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차 초등교사이자, 영어교육 전공자가 풀어보는 문해력 이야기
영어가 먼저예요? 아님 국어가 먼저예요? 둘 다 시켜도 돼요?
20년 차 초등교사이고. 영어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교육'이라고 하면 나름의 전문성도 꽤나 갖추고 있는 나지만, 이런 질문은 늘 어렵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국어가 먼저다.
모국어 언어체계가 확실히 잡혀 있어야, 다른 언어가 들어와도 혼동이 생기지 않거든.
학령기 전 아동들에게 모국어 체계가 아직 확실하게 잡혀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영어 입력에 더 중점을 두게 되면, 이도 저도 안 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언어력을 키우기에 가장 적절한 나이는 뇌가 말랑말랑한 14세 전까지가 맞지만, 모국어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어만을 강조해서는 안된다.
한글 체계가 제대로 안 잡혀 있는 상태에서, 5-6-7세 내내 영어 유치원에 보냈다가 오히려 한글 퇴행이 온 경우를 많이 봤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영어 유치원을 언제 보내면 좋을까요?'라고 물을 때마다, 결국 부모님의 선택이긴 하지만 한글을 뗐으면 보내도 괜찮은데, 한글을 떼지 않고 보내는 건 생각해 보라고 조언하곤 했다. 꼭 지금 영어 유치원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집에서 꼭 한글책을 많이 읽어주고 한글책을 많이 읽게 하라고. 영어 노출량만 늘리면 안 된다고 덧붙이곤 했다.
나는 어떻게 했냐고?
우리 아이의 이야기를 하자면..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긴 하는데..
아이는 한글을 빨리 뗀 편이다. 그러나 문자 언어에 빨리 노출시켜 주고, 인위적으로 학습한 결과는 아니다.
한국의 여느 부모와 다름없이, 그림 밑에 한글이 쓰여 있는 '동물', '과일'과 같은 2절지 포스터를 창문과 벽 여기저기에 붙여 노출을 시켜주긴 했지만. 인위적으로 써 보라고 하거나,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어~ 한번 볼래?라는 형식으로 가르쳐 주진 않았다.
가만가만, 두 번을 깜짝 놀란적이 있었지.
아이의 장난감들 중에는 단어들이 적혀있는 단어카드 세트와 '국기 꽂기' 세트가 있었는데.. 22개월쯤 그림도 없는 단어카드에 적혀있는 단어들을 읽어내는 걸 보고 우리 아이가 천재는 아닐까? 콩깍지가 씌어 남편과 둘이서 난리법석을 피운 적은 있다. 또 한 번은. 해당되는 국가에 정확하게 국기를 꽂는 걸 목격하고 또 한 번 콩깍지가 씌었었다.
국기 꽂기 세트라 함은... 1-2cm 두께의 세계 지도판에 주요 국가들 자리에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작은 구멍에 해당되는 국기를 꽂는 놀이판이었는데, 그 조막만 한 손으로 해당되는 국기들을 정확하게 꽂는 게 아닌가. 아니 저 나이에 저런 소근육 발달을!!! 아니 저런 기가 막힌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니!! 라며
한국의 여느 부모와 다름없이, 우리 부부는 천재가 아닌가. 감격하며 또 한 번 감격에 겨워했다.
호들갑 떠는 우리 부부의 모습을 보고, 아직 미혼이었던 의사 동생은 '발달 단계가 되면 다 하게 되있다~ 아직 그 시기가 아닌데, 읽는다고 착각 한거 아냐?' 라며 별로 대단하지 않은 일로 호들갑을 떤다며 뭐라 했었는데... 본인의 딸이 탄생하고 나서, "우리 딸 넘 천재지 않나? 벌써 이걸 하더라." 라며 그때의 나보다 더 흥분하는 동생을 보며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구나.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이야기가 갑자기 딴 쪽으로 빠진 것 같은데...
인위적으로 뭘 가르쳐 주려고 하는 대신, 남편과 돌아가면서 끝없이 책을 읽어줬다.
