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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ur Oct 14. 2021

신이 빚은 건축물

롱샹(Ronchamp) 성당과 롱샹 언덕

3,000명 남짓한 주민이 사는 프랑스 마을 롱샹(Ronchamp)에는 높지 않지만 주변에 비해 도드라진 지형 때문에 눈에 띄는 언덕이 있다. 언덕 위에는 오랫동안 성당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나면서 성당은 순례지가 됐다. 15세기에 건립된 성당이 1913년 벼락으로 붕괴된 후 1936년 새로운 성당이 지어졌다. 하지만 이 성당도 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됐다. 한동안 폐허 더미만 쌓여있던 언덕에 새로운 성당을 짓겠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마리 알랭 쿠투리에(Marie-Alain Couturier) 신부는 현대예술과 건축의 정신을 담은 성당을 설계해줄 건축가를 찾아 나섰다.

개혁파였던 쿠투리에 신부에게 당시 성당들은 퀴퀴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현대 화가들의 작품처럼 성당이 새로운 시대정신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민 끝에 찾은 건축가는 그때까지 한 번도 성당을 지어본 적 없었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였다. 심지어 르 코르뷔지에는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다.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을 가진 건축가는 그러나 건축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꽤 알려져 있다. 4년 전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그에 대한 전시가 열렸는데, 전시 제목이 ‘현대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였다. 얼마나 영향력이 대단하면 ‘아버지’라는 수식어를 붙였을까? 스위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던 르 코르뷔지에는 ‘근대건축의 5원칙’을 정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근대건축의 5원칙은 필로티(Piloti), 자유로운 평면, 자유로운 입면, 가로로 긴 창, 옥상정원이다.

1950년, 설계를 의뢰받은 르 코르뷔지에는 폐허만 남은 언덕 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앞으로 설계를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고민했다. 우선 언덕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자재를 실은 트럭이 올라올 수 없었다. 금이 가고 불에 타 부서지기 쉬운 상태였지만 파괴된 이전 성당의 잔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실적인 여건 외에도 새로운 시대정신을 성당에 담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듬해 1월, 르 코르뷔지에는 브장송(Besançon) 교구 성미술위원회에 자신의 설계안을 제출했다. 위원회는 그가 제출한 설계안을 승인했지만 바로 공사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설계안에 대한 반대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자들에게 그의 설계안은 너무 급진적이었다. 결국 위원회의 승인을 받고 2년이 지난 1953년 9월이 되어서야 착공할 수 있었다.

일반인이 봐도 놀랄 만큼 롱샹성당의 형태는 감동적이다. 건물의 어떤 벽도 곧게 세워져 있지 않고 지붕은 남동쪽 꼭짓점을 향해 곡선을 그리며 상승해 있다. 초록색 잔디밭 위에 하얀색 성당은 마치 신이 빚어놓은 듯하다. 형태적인 건축물이 너무도 흔한 지금에 봐도 롱샹성당의 형태는 강력하고 아름답다.


더군다나 르 코르뷔지에가 1920년대 큐비즘(Cubism)을 대표하는 건축가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같은 건축가의 작품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다. 1928년에 설계한 대표작 빌라 사보아(Villa Savoye)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기하학적 형태에 집착했고 건축의 아름다움은 장식이 아닌 비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로마의 판테온,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이상적인 비례를 지닌 선례였다.

어떤 건축가는 롱샹성당을 두고 “르 코르뷔지에가 걸어온 길을 스스로 부정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물”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롱샹성당은 1920년대 그의 건축과 같은 흐름을 공유하고 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부분이 성당의 남쪽과 동쪽 벽이다.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건물에서 벽은 대부분 얇은 면(面) 같다. 이는 그가 매료됐던 철근콘크리트라는 새로운 재료로 인해 가능했다. 철근콘크리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건물의 하중은 벽으로 전달됐다. 그래서 건물이 높아질수록 아래층 벽은 계속 두꺼워졌고 창은 작아졌다. 하지만 철근콘크리트는 건물의 하중을 벽이 아닌 기둥과 보(beam)로 전달했다. 하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벽은 한없이 얇아질 수 있었고 창도 커질 수 있었다. 심지어 벽 전체가 유리이지만 층수는 계속 올라가는 초고층 건물도 가능해졌다.

그런데 롱샹성당에서 벽은 다시 두꺼워졌다. 심지어 어떤 부분의 두께는 3.7m에 달했다. 얼핏 보면 조개껍데기 같은 지붕을 두툼한 벽이 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당 내부에 기둥이 없어서 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벽과 지붕 사이에는 빛이 새어 들어오는 틈이 있다. 틈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지붕과 벽을 연결하는 구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구간을 수직으로 내려보면 어떤 창과도 만나지 않는다. 벽 속에 기둥을 숨겼기 때문이다.


결국 롱샹성당에서도 건물의 하중을 지지하는 건 벽이 아닌 기둥이다. 철근콘크리트를 통해 하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입면은 한없이 얇아질 수 있지만 반대로 한없이 두꺼워질 수도 있다. 또한, 한없이 넓어질 수 있는 창은 반대로 한없이 작아질 수도 있다.

그럼 르 코르뷔지에는 왜 롱샹성당에서만 반대로 한 걸까? 폐허만 남은 언덕 위에서 그는 자신이 설계한 성당이 대지와 접촉해야 하며, 장소의 상황을 명백히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해 온 설계 방식을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고려해야 하는 ‘장소’는 바로 ‘언덕’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성당은 마을에서 눈에 띄는 언덕 위에 있다. 결국 언덕 위에서 그가 답해야 하는 질문은 눈에 띄는 장소에 어떤 형태의 성당이 올라가야 새로운 시대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가였다.


만약 르 코르뷔지에가 그때까지 자신이 추구해 온 설계 방식을 따랐다면 롱샹성당의 아름다움은 비례에서 나왔을 것이다. 문제는 비례미(美)의 기원이 앞서 언급했던 서양 건축의 고전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결국 성당은 눈에 띄는 자리에 서양 고전건축과 맞닿은 비례미를 갖게 되는 셈이다. 이는 자신에게 설계를 의뢰한 쿠투리에 신부의 신념과 맞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지금까지의 설계 방식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정의한 ‘근대건축의 원칙’까지 바꾼 건 아니었다. 롱샹성당은 르 코르뷔지에가 스스로 부정한 아이러니한 결과물이 아니라 스스로 찾은 새로운 길이다.


롱샹성당에서 장소의 중요성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성당의 공식적인 명칭에서도 드러난다.

‘Notre Dame du Haut’

높은 곳에 있는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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