 지어졌던 대지가 외교가였던 정동이 아닌 회현동이었다는 점과 건물 전면(북측)에 지금은 퇴계로가 된 길이 지나가고 있었다는 도시적 맥락을 반영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옛 벨기에영사관을 볼 때마다 오히려 지금 자리에서 느끼는 생뚱맞음의 '탈맥락'이 이 건물이 주는 매력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예술이 추구했던 '낯설게 하기' 중 '고립'이라는 방식이 있는데, 이는 '어떤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 놓는 방식'이라고 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벨기에영사관이 처음 자리(사물이 원래 있던 환경)에서 이곳 남현동(엉뚱한 곳)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고립'이라는 방식을 지금보다 더 강하게 만드는 건 어떨까? 앙각에 의한 사선 규제로 주변 건물의 스카이라인을 규제하지 말고 그냥 높은 건물을 옛 벨기에영사관 옆에 두어 극단적인 대조를 통해 이 건물이 더 낯설어 보이게 하는 방법이다. 옛 벨기에영사관 옆에 함께 지어졌던 우리은행 사당역 지점도 지금처럼 전혀 관계가 없는 듯한 냉담한 모습 말고 대조를 이루며 옛 벨기에영사관를 더 돋보이게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미술관으로 재개관 당시 건물 출입구 안쪽에 카페가 있었다. 카페에서 바깥 풍경을 보면 왠지 건물이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 장면이 영구적이지 않고 계속 바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창문이라는 틀 안의 장면이 영화처럼 바뀌던지 아니면 건물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지 할 것 같은 묘한 분리감. 그런데 그 묘한 분리감이 이 공간의 매력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료를 찾다 못 찾은 사실 하나가 있다. 옛 벨기에영사관 주변으로는 투명하고 낮은 담이 둘러쳐져 있다. 그리고 대지 북동쪽 구석, 남부순환로로 나 있는 입구 한쪽 구석에 경비초소가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옛 벨기에영사관을 지키기 위한 경비초소 같지만 사실 국보1호 남대문도, 보물1호 동대문도 이를 지키기 위한 경비초소는 없다. 그럼 옛 벨기에영사관만 특별대우를 받을 이유는 없을 테니 이 경비초소는 이 건물을 위한 것이 아니다. 건물 주위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다 이 경비초소에 있는 경비원이 달려왔다. 건물 남동쪽 구석, 남현1길에 면한 구석에 변압기 박스가 있는데 내가 가까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변압기 박스가 왜 여기에 있는지 변압기 박스가 맞기는 한 건지 관련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변압기 박스가 설치된 시기에 따라 옛 벨기에영사관이 문화재임에도 원래 자리에서 이곳으로 이전해 온 다른 이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울특별시 미디어재단이 운영하는 TBS에서는 '다양한 공간의 이야기를 시민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공간사람'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2020년 6월 11일, 건물의 역사와 이곳에서 열린 <모두의 건축 소장품> 전시를 함께 소개하는 영상이 방영됐다. 영상에서 난 건물에 대해 설명하는 역할을 맡은 안창모 교수님과 전시를 기획한 배형민 교수님 둘 모두와 인터뷰를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