밤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줬다. 지도 교수님이 밤마다 아이 잠자리에서 영어책을 읽어주셨다는 말씀이 뇌리에 깊게 박혀 있어서인지. 남편도 나도 책을 열심히 읽어줬다. (영어책 말고, 한글책이긴 했지만)
특히 말하는 걸 좋아하는 남편은 아이의 요구 사항을 잘 들어줬다.
아이가 같은 책을 읽어달라고 또 가지고 와도 같은 책이라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줬고.
그림책에 나와 있는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 이건 뭘까?' ' 지금 이건 뭘 하는 장면일까?' 물어보며 아이가 자연스럽게 말을 많이 할 수 있는 상황도 같이 만들어 주었다.
타요. 폴리. 할 것 없이 그 당신 한참 아이들이 빠져있었던 캐릭터들을 이야기 속으로 다 데리고 와서, 스토리를 내 맘대로 만들어서 이야기해 줬었는데, 아이는 똑같은 이야기인데도 몇 십 번을 들어도 재미있는지
"엄마 계속. 또요. 또요. 또 해주세요." 그랬다.
아이는 4살 때부터 혼자서 책을 읽는 것도 좋아했지만엄마 아빠가 책을 읽어주는 것도 좋아했다. 잠자기 전에는 특히.
아이가 한글을 빨리 깨친 데는 수다스러운 엄마, 아빠의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책'이라는 매개체로 아이는 음성언어(듣기. 말하기)에 끊임없이 노출되었고,
'책'이라는 매개체로 아이는 문자언어(글자)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의도적인 학습 없이 자연스럽게 한글을 깨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시기의 아이들이, 반복해서 같은 책만 읽어달라 하고 반복해서 같은 책만 보려고 해도 괜찮다.
이 시기만 지나면, 어느새 '반복'은 사라지고 자신들의 관심사에 따라 다양하게 책을 읽으려는 시기가 사연스럽게 오기 때문에 그런 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자기가 좋아하는 거라면 아무리 '반복' 해도 지겹지 않을 때거든. 공룡책을 100번도 넘게 읽어달라고 하고. 자동차 책을 100번도 넘게 읽어도 또 보고 싶어 하고 또 읽고 싶어 하고 또 듣고 싶어 하는 때라. 같은 이야기 또 해주고. 같은 책 또 읽어주어도... 아이는 그저 즐겁기만 하다.
5살 때 몇 십 개가 되는 공룡이름을 다 기억했던 아이가. 7살까지 차 엠블럼만 봐도, 뒷모습만 봐도 무슨 차인지 이름을 다 맞추던 아이가 지금은 기억해내지 못한다. 홀라당 다 까먹었더라고.
아니, 타요 이야기를 100번도 넘게 해달라고 했던 너는데.. 엄마가 해 준 이야기 기억 안 나?
아니, 공룡 책만 100번도 넘게 읽더니... 요 공룡 이름 기억 안 나?
엄마. 지금의 난 5살의 내가 아니에요. 7살의 내가 아닌걸요?
기억이 안 나는데요? 이젠 관심이 전투기로 옮겨간 아이에게, 공룡 이야기와 타요 이야기는 저 멀리 기억 밖으로 떠나 버렸나 보더라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선택적 기억력으로 변한 아이에게 적응이 필요하다.
아무튼 요점은
1) 학령기 전 아이들에게는 '문자 언어'를 의도적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음성 언어'에 즐겁게. 자주 노출되는 경험이 더 필요하다. 언어학자 크라센이 말한 것처럼 입력(input)이 많으면, 부지불식 간에 아이의 모국어 체계를 자연스럽게 습득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2) 그런 면에서, '스토리 텔링(상상해서 스토리 만들어 이야기 해주기)', '소리 내어 책 읽어주기' , '아이가 상상해서 이야기 만들어 보게 하기'와 같은 활동들이 아이의 문해력을 길러주는 데 도움이 된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