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오답노트였다.

내 인생의 용량 확보하기

by 아름답게




문득 그런 날이 있다.



어쩌면 월요일 출근이 싫어서라는 핑계로 덮어버리면 그만이었을

일요일 늦은 밤 불쑥 찾아온 불청객 같은 그 마음.



친한 친구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다

우연히 자동으로 넘어가버린 페이지에는 별로 친하지는 않지만 맞팔이 되어 있는 동료의 일상을 보게 되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나의 SNS계정은 비공개로 활용하는 편인데,

그곳은 나의 친구들과 소통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나의 일기장이기도 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별로 친하지 않은 동료이지만 나에게 동그라미도 그렇다고 엑스도 아닌 세모인 사람이었기에 너무 오랜 기간 그녀의 요청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매일 직장에서 보는 사이라 조금 불편할까 싶어 별생각 없이 그녀의 팔로우 요청을 수락했고 이상하게도 그녀는 내가 올리는 스토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다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오는 불편감이 꽤나 있었는데

어떤 느낌이냐면 우리 집 안방에서 자유로이 행보하는데 불청객이 들이닥친 느낌이랄까?

혹은 내 일기장을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그전에 나와 특별한 이벤트가 없었기에 단순히 팔로우를 올리기 위한 형식적인 요청이라 생각했으나 나의 일기장을 빠짐없이 챙겨보는 그녀가 부담스럽기도 했고 또 최근 그녀의 이상한 행보까지 떠오르며 불편감이 더욱 증폭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최근에 나에게 무례한 행동을 서슴없이 했었는데

그건 바로 그녀의 숙취와 관련된 일이다.



조금 이기적이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은 했으나 나에게 '세모'였던 그녀는 뜬금없이 주중에 과음으로 숙취에 시달리는 날이면 내 개인실을 본인의 숙취해소용 안정실로 사용하려고 찾아왔다.



처음엔 누구나 어쩔 수 없는 극한 상황에는 체면을 불구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다 생각하고 받아주었으나

그 뒤로 그녀는 숙취가 있으면 아무 설명 없이 내 실에 들이닥쳐 이전에 본인에게 내가 해주었던 배려를 당연하게 요구했다. 보통 경우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 찾지 않았겠지만 그녀의 당당한 무례함에 불쾌해진 나는 차에 가서 쉬는 게 더 좋겠다 말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나의 단호함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잔뜩 찡그린 얼굴과 더불어 힘 조절이 어려운지 뒤돌아 나가며 세게 쿵-하고 닫히는 문소리였다.



그런 그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그녀의 일상이 궁금해 SNS를 본 게 사실이 아닐지라도 내가 그녀의 일상을 본 기록이 남겨지는 거 자체에 순간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돌릴 수 있다면 기록을 취소하고 싶을 정도로 거대한 스트레스를 더 짊어지지 않고 얼른 다른 즐거운 것으로 전환을 했어야 하는데 그 순간, 나의 뇌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 카테고리에서 과거 속에 묻어둔 인물들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마치 오답노트를 펼치듯 내 인생에서 나를 힘들게 했고 그 끝이 좋지 않았던 사람들의 얼굴과 그들과의 기억 조각조각이 펼쳐지면서 그때 느낀 감정들이 생생해지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났지만

가장 힘들었던 유형이 이유 없는 텃세를 부리는 자인 거 같다.



W는 본인의 열등감을 건강하게 해소하지 못하고 열등감을 느끼는 상대를 따돌리고 기어이 그 상대가 기죽은 모습을 봐야 본인의 열등감이 해소되는 최악의 타입이었는데



W의 이유 없는 텃세가 나를 향했을 때, 나는 당당하게 그녀를 동료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분했는지 그 사이 나와 새롭게 안면이 튼 동료들에게 내 이간질을 하기 시작했고 동료들은 전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내게서 멀어지는 '척'을 한 것을 경험했다.



겨우 '척'이었기에 그녀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가 큰 타격을 입지 않는 거 같으니 어느새 그녀는 새로운 대상을 찾아 물색했고 그 대상은 늘 바뀌었다.



스트레스의 알고리즘은 나에게 잊고 있던 W와의 에피소드와 또 그녀의 이간질에 나를 등지고 그녀 편이 되어주는 척을 했던 동료들까지 싹 다 차단했던 나의 잊고 있던 과거의 행동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



일명 '차단된 계정'에는 W와 W의 이간질에 나를 등지는 시늉을 했던 이들이 들어있었다.



문득 그 계정을 보다

이렇게 차단을 해놓는 것도 애정이었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이 몽실 올라왔다.



이제는 다시 꺼내어봐도 기분은 나빴지만 별생각 없는 그 기억들

굳이 차단을 해서까지 보고 싶지 않았던 그 당시의 나의 마음을 토닥이며 자신을 어찌하지 못해 내게 상처를 주려했던 그들을 꺼내어 차단을 해제해 보았다.



사실 조금 망설였지만 '차단 해제' 버튼이 눌렸음에도 나의 SNS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일이 벌써 5년 전의 일이었던 거 같다.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생각을 돌이켜 보다 내 인생에서 일복이 넘쳐흘렀던 2021년의 어느 시간을 흘려보내고 잠들었다.









월요일,

출근을 해서 커피를 한잔 내리고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핸드폰에 알람 소리가 울린다.

알람소리에 휴대폰을 열어 팝업 창을 보니 잘 사용하지도 않는 어플의 알람이었다.



"S님의 생일입니다."



또 스쳐가는 얼굴이 있다.



첫 직장생활을 함께 시작했을 때 만난 S,



아마 오늘이 S의 생일이라는 알람이 뜨지 않았다면 이 글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나의 모든 걸 가지고 싶어 했다.

나의 가족, 나의 친구들, 나의 취향까지도....! 그런 그녀는 나의 정규직 합격 소식과 함께 내면에 감추었던 열등감들이 폭발하였는지 내 합격이 사실인지 여부와 발령 상황 등 나의 개인적인 것들에 집요하게 집착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를 자연스럽게 멀리했다.



그녀를 멀리한 지 3개월 후 그녀는 아주 장문의 메시지를 나에게 보냈는데 주된 내용은 "이유를 모르겠다." "네가 그렇게 연락 안 하고 나는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등 여전히 본인의 잘못은 모르는 척을 하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고 나는 그녀의 메시지에 조목조목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영영 답을 하지 못했다.



S의 얼굴과 S와 보낸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가면서 그 당시 느꼈던 그 답답하고 속상했던 감정들은 정말 미세하게 떠올리려 노력하면 이전처럼 저리지 않고 피부에 살짝 와닿고 찌릿하는 정도로 약해졌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이 느낌....


오히려 그때 잘 마무리한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의 마음이 된 게 신기했다.









역시나 이 오답노트의 마지막 페이지...



그 마음들 끝에는 아련함과 아쉬움 등 여러 감정으로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져

이제는 시절 인연이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을 거 같은 누군가가 있다.



19살에 만나 20대 전부를 함께 보내고 30대가 된 어느 시점 나를 끊어낸 친구 D.



D는 내가 정말 가족처럼 아꼈던 친구였는데 그녀는 늘 나의 '가족 같다'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20대를 함께 보내며 그녀의 가족 관계와 분위기가 우리 가족과는 다르다는 걸 깨닫고 그 표현을 더 이상 쓰지 않았지만) 그렇게 가족 같던 그녀는 30대의 초반을 향하던 어느 무렵, 19살 철없던 시절부터 내가 늘 꿈꾸고 말해왔던 나만의 안정된 삶의 궤도(*커리어 우먼이 꿈이었다.)에 올라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나의 공간으로 초대한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운전도 겨우 시작한 병아리 운전기사로서 그 감회를 서로 나누었던 기억 속에는 어느 깊은 가을 물들였던 단풍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그녀와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이 지역에서 본 가장 아름답고 좋은 것들로 채워주고 싶은 욕심에 부지런히 함께 누볐던 기억 또한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나의 20대를 열심히 보내어 드디어 내가 원하던 꿈을 이뤘다며 오랜 친구인 D와 축하를 받고 기쁨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렇게 우리 집에 며칠을 머물고는 알 수 없는 씁쓸한 미소로 떠난 그녀는 내게 축하는커녕 홀연히 선을 그어버리고 떠났다.



평생 함께할 거 같았던 D의 얼굴과 함께 했던 모든 시간들이 하나씩 스치면서 그간 덮어놓고 있던 혹은 가지고 있던 어떤 미묘한 감정들의 결론이 오히려 후련함으로 도달하기 시작했다.



분명 어제는 쳐다보기도 싫던 내 삶의 오답노트들이었는데

이 어지러운 생각들이

또 지저분하고 엉키어 털어낼 수 없던 기억들이

생각을 곱씹으며 털어내고 결을 다듬어보니 그 끝에 오래전 박힌 화살을 가슴에 품고 있는 나 자신이 보였다.



그 화실은 이미 부식되어 손만 닿아도 금세 뽑아낼 거 같아 보였고 화살이 꽂힌 자리는 새살이 돋아 작은 흉이 되어 있었다.


이제 나는 완전하게 과거의 내게 꽂힌 화살을 스스로 뽑아내려 손을 뻗었다.



되려 화살을 뽑기 전에 아플까 걱정하여 수년동안 그 화살을 뽑아내지 않고 상처에 박아두었던 내가 스스로를 힘들게 했다는 걸 깨닫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 화살을 뽑아내는 오늘,

나는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하고 후련했다.



아마도 새 살이 잘 아물었기 때문일 거다.









인생을 살면서

무조건 내가 다 옳고 잘한 건 아닐 거다.


그들의 입장을 들어보면 내가 모르는 나의 문제라던지 그들만의 이유가 없지 않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시간 속 그 선택은 서로를 위한 좋은 선택이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나간 인연은 풍경화와 같다"



길을 걷다 보면 구정물도 있고 예쁜 꽃도 있듯, 그들도 그냥 지나쳐온 풍경일 뿐이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의 오답노트였던 이들을 비워내고

내 인생의 용량을 확보하려 한다.



나를 위한,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간으로 말이다.



다시는 오답노트를 쓰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오답노트들을 비워냈으니 이제는 정답만 잘 골라보리라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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